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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인천강, 평등과 자유의 열쇠/말의 얼굴

1.11 밥에 평등한 이는 법에도 평등할새


어식(於食)에 등자(等者)는 어법(於法)에 역등(亦等)할새

먹는 것에서 평등할 수가 있으면 법에서도 평등할 수 있다.


한글대장경의 구절, 20세기의 우리말 번역이다. 불교책을 좀 본 사람이라면, 어디선가 들어 봤음직한 구절이다. 불교에서는 제법 흔한 구절이다.

밥에 평등한 이는 법에도 평등할새


이건 『능엄경언해』의 구절, 15세기 언해불전의 우리말 번역이다. 같은 한문 구절이다. 20 세기의 번역과 15세기의 번역, 말은 닮았어도 느낌은 아주 다르다. 이 말은 그냥 번득하다. 보는 사람, 읽는 사람, 순간 몸이 먼저 반응한다. 처음 이 번역을 보았을 때, 나도 그랬다. 헤아리고 따질 틈도 없었다. 글자들 가운데 그냥 이 말만이 또렸이 보였다. 그리고 오랜 동안 또렷이 남았다. 그 차이는 뭘까? 이 말에서는 뭐랄까, 힘이 느껴진다. 왜 그럴까? 궁금했다. 그래서 언해불전을 자꾸 보았다.

'밥의 평등, 법의 평등', 이런 말은 번득하다. 쉽고 분명하다. 평등이란 말, 언해불전은 ‘한가지’라고 새긴다. 이 말도 번득하다. 무엇보다 '밥과 법'의 대구가 번득하다. 우리 모두 한가지로 밥을 먹는다. 밥만큼 번득한 일도 없다. 개돼지는 물론이고, 아메바나 바이러스도 밥을 먹어야 산다. 무얼 먹건 어떻게 먹건 차이나 차별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밥을 먹는다는 것, 먹어야만 한다는 것, 이건 모두가 한가지이다. 한가지로 밥을 먹는 일, 그래서 이 일은 한가지의 법이 된다. 한가지 밥과 한가지 법, 밥의 평등이고 법의 평등이다.

하나는 늘 밥 비룸을 행함이오

둘은 분소의를 입음이니

셋은 돌 굴과 무덤 사이, 나무 아래에 편안하게 머뭄이오


(밥을 비는) 차례는 가난한 이와 가면 이를 가리지 아니하고 평등으로 화(化)하는 것이다. (밥을) 빌되 일곱 집을 넘지 않아야 한다. 일곱 집이 차면 남은 집에는 가지 않는다.


요즘에도 의식주란 말을 쓴다. 국어사전은 ‘인간 생활의 세가지 기본 요소’라고 풀이한다. 돌굴, 나무 아래, 오래 전 인도 초기의 석굴사원을 찾아 가 본 적이 있었다. 인도에는 크고 굉장한 석굴도 많다. 그런 곳에 가면 지친다. 하지만 초기의 석굴은 작고 아늑하다. 대개는 외지고 높은 곳에 있다. 물이 있고, 몇 개의 작은 굴이 있다. 굴 밖에는 나무들도 있다. 분소의는 똥을 닦아낸 천, 너무 더러워 버린 천을 줍고 기워 만든 옷이다. 그런 곳에 가면 그냥 그림이 그려진다. 비 오면 굴속에, 개면 나무 아래에, 그런 자리에 그런 옷을 입은 사람 몇몇이 모여 살았다. 

아침이면 가지런히 줄을 서서 마을로 간다. 때론 한시간도 걸리고 두시간도 걸린다. 일곱 집을 나란히 돌며 밥을 빈다. 그리고 다시 돌굴로 돌아온다. 손발을 닦고 함께 앉아 밥을 먹는다. 그런 곳에서는 그런 그림 밖에 달리 살혬이 없다. 이런 삶이 부처가 선택한 삶이었다. 부처가 가장 먼저 정한 법이었다. 평등의 밥이고 평등의 법이었다.

위의(威儀)를 싁싁이 하며 가자기 하여, 재법(齋法)을 공경하더니

재법(齋法)은 가작하며 싁싁하며 무거워 차례로 다녀 비롬을 이르니라


재법(齋法)은 밥을 빌어 먹는 법이다. 가작하다’, 또는 ‘가자기’는 가지런하다의 옛말이다. 엄정(嚴整)을 ‘싁싁이와 가작이’로 새겼다. 엄(嚴)은 ‘싁싁이’고 정(整)은 ‘가자기’다. 엄정, 요즘에도 쓰는 말이다. 사전은 ‘엄격하게 정돈함’이라고 풀이한다. ‘가자기’는 ‘가지런하다’의 옛말이다. ‘싁싁’은 ‘씩씩’의 옛말이라고는 하지만, 느낌이 좀 다르다.

위(威)는저플씨라


행주좌와(行住坐臥)

다니며 가만 있으며, 앉으며 누으며


‘저프다’는 ‘두렵다’의 옛말이다. 위의(威儀)는 두려움을 품은 모습이다. ‘싁싁이와 가자기’의 모습에서 저픔을 일으킨다. 불교에서는 행주좌와를 ‘네가지 위의’라고 부른다. 사람은 동물이다. 동물이 짓는 네가지 짓, 사람의 움직임을 대표한다. 이 움직임을 싁싁이하고 가자기 하라고 한다. 그 까닭은 저픔이다. 사람들은 싁싁하고 가자기한 모습에서 저픔을 느낀다.

대위(大威)는 큰 위엄이니 용(龍)을 저히나니라


‘저히다’는 두렵게 만드는 일이다. ‘싁싁하고 가자기 한 모습’에는 저픔이 담겼다. 근 저픔은 용(龍)도 저힌다. 두렵게 만든다. 용의 눈으로 보자면 ‘젛다’, 또는 ‘저허하다’가 된다. 두려움을 느낀다. 싁싁하고 가자기한 저픔은 보는 이들을 저힌다. 보는 이들은 ‘저허함’을 느낀다. 이런 것이 밥을 평등하게 빌어 먹는 법이다. 부처가 처음으로 정한 법이다. 저픔을 품은 법이다. 사람을 저히는 법이다.

안으로 이운 남기 같으되, 위의(威儀)를 빌꾸어 나토니

위의는 거동(擧動)이 싁싁고 본바담직 할씨라


고목(枯木)을 ‘이운 남기’라고 새긴다. 마르고 시든 나무이다. 속으로는 이운 남기 같아도 위의를 갖추라고 한다. ‘빌꾸어 나토다’, 나는 이런 말을 보면 그냥 기분이 좋아진다. 가현(假現)이란 말을 이렇게 새긴다. 요즘엔 가불(假拂)이란 말이 있다. 앞서 당겨 쓰는 돈, 빌꾸는 돈이다. 밥을 빌어 먹기 위해 위의를 빌꾸어 나톤다. 싁싁하고 가자기한 모습을 나토는 까닭은 저픔을 담아야 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싁싁하고 가자기한 모습을 저허한다. 그리고 ‘본받음직하다’, 이런 마음을 낸다. 이 것이 속은 말랐어도 위의를 빌꾸는 까닭이다. 밥의 평등 법의 평등, 이런 말에도 위의가 담겼다. 저픔이 담겼다. 사람을 은근 저힌다. 서늘하게 만든다. 이 것이 밥을 빌어 먹는 법이다. 한가지의 밥과 한가지의 법을 본받는 길이다. 밥을 빌꾸고, 저픔을 빌꾸는 까닭, 밥의 저픔과 법의 저힘을 빌꾸어 평등의 길을 함께 가고 싶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