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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의 말투/몸을 바꾸어라

왜 몸을 바꾸지 않는가?

몸을 바꾸어라

그 때에 유마힐의 방에 한 천녀(天女)가 있었다. 여러 보살들이 설법을 듣는 것을 보고 몸을 나타내어 여러 보살과 큰 제자들 위로 하늘 꽃을 뿌렸다. 보살들에게 뿌려진 꽃은 곧 땅에 떨어 졌으나, 큰 제자들에게 뿌려진 꽃은 몸에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제자들이 꽃을 떼어 내려 하였으나, 신통력으로도 떼어 낼 수가 없었다.


이때, 천녀가 사리불에게 물었다.


천녀: 어째서 꽃을 떼어 내려 하십니까?

사리불: 이 꽃은 법에 맞지 않기 때문에 떼어 내려는 것입니다.


천녀: 꽃이 법에 맞지 않는다고 하지 마십시요. 왜냐하면, 이 꽃에는 나누어 가리는 분별(分別)이 없습니다. 그대가 스스로 나누어 가리는 생각을 낸 것입니다. 부처님의 법에 따라 출가하셔서, 나누어 가리는 생각이 있다면, 그게 법에 맞지 않는 것입니다. 나누어 가리는 생각이 없어야 법에 올바른 것입니다. 

여러 보살들에게 꽃이 달라 붙지 않는 것은 그들이 이미 나누어 가리는 생각을 끊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마치, 사람들이 무서워하면, 그 틈을 타고 귓것 따위가 들어 오는 것과 같습니다. 스님들은 생사를 두려워하기 때문에, 빛과 소리, 냄새와 맛, 촉감 등이 그 틈을 타고 들어 오는 것입니다. 두려움을 떠난 사람은 다섯 가지의 온갖 욕망도 어쩌질 못합니다. 번뇌가 맺혀 있기 때문에 꽃이 몸에 붙는 것입니다. 번뇌가 끊어진 사람에게는 꽃이 붙지 않습니다.


『유마경(維摩經)』이라는 불경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이야기가 은근 재미있다. 희한한 상상과 발랄한 말투가 부딪치고 뒤집힌다. 여기 등장하는 천녀는 하늘 나라에 사는, 하늘 사람이다. 인도의 오래 묵은 상상이다. 하늘 옷을 입고 하늘을 날아 다닌다. 이야기 속의 비유라지만, 실제 있었던 일처럼 생생하다. 이 이야기는 오래 전부터 ‘천녀산화(天女散花)’ 라는 이름으로, 대중에게도 널리 알려졌던 이야기이다. 중국에서는 경극에도 자주 등장하던 소재였다. 『유마경』은 이야기로도 재미가 있지만, 그 안에 담긴 가르침도 희한하다. 그다지 길지도 않다. 

『유마경』은, 유마힐이라고 하는 거사에 관한 이야기이다. 보통 유마거사라고 알려진 분이다. 거사는 영향력이 큰 부자를 가리키던 말로, 출가를 하지 않고 집에서 도를 닦는 남자를 통칭하기도 한다. 석가모니가 살던 시기에 바이샬리(Vaishali)라는 큰 도시에 살았다고 한다. 이야기는 유마 거사가 병으로 앓아 눕는 것으로 시작한다. 유마는 자기가 아픈 까닭은 중생들이 아프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중생들이 나아야 제 몸도 나을 것이라고 한다. 이 또한 유명한 구절이다. 보살이란 말, 가장 바람직한 사람의 모습, 대승불교에서 내세우는 꿈의 인간관이다. 유마가 아픈 까닭, 이것이 바로 보살의 모습이고, 보살의 가치이다.    

석가모니는 유마가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 문병을 하도록 한다. 석가모니 당시의 제자들을 보통 1,250 인으로 꼽는다. 그 많은 제자들 가운데 으뜸으로 꼽히던 제자들, 모두가 머뭇거리기만 한다. 유마거사가 워낙 고수이기 때문이란다. 문병이건 무슨 까닭이건 그와 마주하는 게 두렵기 때문이란다. 모두가 꺼리던 일, 머뭇거리다 나선 문병의 자리, 아니나 다를까, 말하자면 동네 아저씨, 유마의 말재간에 보살도 제자도 그저 말문이 막힌다. 그러던 차에 꽃과 함께 나타난 천녀, 위의 장면은 바로 그 천녀가 사리불이라는 제자를 골려 먹는 대목이다.

갓 출가한 사미승들에게 주는 열가지의 계율, 그 안에 ‘꽃을 두르지 말라’ 는 게 있다. 요즘에야 멀쩡한 이들이 꽃을 두르고 다니지는 않는다. 그 때는 꽃을 두르는 일은 권력과 부의 상징이었다. 그 때는 출가한 수행자들, 종교도 권력이고 종교인도 권위였다. 어린 사미들, '꽃을 두르지 말라'는 계율은 권력과 부를 조심하라는 뜻이기도 했다. 천녀가 꽃을 뿌리는 까닭도 비슷하다. 아름다운 하늘나라의 꽃, 귀한 꽃으로 귀하게 맞이한다. 제자들이야 당연히 꽃을 털어 내야 한다. 계율이기도 하지만, 그런 맞이가 편치 않다. 하지만 떼어 내려 애를 쓰면 쓸수록 꽃은 더 달라 붙는다. ‘신통력으로도 떼어낼 수가 없었다.’고 한다.

한번 상상을 해 보자. 크고 넓은 방 한 가운데 달랑 침상 하나만이 놓여 있다. 몸이 아픈 유마는 침상에 누워 보살과 제자들을 맞는다. 여러 보살들과 함께 오백명의 제자들이 따라 나섰다고 한다. 침상을 둘러 싸고 죽 늘어선 보살과 제자들. 수행도 지혜도 모두가 뛰어났던 석가모니의 대표 선수들, 그 위엄, 싁싁함과 저픔도 대단했겠다. 경전의 묘사는 훨씬 더 환상이다. 보살이나 제자는 물론 하늘나라 임금들이 수많은 하늘나라 사람들을 이끌고 그 자리에 모였다고 한다. 신통과 환상이 겹치는 사이로 유마와 문수보살이 이야기를 나눈다. 말하자면 초절정 고수들의 초절정 말솜씨가 부딪친다. 

그리스에 소크라테스와 심포지엄이 있었다면, 『유마경』은 불교 스타일, 아시아의 심포지엄이다. 인간의 문제, 세계의 문제, 갖가지 깊은 이야기가 오간다. 이야기를 듣고 있던 제자들, 느닷없이 공중에서 듣도 보도 못한 하늘꽃이 쏟아진다. 하늘나라 옷으로 꾸민 아름다운 천녀가 공중을 날며 꽃을 뿌린다. 꽃을 뿌리는 일, 존경과 찬탄을 나토는 일이다. 하늘의 천녀가 유마와 문수보살, 그들의 대화, 그들의 지혜를 찬탄하는 것이다. 현실과 환상이 겹치는 순간, 사리불을 비롯하여 오백명의 제자들은 갑작스런 꽃의 공습에 정신이 쏠리고 만다. 그런데 늘어선 오백명의 제자, 꽃은 오직 그들에게만 달라 붙는다. 눈치를 보며 당황하여 꽃잎을 잡아 당기는 제자들의 모습, 그들의 위엄도 한 순간에 흔들린다. 

꽃을 두르지 말라. 이 한토막의 계율, 천녀의 꽃으로 환상의 장면은 문득 현실이 된다. 하늘의 이야기도 땅의 이야기로 바뀐다. 오백명의 제자를 대표하는 사리불, 천녀는 사리불에게 시비를 붙는다. 천녀의 말투는 가볍고 짖궂다. 그래서 대화라기 보다는 ‘골려 먹는다’는 느낌이 든다.

꽃이 달라 붙는 까닭은 나누어 가리기 때문이란다. 천녀의 골림, 귀엽고 게엽다. 나누어 가리는 생각, 수행자로서는 마땅히 꺼려야 할 일이다. 천녀는 이 걸, '꽃을 두르지 말라'는 계율에 앞세운다. 말투야 가볍지만, 심각한 도전이다. 계율과 분별, 어쩌란 말인가? 사리불은 어쩔 줄을 모른다. 말은 꼬이고 생각은 막힌다. 

사리불: 천녀여, 정말 대단하십니다. 그대는 무엇을 얻고, 어떻게 알았기에 이렇게 말씀을 잘 하십니까?

천녀: 저는 얻은 것도 없고, 안 것도 없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얻은 것이 있고 안 것이 있다고 한다면, 이는 알았다는 카냥일 뿐입니다. (중략)


사리불: 천녀는 어째서 여자의 몸을 바꾸지 않습니까?

천녀: 제가 12년 동안 여자의 모양을 찾았지만 끝내 찾지를 못했는데, 무엇을 바꾼다는 말입니까? 만일 환사(幻師)가 환술(幻術)로 곡도각시[환녀(幻女)]를 하나 만들었는데, 어떤 사람이 (환녀에게) ‘왜 여자의 몸을 바꾸지 않느냐’ 고 묻는다면 이게 올바른 물음이겠습니까?

사리불: 아닙니다. 곡도(幻)는 정해진 모양이 없는데, 바꿀 것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천녀: 모든 존재가 다 똑같습니다. 정해진 모양이 없는데, 왜 여자의 몸을 바꾸지 않느냐고 물으십니까?


(천녀는 바로 신통력으로 사리불을 천녀로 바꾸고, 자신은 사리불처럼 몸을 나토고는 물었다.)


천녀: 어째서 여자의 몸을 바꾸지 않습니까?

사리불(천녀의 모습으로): 저는 지금 어떻게 여자의 몸으로 변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천녀(사리불의 모습으로): 사리불이여, 만일 이 여자의 몸을 바꿀 수가 있다면, 이 세상의 모든 여자들도 다 바꿀 수 있을 것입니다. 마치 사리불 그대가 여자가 아니면서 여자의 몸을 나톤 것처럼, 모든 여자들도 똑 같습니다. 비록 여자의 몸을 나토고는 있지만 여자가 아닙니다. 그런 까닭에 부처님이 모든 존재가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니라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는 바로 신통력을 거두니, 사리불의 몸도 원래 모습으로 돌아왔다.)


천녀: 여자 몸의 모습이 이제 어디로 갔습니까?

사리불: 여자 몸의 모습이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습니다.

천녀: 모든 존재도 다 이와 같습니다. 있는 것도 아니고, 있지 않은 것도 아닙니다.


싸움은 애전에 결판이 났다. 사리불은 꽃을 떼어내지 못한다. 석가모니의 수제자, 위대한 스승을 곁에서 모시고 산다는 사리불, 천녀는 사리불이 알고 따르던 가르침을 하나 하나 뒤집어 엎는다. 똑똑 떨어지는 천녀의 말솜씨에 사리불은 대꾸조차 할 수 없다. 당황한 사리불은 천녀가 말을 잘 한다고 칭찬을 하면서 말을 돌린다. 어떻게 해서든 빠져 나가고만 싶다. 사리불은 애초부터 이런 일이 있을 줄 알았다. 그래서 문병 자체를 피하려고 했다. 아니나 다를까, 딱한 상황, 유마는커녕, 천녀에게도 수가 통하질 않는다. 천녀는 말을 잘하는 것이 아니다. 얻은 것도 없다. 아는 것도 없다. 말마다 옳다. 어디 달아날 구멍도 없다. 어지럽던 차에 드디어 결정타를 날린다. 

왜 여자의 몸을 바꾸지 않습니까?


이건 또 무슨 해괴한 소리인가. 여기에 사연이 있다.

이 때, 사리불이 용녀(龍女)에게 말했다.


"너는 오래지 않아 위 없는 도를 얻으리라 생각하지만, 믿기 어려운 일이다. 왜냐 하면, 여자의 몸은 때묻고 더러워서 법(法)의 그릇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떻게 위 없는 보리를 얻겠는가? 부처의 길은 아주 멀어서, 한없는 시간을 보내면서 고통스러운 수행을 쌓아 여러 바라밀다를 갖춘 뒤에야 이룰 수 있다.(중략)


어떻게 여자의 몸으로 빨리 성불할 수 있겠는가?


이건 『법화경』의 한 귀절이다. 여자의 몸은 더럽다고 한다. 법기(法器)가 아니라고 한다. 법(法)을 담는 그릇, 사람의 몸이다. 불교의 가르침, 불교의 법을 담는 것도, 법을 아는 것도 사람의 일이다. 사람의 몸이다. 위 없는 보리(菩提), 무상(無上)의 아롬이다. 불교에서 자주 쓰는 말이다. 사람의 몸으로 하는 일, 그런 일을 여자의 몸으로는 할 수 없다고 한다. 구물구물하는 모든 중생이 다 부처라는데,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데, 여자의 몸으로는 어림도 없다고 한다. 여자의 몸은 사람의 몸도, 중생의 몸도 아니라는 말이다. 더러운 여자의 몸, 이런저런 밑도 끝도 없는 설명이 따라 다닌다. 음탕하고, 방자하고, 절제도 없고, 온갖 나쁜 짓에 빠지기 쉽고, 가볍고, 거만하고, 불순하고, 간사하고, 요사스럽고……. 이런 것이 여자의 몸이다. 이런저런 더러움, 여자의 몸에 걸린 조건이란다. 마음을 고쳐먹고 애를 써도 결코 넘을 수 없는 한계란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란 말이 있다. 모든 것이 다 마음이 지어낸 것, 물론 불교 경전의 구절이다. 그래서 그런지, 세상에는 불교가 유심론이라는 주장도 있고, 그래서 마음에 비해 몸을 가볍게 여긴다는 선입견도 있다. 하지만 이런 건 말 그대로 선입견에 불과하다. 몸과 마음, 그렇게 쉽게 구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무튼 불교의 말투에서는 그렇다. 몸의 조건, 몸의 한계, 그렇게 쉽게 나눌 수 있거나, 극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무려나, 하필 왜 여자의 몸인가? 용녀는 그 때, 여덟 살 먹은 어린 여자 아이였다. 그 어린 아이가 용감한 마음을 내어 부처님처럼 알고 싶다는 소원을 세웠다. 지혜가 제일이라는 사리불, 그런 큰 스님이 철부지 어린애에게 하는 말이다.

너의 몸은 여자의 몸, 그래서 더러워. 그래서 안돼!


더러운 몸으로는 부처님의 법, 부처님의 바른 아롬을 감당할 수 없다. 물론 남녀차별이 심하던 고대 사회의 유산이다. 그래서 이른바 대승불교의 학자들은 사리불의 태도를 소승이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그래도 그렇지, 백보를 양보해도 너무 심하다. 철부지 어린애의 소망까지 저토록 무참하게 꺽어야 했을까? 하기야, 해도 안되는 일, 부추길 거야 없겠지. 사리불의 분별, 나누고 가림이 그랬다.

하지만 용녀를 걱정할 필요는 없다. 용녀는 무시무시한 큰스님, 사리불의 충고를 묵살한다. 그리고는 모로기 몸을 바꾸어 남자가 된다. 그리고 다시 모로기 수행을 완성하여 부처가 된다. 변성남자(變成男子), 불교에는 이런 희한한 말도 있다. '남자의 몸으로 바꾸다'는 말이다. 여자의 몸으로는 알 수도 없고, 할 수도 없는 일, 그래도 해야 한다면 몸을 바꾸라고 한다. 하여간 여자의 몸으로는 안된다는 말이다. 윤회 사상이란 말도 있다. 불교 이전부터 인도를 지배하는 사상이었다고도 한다. 윤회라는 말에 '사상'이란 말을 이어 쓴다는 게 게름찍하다.

아이가 울거든 부모는 곧 버들의 누른 잎을 들고 ‘울지 마라, 너에게 금을 주겠다’라고 한다. 아이가 (누른 잎을 보고) 진실의 금이라고 여겨 울음을 그친다. 그러나 버들잎은 실로 금이 아니다.


아이를 어르고 달래는 말, 불교에서는 이런 이야기를 방편이라고 부른다. 아이의 울음을 그치게 하기 위하여 거짓말을 한다. 때로는 으르기도 하고 달래기도 한다. 사탕 하나를 물려 줄 수도 있고, 겨드랑이를 찔러 웃길 수도 있다. 윤회의 이야기도 방편이라고 한다. 아무튼 이런 저런 방편들, 오랜 동안 불교를 지배하던 고정관념이 되기도 하였다. 윤회를 믿는다면 여자의 몸, 모든 부처님도 한번은 겪어야 했던 일이다. 그들도 여자의 몸을 가졌을 때, 다음 생애에는 남자의 몸으로 태어나기를 소원했다. 그 소원이 이루어져 남자의 몸으로 바뀌었고, 남자의 몸으로 수행을 하여 부처를 이루었다. 사리불의 뜻은 이런 것이었다. 이생에서는 그저 변성남자나 소원하거라.

그런데, 용녀는 사리불의 고정관념을 담박에 뒤집어 엎었다. 사리불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몸을 바꾸어 버렸다. 순간의 신통이라고 했지만 , 『법화경』은 ‘여자의 몸’에 대한 고정관념을 고쳐 버렸다. 순간에 벗어버릴 수 있는 몸이라면, 변성남자의 조건도 더 이상 몸의 조건이 될 수 없다. 몸의 조건, 과연 그런가? 복잡한 사연은 조금 미뤄 두고 우선 이야기를 따라가 보기로 하자.

사리불이 경황 중에 천녀에게 했던 물음, ‘왜 여자의 몸을 바꾸지 않느냐?’이 말은 언뜻 칭찬처럼 들린다. 당신 정도의 능력이라면 당장이라도 부처를 이룰 수 있다는 뜻이다. 사리불이라는 고명한 수행자가 젊은 여자에게 해 줄 수 있는 최선의 칭찬, 이제 마지막 조건, 남자의 몸을 받기만 하면 그만 아닌가? 그런데 왜 꽃이나 뿌리고 있는가? 뭐 이런 칭찬이고 덕담이다. 하지만 곰곰 따져 보면 칭찬치고는 맹랑하기 짝이 없다. 당시에 여자의 몸을 바꿀 정도로 의학이 발달한 것도 아닐진데, 여자의 몸을 어떻게 바꾼단 말인가? 당신이 아무리 수행이 깊고 말을 잘한다 해도 그래 봐야 여자의 몸 아닌가? 신통력도 대단하던데 말로만 잘난 체 하지 말고 할 수 있으면 어디 한번 몸을 바꾸어 보시지……. 사리불의 덕담은 그렇게 조롱이 되고 수작이 된다.

그러나, 천녀는 용녀가 아니다. 천녀는 자신의 몸을 남성으로 바꾸려고 하지 않는다. 천녀는 거꾸로 사리불의 몸을 여성으로 바꾼다. 기가 딱 막힌다. 이런 것이 『유마경』의 매력이다. '나토다'는 '나타내다', '드러내다'는 뜻의 옛말이다.화현(化現), 지어서 나타내는 일이다. 이런 말도 인도의 상상으로부터 왔다. 사리불로 몸을 나톤 천녀는, 천녀로 몸을 나톤 사리불에게 되묻는다.

왜 여자의 몸을 바꾸지 않습니까?


천의무봉(天衣無縫)이란 말도 있다. 봉(縫), 꿰맨 흔적, 언해불전에서는 끔()이라고 새긴다. 하늘나라의 옷에는 끔이 없다. 천녀의 솜씨에도 끔이 없다. 유마와 문수처럼 논리를 따르지도 않는다. 이것 저것 붙을 자리를 아예 막아 버린다. 곡도로 된 곡도의 몸이라고 한다. 곡도의 몸에 무슨 분별, 무슨 차별이람? 꽃이나 부치고 다니는 꼴에 바꾸기는 뭘 바꾸라는 건가? 바꾸려거든 그대 몸이나 바꾸시죠? 이런 말도 그저 다 나의 깜냥이다. 천녀의 솜씨에는 이런 깜냥도 부질없다. 

사리불은 이른바 소승의 원칙주의자들을 대표하는 제자이다. 석가모니 당시에 직접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 그들을 성문(聲聞) 제자라고 부른다. 석가모니의 목소리를 직접 들었던 제자라는 뜻이다. 이들은 석가모니와 함께 승단을 직접 만들고 이끌었던 1 세대 제자이다. 사리불은 그 중에서도 지혜가 가장 뛰어났다고 한다. 석가모니가 열반에 들고, 세월이 흐르면서 이들 1 세대 제자들이 석가모니의 가르침, 권위를 대표하게 된다. 이들은 석가모니로부터 직접 들었던 가르침, 말씀, 원칙에 집착한다. 그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말씀, 그것이 곧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그들만이 가진 그들만의 기억, 기억의 권위, 성문 제자들은 이처럼 말씀의 권위에 집착한다. 그래서 종종 현실과는 동떨어진 권위, 말씀의 근본주의에 빠지곤 한다.

문수보살: 중생을 제도하려고 한다면 무엇을 없애야 합니까?

유마: 중생을 제도하려고 한다면 그 번뇌를 없애야 합니다.

문수: 번뇌를 없애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유마: 바르게 염(念)해야 합니다.

문수: 바른 염(念)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유마: 불생불멸(不生不滅), 나지도 않고 없애지도 않는 것을 염해야 합니다.

문수: 어떤 것이 나지도 않고, 없애지도 않는 것입니까?

유마: 착하지 않은 일은 나지 않고, 착한 일은 없애지 않습니다.


문수: 착하고 착하지 않음의 근본은 무엇입니까?

유마: 몸이 근본입니다.

문수: 몸의 근본은 무엇입니까?

유마: 탐욕이 몸의 근본입니다.

문수: 탐욕의 근본은 무엇입니까?

유마: 허망한 분별이 탐욕의 근본입니다.

문수: 허망한 분별의 근본은 무엇입니까?

유마: 뒤집힌 생각이 그 근본입니다.


이 이야기는 몸에 대한 이야기이다. 천녀가 등장하기 직전, 유마와 문수보살은 저런 대화를 나눈다. 탐욕의 몸, 허망한 분별, 뒤집힌 생각……, 언뜻 들어도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그런 단순한 몸이 아니다. 사리불도 그런 대화를 듣고 따라오고 있었다. 하지만 사리불이나 제자들은 그런 대화를 듣고 수긍하지도 이해하지도 못한다. 유마의 몸도 자신의 몸도 알지 못한다. 위엄을 갖춘 제자들은 탐욕의 몸, 그런 얘기를 듣고도 제 몸을 나누고 가린다. 분별하고 차별한다. 바로 그 때, 천녀의 하늘 꽃, 제자들의 얼굴을 담박에 드러낸다. 바꿔야 하는 것은 여자의 몸이 아니다. 바꿔야 하는 것은 탐욕과 분별과 차별의 몸이다. 천녀의 솜씨, 신통하다. 더 이상 말이 필요없다.

게여운 천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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