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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의 말투/몸을 바꾸어라

수컷의 조건

몸을 바꾸어라

구지 스님은 비구니가 떠나간 뒤에, 한탄을 했다.

내가 비록 장부(丈夫)의 형(形)은 갖추었지만, 장부의 기(氣)는 없구나.

그리고는 암자를 버리고, 공부를 하러 떠나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천룡 스님이 암자를 찾아 왔다. 구지 스님은 비구니가 찾아 왔었던 일을 자세히 말씀 드렸다.

천룡 스님은 손가락 하나를 세워 보였다. 구지 스님은 이를 보고 훤히 키 알았다.


구지 스님은 이후로 공부하는 사람들이 찾아 와 법을 물으면, 손가락 하나만을 세워 보일 뿐, 다른 말이 없었다.


언해불전은 활연대오(豁然大悟)를 ‘훤히 키아롬’이라고 새긴다. 아무튼 구지일지(俱胝一指), '구지의 한 손가락', 유명한 손가락이다. 구지의 일지선(一指禪)이라고도 부른다. 요즘 인터넷을 찾아 보면 손가락 하나로 물구나무 서는 선승들이 나온다. 소림권법의 신공이라고도 한다. 신공(神功)이란 말, 이런 말이 사람 잡는다. 손가락 하나로 물구나무를 선다면, 그거야 귀신같은 솜씨라 말 할 수는 있겠다. 그래서 뭐? 무협지야 재미로 본다지만, 구지의 일지선은 재미도 없다. 손가락 하나로 뭘 어쩌겠나? 구지나 그의 스승이라는 천룡(天龍), 당나라 때의 선승이라는 것 밖에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다만 천룡의 스승 대매(大梅 752-839)를 통해 어림으로 짐작할 뿐이다. 아무튼 오래된 이야기이다.

구지 스님의 암자에는 동자 하나가 살았다. 사람들이 그 동자에게 구지 스님이 어떻게 설법을 하는지 물었다. 동자도 손가락 하나를 세워 보였다. 사람들이 구지스님에게 '동자도 불법을 압니다'라고 했다. 


구지 스님이 동자를 불러 물었다. 

스님: 듣자니 네가 불법을 안다고 한다. 그런가?

동자: 예.

스님: 어떤 이가 이 부처인가?

동자가 손가락을 세웠다. 스님이 칼로 그 손가락을 잘라 버렸다. 동자는 울면서 달아났다.


스님이 동자를 불렀다. 동자가 돌아 봤다. 

스님: 어떤 이가 이 부처인가?

동자가 손을 들었지만, 손가락을 볼 수 없었다.

훤히 키 알았다.


스님이 돌아가실 적에 대중에게 일렀다.

나는 천룡으로부터 한 손가락의 선을 얻었다.평생을 써도 다함이 없었다. 

말을 마치고 돌아가셨다.  


실제 비구니의 이야기와 일지선의 이야기, 이 두 이야기는 본래 하나의 이야기였다. 그런데 하나의 이야기가 둘로 쪼개져 퍼졌다. 예를 들어, 『무문관(無門關)』에는 동자의 이야기만이 실려 있다. 이에 비해 『벽암록(碧巖錄)』에는 두 이야기가 함께 실려 있다. 동자의 이야기는 알아도 실제 비구니의 이야기는 모르는 사람이 더 많다. 나는 이게 참 이상했다. 이상한 게 한 두가지가 아니다. 무엇보다 갑자기 주인공이 바뀌었다. 실제는 사라지고, 구지와 '한 손가락의 선(禪)'만이 남았다. 세번이나 거푸 물었던 실제, 한 마디도 할 수 없었던 구지, 실제는 삿갓도 벗지 못하고 저무는 산길을 돌아서 갔다. 멀쩡한 아이 손가락은 왜 자른단 말인가?

내가 비록 장부(丈夫)의 형(形)은 갖추었지만, 장부의 기(氣)는 없구나.


구지가 가진 것은 장부의 형(形)이다. 갖지 못한 것은 장부의 기(氣)이다. 이게 무슨 말일까? 언해불전의 말투를 따르자면, '장부의 얼굴'이고, '장부의 기분'이다. 이건 또 무슨 소리일까? 언해불전의 또 다른 말투, '노릇의 말씀'이나 '말씀의 똥'이란 말도 있다. 내겐 '도적의 꾀'란 말이 더 당긴다. 실제와 구지의 이야기, 나는 '장대(張大)한 말장난'이라고 부른다. 공간으로 치자면 아시아 대륙으로부터 동아시아 한문문화권을 아우르는 땅, 시간으로 치자면 천년, 이천년을 넘나드는 노릇이다. '장대한 망(網)', 언해불전은 그저 '큰 그물'이라고 새긴다. 강조를 하고 과장을 하려면 한자말을 써야 한다. 이런 것도 도적의 꾀이다.

스님이 탄식하기를

나는 사문(沙門)으로, 비구니(尼衆)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어쩌다 장부의 형(形)을 가졌으나, 장부의 용(用)은 없구나!


이건 『조당집』이란 책에 실려 있는 이야기이다. 사문은 출가 수행자를 가리킨다. 이런 저런 말, 따질 필요도 없다. 어려운 말, 들을 것도 없다. 큰 말의 그물에, 한번 걸려들면 빠져 나올 수 없다. 구지는 남자이다. 웅(雄), 수컷의 몸을 가졌다. 그 몸을 '장부의 몸'이라고 부른다. 게다가 그는 사문이다. 출가 수행자이다. 대웅(大雄)을 바라본다. 대장부(大丈夫)가 되고 싶다. 이런 말에 '수컷이나 사내'란 뜻이 담긴다. 구지의 한탄은 어려울 게 없다. 출가 수행자가 되어서 여자에게 웃음거리, 놀림거리가 됐다는 한탄이다. 장부의 형(形)과 용(用), 사내의 몸이다. 사내의 몸으로 짓는 짓이다. 구지는 남(濫)이란 글자를 쓴다. 언해불전은 이 글자를 '사이비'라고 읽는다. 사내의 몸인 것 같지만, 사내의 몸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런 한탄, 내게도 웃긴다. 그래도 처음엔 '좀 안됐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나는 실제가 더 궁금했다. 그래서 틈나는대로 실제의 자취를 찾아 보곤 했다. 대웅(大雄)과 대장부(大丈夫)의 길을 가는 사내의 세계, 그들의 말장난, 노릇의 말씀을 보면서 웃음이 터지기 시작했다. 제 몸에 제 한탄이야 탓할 것도 없다. 그런데 이들은 제 몸을 탓하던 눈을 실제의 몸으로 돌린다. 사문과 니중(尼衆), 이런 말부터 계급의 말이다. 남자와 몸과 여자의 몸을 차별하는 말이다. '어디 감히 여자의 몸으로', 이게 참 고약하다. 영웅(英雄), 꽃다운 수컷, 이런 말도 사내들의 말노릇이다. '어디 감히 여자의 몸으로', 영웅이란 이들이 이런 말을 쓴다. 웃긴다. 비겁하고 치사하다.

삼계에 나 건너고자 하되 듣글 그친 행이 없으면, 한갓 남자의 몸이 되고, 장부의 뜻이 없으니


삼계(三界)는 실존의 세계이다. 욕계(欲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 대웅씨는 세계를 초월, '건너 뛰라고'한다. 이런 게 영웅의 말투이다. 진(塵), 듣글이고 드틀이다. '듣글을 좇아 더러움 없으면 이름이 장부이라, 남녀를 논할 게 아니다'라고 한다. 네가지 일, 스승을 따라, 가르침을 들을 수 있고, 그 뜻을 사랑하고, 이른대로 수행하면, 그 사람이 장부라고 한다. 그렇게 한다면 '듣글을 좇아 더러움이 없다.', 그러면 삼계를 건너 뛴다. 남녀의 몸을 논할 게 아니라고 한다.

불교, 대웅씨가 만든 출가수행자의 세계, 사내들의 세계였다. 삼계를 건너 뛰는 일, 그런 말을 따르는 사내들의 세계였다. 그래도 불교책에는 저런 말이 참 많다. 그래서 더 웃긴다. 더 고약하다. 그런데 저 말, 영가현각의 말씀이다. 언해불전에는 영가현각이 지은 책, 두가지가 담겨 있다. 하나는 『증도가남명계송(證道歌南明繼頌)』이고, 다른 하나는 『선종영가집(禪宗永嘉集)』이다. 우리 조상들이 유난히 즐겨 읽던 책이었다. 이게 또 희한하다.

다시 일러라, 이 어떤 표격(標格)인고?

표(標)는 나토아 보람할시오, 격(格)은 나토온 법(法)이라


옛 성인의 냇보람을 봄이 마땅하거늘


실제는 영가현각의 냇보람을 그대로 따랐다. 하나는 구름누비의 냇보람이었다. 구지를 찾아 갔다. 석장을 들고 삿갓을 썼다. 그대로 세 바퀴를 돌았다. 그러면 구지는 뭐라도 대꾸를 해야 한다. 그게 영가현각의 냇보람이었다. 다른 하나는 '장부의 냇보람'이었다. 여자의 몸으로도 장부의 뜻을 품을 수 있다. 네가지 법을 닦으면, 그래서 '듣글이 그친 행을 하면', 그가 장부이다. 삼계를 건너 뛴다. 이것도 영가현각이 세운 냇보람이었다.

한갓 남자의 몸이 되고, 장부의 뜻이 없으니


내가 비록 장부(丈夫)의 형(形)은 갖추었지만, 장부의 기(氣)는 없구나.


나는 사문(沙門)으로, 비구니(尼衆)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어쩌다 장부의 형(形)을 가졌으나, 장부의 용(用)은 없구나!


이야기가 길어졌다. 이 세 마디는 같은 말이었다. 오래 된 냇보람이었다. 남녀의 몸,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런데 저 세 마디, 느낌이 다 다르다. '내가 이러려고 대통령을 했나, 이런 자괴감이.......' 자괴(自愧)라는 말, 언해불전의 말투로는 '제 붓그려'이다.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끼는 일, 부끄러움을 아는 일, 이건 좋은 일이다. 여자의 몸으로 선 실제의 싁싁함, 그리고 남자의 몸으로 앉은 구지의 '제 붓그려'가 영가현각의 냇보람을 싸고 돈다. 그런데, 실제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그런데 구지는 손가락의 선을 얻어 장부가 되었다. 평생을 잘 쓰고 살았다. 그렇다면 날도 저무는데, 실제는 도대체 어디로 갔을까? 나는 이게 궁금했다. 이상했다.

또 하나의 구름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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