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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의 말투/몸을 바꾸어라

게여운 천녀

몸을 바꾸어라

반야(般若)의 웅전(雄詮)은

반야(般若)의 게여운 말은


반야는 지혜를 가리킨다. 여기서는 반야를 가르치는 불경, 『금강경』을 가리킨다. 머리 아픈 이야기 하려는 게 아니다. 웅전(雄詮)이란 한자말, 흔히 쓰는 말도 아니다. 낯설고 머리 아프다. 그런데 언해불전은 이 말을 '게여운 말'이라고 새긴다. 웅(雄)이란 글자, 자전에서도 사전에서도 대뜸 '수컷 웅'이라고 새긴다. 수컷은 '우두머리'라는 풀이로 이어진다. 이게 참 고약하다. 절에 가면 대웅전(大雄殿)이 있다. 부처님을 대웅(大雄)이라고 부른다. 저 풀이를 따르자면 '큰 수컷'이다. '큰 수컷 우두머리'가 된다. 웅(雄)란 글자에 '수컷'이란 뜻이 있고, 석가모니도 분명 '수컷'이고, 또 '우두머리'이고, 딱히 틀렸다고 할 수도 없다. 하지만 이런 읽기는 사전이나 자전, 글자를 따라 읽는 것이다. 불교책의 읽기는 아주 다르다. 언해불전은 '게엽다'는 말을 쓴다. 이 말이 참 기막히다.

장부(丈夫)는 게여운 남진이니


『석보상절』의 구절이다. 언해불전은 남자와 여자를 '남진과 겨집'으로 새긴다. 장부(丈夫)라는 말은 분명 남진을 가리킨다. 중국말로는 아예 '남편'이란 뜻으로 쓴다. '게여운 남진', 이 말을 뒤집어 보자면 '게엽다'는 말, 남진한테만 쓰던 말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남진이라고 다 게여운 게 아니다. 거꾸로 남진이 아니더라도 게여울 수 있다. 똑 같은 웅(雄)이지만 읽기가 다르고 느낌이 다르다. 서양의 말투에는 성별이 있다. 웅(雄)이란 글자가 '수컷'이란 말에서 나왔다지만, 언해불전의 읽기는 번득하다. '게엽다'는 말에는 성별이 없다. 남진도 겨집도 없다. 가리고 나누고, 분별도 없고 차별도 없다. 

게엽다, [옛말]

굳세고 씩씩하다.


웅의(雄毅)는 게엽고 날랠씨라


국어사전의 풀이는 이렇다. 굳셀 의(毅), '굳세다'는 뜻은 의(毅)에서 왔다. 국어사전은 '게엽다'를 '씩씩하다'로 풀이한다. 이 말은 '싁싁하다'에서 왔다. 언해불전은 엄정(嚴整)을 ‘싁싁이와 가작이’로 새긴다. '싁싁이와 가작이', 이 말은 몸가짐을 가리킨다. 몸을 곧게 펴고, 반듯하고 가지런히 걷는 모습이다. 몸이라는 글자에 성별이 없듯, 몸가짐에도 성별이 있을리 없다. '싁싁이, 가작이', 남진이건 겨집이건, 어른이건 아이건, 부처이건 개돼지이건, 누구나 가질 수 있고 차릴 수 있는 몸가짐이다. 몸가짐이 씩씩하면 누구나 게엽다. 

반야(般若)의 웅전(雄詮), 수컷만의 말이 아니다. 부처님이 하신 말씀, 부처님이 수컷이라고 말씀조차 수컷일리가 없다. 씩씩하고 당당한 말투, 그게 게여운 말이다. 게여운 말, 겨집도 아이도 들을 수 있고, 할 수 있다. 말에 성별이 있을 까닭이 없다. 나도 수컷이다. 수컷들은 '반야(般若)의 웅전(雄詮)', 이런 말을 들으면 은근 수컷을 연상한다. 동질감이랄까? 언해불전은 질(質)을 '얼굴'이라고 새긴다. 수컷의 얼굴인가? 우두머리 수컷의 우두머리 말씀, '애들은 가라', 알게 모르게 독차지 하려고 든다. 하지만 '게여운 말'에는 성별도 없지만, 어떤 차별도 없다. 언해불전의 말투가 그렇다.

(천녀는 바로 신통력으로 사리불을 천녀로 바꾸고, 자신은 사리불처럼 몸을 나토고는 물었다.)


천녀: 어째서 여자의 몸을 바꾸지 않습니까?

사리불(천녀의 모습으로): 저는 지금 어떻게 여자의 몸으로 변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천녀(사리불의 모습으로): 사리불이여, 만일 이 여자의 몸을 바꿀 수가 있다면, 이 세상의 모든 여자들도 다 바꿀 수 있을 것입니다. 마치 사리불 그대가 여자가 아니면서 여자의 몸을 나톤 것처럼, 모든 여자들도 똑 같습니다. 비록 여자의 몸을 나토고는 있지만 여자가 아닙니다. 그런 까닭에 부처님이 모든 존재가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니라고 한 것입니다.


나는 천녀를 생각하면 절로 '게엽다'란 말을 떠올린다. 이전에는 그냥 '엄지 척'이랄까, 달리 뭐랄 말을 찾을 수 없었다. 언해불전에서 '게엽다'란 말을 본 뒤로는 찾고 자시고 그럴 염도 사라졌다. '게여운 천녀', 게여운 말과 게여운 짓, 그냥 속이 편해졌다. 이게 다 언해불전의 말투 덕이다. 천녀의 몸가짐, 천녀의 말솜씨, 싁싁하고 날래다. 웅(雄)이니 수컷이니 가리고 따지고, 고민한 일도 없다. 그래도 가리고 따진다면 아예 몸을 바꾸어 버린다. 수컷의 몸을 암컷의 몸으로 바꾸어 버린다. '기분이 어때?' 쾌연(快然)이란 말이 있다. '씩씩하고 시원하다'라는 뜻이다. 언해불전은 '훤하다'라고 새긴다. 천녀의 솜씨, '훤하다'. 통쾌하다. 내 속도 다 훤하다. 더 말이 필요없다. 언해불전의 우리말투가 이렇게 훤하다. 

'게여운 천녀', 나는 이 말과 함께 '귀여운 천녀', 이런 말도 떠올린다. '게엽다'와 '귀엽다', 아마도 말이 닮아서 그럴 것이다. 처음에는 그랬다. 말에는 뜻이 따라 다닌다. 누구나 말을 듣거나 보기 이전부터 말의 뜻을 지니고 있다. 누구나 제 나름의 선입견을 갖고 있다. 말의 선입견, 개인의 것일 수도 있고 사회의 것일 수도 있다. 불교에서는 세계(世界)라는 말을 쓴다. 나의 세계가 남의 세계와 겹치면서 우리의 세계가 된다. 우리의 세계에 홀로 짓는 일은 없다. '귀엽다'는 말도 세계로부터 배웠다. 예를 들어 누구도 대웅씨를 귀엽다고 하지는 않는다. 그런 말은 아이나 겨집에게 쓰는 말이다. 그래도 나는 천녀의 몸가짐, 말솜씨, 그의 싁싁이와 가작이가 귀엽다. 그의 게여움이 귀엽다. 가볍고 가깝다. 그래서 게엽고, 귀엽고, 말도 짓도 훤하고 편안하다.

훤하고 편안하다지만, 이건 그냥 개인의 느낌이나 기분이 아니다. 불교책에도 장부니, 대장부니, 성별을 가르는 말이 참 많이 나온다. 이런 말이 은근 성별을 가른다. 대장부만이 할 수 있는 일, 여자나 어린이는 절대로 할 수 없는 일, 그런 선입견들이 끼어 든다. 남녀를 가려서는 안된다는 말조차 분별과 차별로 읽는다. 불교의 역사만 보더라도 이런 말, 이런 선입견은 참으로 지독하다. 불교는 남녀를 차별하지 않는다. 남녀는커녕 그 어떤 분별과 차별도 인정하지 않는다. 천녀가 하고 싶은 말이 바로 그 말이다. 나누지도 말고, 가리지도 말라. 그런데도 가장 가까이서 부처님의 말을 듣고 사는 제자들도 그걸 모른다. 하염없이 나누고 가린다. 그래서 꽃이나 붙이고 다닌다. 누가 귀엽고, 누가 게여운가? 기이할셔, 이런 건 어려울 것도 없다. 뻔한 이야기다. 그래도 꼬이는 말과 이야기, 도적이 되고 도적의 꾀가 된다. 남의 자유와 평등, 한가지 제쥬변을 앗아간다. 그래서 하는 소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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