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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인천강, 평등과 자유의 열쇠/말의 얼굴

1.9 어린이와 어진이


어린 백성이 이르고자 할 바 있어도


세종의 말씀이다. 우민(愚民)을 '어린 백성'이라고 새겼다. '어리다'라는 말, 요즘엔 '어리석다'라고 한다. 어리석은 백성, 백성이 왜 어리석지? 예전엔 나도 그런 의심이 있었다. 하지만 이건 그릇된 의심이었다. 저 말은 백성이 어리다는 말이 아니다. 백성 가운데 어린 백성도 있다는 말이다. 어린 백성에게도 하고 싶은 말이 있다. 그들에게도 말 할 기회를 주어야 한다. 그래서 어린 백성을 위하여 새로운 글자를 만들었다. 어린 백성, 어린이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누구에게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걸까? 하고 싶은 말은 또 뭘까?

부지현우(不止賢愚) 작우의(作羽儀)라

어질며 사오나옴에 우의(羽儀)될 따름 아니라


우의(羽儀)는 임금의 행차를 꾸미는 물건들이다. 화려하고 장엄한 행차, 이로부터 표본이나 모범이란 뜻이 나왔다. 우민(愚民), 어린 백성, 우(愚)라는 글자는 '사오납다'라고도 새긴다. 이 글자에 현(賢)이란 글자를 마주 세운다. 현우(賢愚)의 대구이다. 그리고 이 글자를 '어딜다'라고 새긴다. '어질다'의 옛말이다. '어질 현(賢)', 똑똑하다는 뜻이다. 어린 백성이 있다면 어진 백성도 있다. 어린이가 있다면, 어진이도 있다. 언해불전, 15세기 우리 말투였다. 어질고 - 어리고, 또는 어질고 - 사오납고, 이 대구의 쓰임새는 아주 넓다. 예를 들어 우열(優劣)이라는 대구도 '어질다 - 사오납다'의 대구로 새긴다.

우열(優劣)이 교연(皎然)커늘

어질며 사오나옴이 번득거늘


우(優)는 할씨요, 열(劣)은 적을씨라


우열이란 말 아래에 이런 설명이 달려 있다. 현우(賢愚)도 우열(優劣)도 많고-적고의 대구였다. 많으면 어질다. 적으면 어리다. 뭔가 넉넉하면 어질다. 거꾸로 뭔가 모자라면 사오납다. '번득하다'는 뚜렷하고 분명하다는 말이다. 밝고 환해서 누구나 보면 또렷하여 단박에 안다. 어질고 어리고, 넉넉하고 모자라고, 이런 일도 번득하다. 척 보면 누구나 다 안다. 15세기의 이런 말투, 이제는 헷갈리기도 한다. 현우나 우열, 많고 적고, 가진 양이 문제란다. 그렇다면 이건 어떨까? 돈이 많으면 좋다고 한다. 빚이 많으면 싫다고 한다. 돈을 잃으면 슬프다고 한다. 빚을 덜면 기쁘다고 한다. 이런 건 그냥 말장난일까? 이런 말장난도 하염없다.

실로 몸이 가난하나 도(道)는 가난치 않으니

나맟에 한 것도 없어 퍼런 봄을 지내놋다

너희 세인(世人)을 알외노니 상(相)을 취하지 말지라

한 디위 잡아 일으키니 한 디위 새로워라


빈 나맟의 노래, 몸의 가난과 도의 가난, 이건 또 뭐람. 누가 어질고 누가 어린 걸까? 어질고 어리고, 그냥 양의 차이일뿐이다. 싫고 좋고, 슬프고 기쁘고, 이건 양을 차이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차이이다. 많고 적음은 차별이다. 어질고 어리고, 이것도 차별이다. 좋고 싫고, 기쁘고 슬프고, 이런 것도 다 차별이다. 천개의 입과 하나의 입, 거스를 수 없는 심한 차별이다. 어린이와 어진이, 이건 15세기의 말투였다. 요즘에는 어린이와 어른이 맞선다. 유(幼)나 소(少), 나이가 적은 이들, 언해불전에서는 ‘졈다’고 한다. 젊다의 옛말이다. 그 반대는 ‘장(壯)하다’고도 하고, ‘늙다’라고도 한다. 살아온 나날, 나이가 적으니 어린이라고 해도 별다를 건 없다.

이 도(道)를 옮기샤 남을 이롭게 하실씨니 이는 자걔 아라시고 남 알외시논 덕(德)이라.


'알외다', 사전은 '아뢰다'의 옛말이라고 한다. 이런 말에도 어진이와 어린이의 차이가 담겼다. 요즘은 보통 '상감께 아뢰오!', 이런 말을 떠올린다. 어린이가 어진이게게 올리는 말씀, 임금님께나 쓰는 극존칭이라 여긴다. 그런데 언해불전의 '알외다'는 '알게 하다'는 뜻이다. 자각(自覺)은 '자걔 알다', 또는 '제 알다'라고 새긴다. 이에 비해 각타(覺他)는 '남 알외다'라고 새긴다. 부처의 일이다. 부처의 덕(德)이다. '알외다'는 아는 이가 모르는 이에게 알게 해 주는 일이다. 나는 '어진이가 어린이에게 주는 선물', 이런 말을 좋아한다. 상감도 모르는 게 있다. 그렇다면 알게 해 줘야 한다. 어진이와 어린이, 그리고 '알외다', 이렇게 읽으면 평등하다. 알면 알려 주고, 서로 서로 알게 되고, 이런 일을 '서로 사맟다'고 한다. 서로 통했다고 한다. '알외다'는 '아롬'을 두고 서로 통하는 일이다.

내가 만일 삼강행실을 언문으로 번역하여 민간에 널리 편다면, 어린 남녀가 모두 쉽게 알아 충신, 효자, 열녀가 떼로 나올 것이다.


사형 판결문을 이두와 한문으로 쓴다면 문리를 모르는 어린 백성은 한 글자의 차이로도 억울함을 당할 수 있다. 이제 그 말을 언문으로 써서, 바로 읽고 듣게 해 준다면, 아주 어린 사람이라도 모두 쉽게 알아 억울함을 품는 이가 없을 것이다.


이건 세종실록, 세종의 말씀이다. 조선왕조는 계급사회였다. 임금이 집현전의 선비들을 설득하는 말이었다. 가진 것으로 쳐도 세종은 가장 어진이였다. 조선의 선비들, 버금가는 어진이였다. 언해불전은 이럴 때, 맏-버거라는 대구를 쓴다. 맏어진이가 버금어진이에게 저렇게 호소했다. 임금은 어린 백성에게 '알외고' 싶다. 도덕도 법률도 알게 하고 싶다. 알게 한다면 어린 백성들도 억울함을 '알욀 수' 있다. 어진이들도 백성의 억울함을 들어야 하고 알아야 한다. 알게 해야 한다. 알고 모르고, 알면 어진이이고, 모르면 어린이이다. 그 사이에는 '알외다'가 필요하다. 서로 알욀 수 있다면 서로가 알게 된다.    

요즘의 말, 15세기의 말, 어느 모로 보나 어진 임금 세종, 그는 어리고 사오나운 이들, 가진 것이 적고 모자란 이들을 위해 글자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 글자를 가지고 윤리와 법, 온갖 책을 번역하려고 했다. 어린이도 할 말이 있다. 어린이의 말은 대개 어진이를 향한다. 넉넉한 이들을 향한 가난한 이들의 말, 으레 억울하고 슬프고 아프다. 어질고 어리고, 다만 양의 차별일 뿐이다. 세종은 그 차별을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그 차별의 슬픔과 억울함을 풀 길도 알았다. 맏어진이는 그렇게 어진이들을 설득하려고 했다. 차별을 풀어 주는 넉넉한 말, 어린이와 어진이를 모두 살리는 어진 말, 어진 나라의 모범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