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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의 말투/몸을 바꾸어라

이름 모를 할매

몸을 바꾸어라

한 할매가 암자에 사는 스님 한 분을 정성스레 이바지했다. 늘 어린 딸을 시켜 밥을 나르도록 했다. 그렇게 20년이 흘렀다. 하루는 밥을 가져 가는 딸에게, 스님을 끌어 안아 보라고 시켰다. 그리고는 스님에게 물어 보도록 했다.


딸: 이럴 때 어떻습니까?

스님: 마른 나무가 차가운 바위에 기대 섰으니, 한 겨울 추위에 따뜻함이라고는 없구나.


딸은 이 말을 그대로 어머니에게 전했다.

할매: 내가 20년간 속된 사내놈을 이바지했구나.


할매는 그 길로 암자로 달려가서 암자를 불질러 버렸다.


선사(禪師)들의 이야기에는 간혹 할매들이 나온다. 할매들, 도바(道婆)라고 부른다. '도 닦는 노파'라는 뜻이겠다. 그래서 그런지 이 할매들, 게엽고 날래다. 대개는 도 닦는 스님, 뺨을 치는 쪽이다. 그런데 이 할매들, 대개는 이름이 없다. ‘망명도바(亡名道婆)'라는 말이 있다. 세상에는 이상한 말도 참 많다. '이름 모를 할매'란 이름이다. 우리나라에는 '보살님'이란 말이 있다. 도바나 보살이란 말, 좋은 말이다. 도도 닦고, 보살행도 닦는다. 하지만 저런 말, 그냥 할매나 아줌마 따위의, 흔히 부르는 말일 뿐이다. 절에 잠깐 들른 할매가 도바이고, 허드렛 일을 도와 주면서 절에 사는 여인네가 보살이다. 이름도 없지만, 별 뜻도 없다. 부르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므던히 넘긴다.

저 이야기도 '이름 모를 할매'의 이야기이다. 게다가 이게 제법 유명하다. 선사들은 물론이고, 불교 책을 좀 본 사람이라면 다 아는 이야기이다. 더구나 저 할매, 말하자면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밥도 주지만, 불도 지른다. 그런데도 이름은 없다. 그래서 이 이야기, '망명도바의 이야기', '이름 모를 할매의 이야기'로 통한다.

이런 이야기, 선불교의 말투로는 '공안(公案)이라고 부른다. 요즘 말로 치자면 정부 기관의 공무서를 가리킨다. 어길 수 없는 나라의 법, 권위와 권력을 상징한다. 이런 이야기를 공안이라 부르는 까닭은 이야기의 담긴 힘을 잊지 말라는 뜻이다. 이 이야기에서는 '이름 모를 할매'가 암자를 불질러 버린 사연이다. 왜 그랬을까? 저 스님은 뭘 잘못한 걸까? 밥을 나르면서 아름답게 성장한 딸이 착 안겼을 때, 뭐라고 했어야 하나?

이런 이야기, 처음 들었을 땐, 이게 뭐지? 어리둥절했다. 실제 비구니의 이야기도 공안이다. 장부의 형(形)과 장부의 기(氣)를 묻는다. 저물녘에 떠나간 실제, 어디고 갔을까 참 궁금했다. 실제의 이야기를 들은 뒤로는 화가 났다. 실제는 그래도 이름이라도 남았다. 저 할매에게도 ‘망명도바(亡名道婆)'라는 이름 같지도 않은 이름이라도 남았다. 멀쩡한 저 딸은 도대체 뭐람. 저 스님이나 저 할매, 도라도 닦는다 치자. 저 딸은 시키는대로 밥나르고 안긴 것 밖엔 없다. 스님과 할매에게 20년이 있었다면, 딸에게도 20년이 있었다. 에미라는 자가 딸의 이름은커녕, 딸의 20년, 딸의 존재 자체를 지워 버리다니.

어떤 비구니가 승당 앞에 와서 말했다.

너희들 숱한 중생이 다 내 자식이다.


대중들이 할 말을 찾지 못했다. 한 스님이 동산 스님께 이 일을 말씀드렸다.

동산스님이 대신 말씀하셨다.


나도 그렇게 태어났다.


불모(佛母)라는 말이 있다. 부처를 낳는 부처의 어머니, 요즘에는 불상을 조각하는 사람을 부르는 말이다. 어떤 불모는 부처는 나무를 깎아 만드는 게 아니라, 나무에서 부처를 찾아 내는 거라고 했단다. 그런 말을 듣고, '그거 멋진데......', 그랬던 적도 있었다. 아무튼 그들, 부처를 낳는 어머니들은 대개 남자들이다. 남자 불모들이 만든 불상도, 그렇고 그런 남자 불상들이다. 그들의 나무 속에는 남자 부처만 사나? 물론 여자의 몸을 가진 관세음보살을 찾아내기도 한다. 그래도 부처는 아니다. 따지고 보면 관세음보살의 역할이란 것도 부처를 낳는 일이다. 부처의 어머니가 되는 일이다.

여자의 몸은 더러워 부처가 될 수 없다는 사리불, 그래서 몸을 바꾸어 부처가 되는 용녀도 있었다. 천녀는 여자의 몸을 바꾸려고 하지도 않는다. 도리어 사리불의 몸을 여자의 몸으로 바꾸어 버린다. 저 '이름 모를 할매'는 그런 이야기, 들어 보지도 못했단 말인가? 모든 중생이 부처라는데,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데, 이게 다 무슨 난리인가? 저 할매는 제 몸으로 부처를 이룰 생각은 하지도 않는다. 다만 남자 스님을 이바지하여 부처를 만들어 보려고 한다. 이런 게 부처를 낳는 일이다. 부처의 어머니가 되는 일이다. 저 할매의 꿈은 불모이다. 너희들이 다 내 자식이다! 저 비구니의 일도 불모이다. 꿈도 불모이다. 부처를 낳는 일, 나쁠 거야 없겠다. 그러고 싶다면 그럴 수도 있겠다.

이런 이야기, 짜증이 나는 까닭은 '딸' 때문이다. 제가 제 몸으로 낳은 딸, 부처를 낳고 싶다면 제 딸을 부처로 낳으면 안되는 까닭은 뭔가? 저 딸은 왜 20년간 밥만 나르고, 어미가 시키는 대로 스님에게 안겨야 하나? 딸도 불모로 만들면 그만이라는 것일까? 딸은 그걸 알았을까? 제 어미처럼 그걸 바랐을까? 실없는 소리, 그건 또 그렇다 치자. 이상한 어미도 있게 마련이라 치자. 저런 이야기를 공안으로 삼고, 법칙으로 삼는 이들은 또 뭔가? 저런 이야기를 이야기랍시고 여기 저기 기록하고 유통시키는 이들은 또 뭔가? 제가 부처가 되고 싶으면, 제가 부처가 되면 그만이다. 이름도 없는 할매나 딸은 뭐하러 찾나? 누군가 20년간 밥을 날라다 주고, 안겨 주고, 낳아 주어야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걸까? 부처가 되는 길에 엄마도 필요하고 종년도 필요하다는 건가?

저런 이야기, 헤아리기도 어려울만큼 많다. 어쨌거나 여자의 몸으로 태어난 사람은 밥이나 날라야 한다. 그 공덕으로 다음 생에는 남자의 몸으로 태어나기만을 바라야 한다. 이런 이야기, 어찌 보면 시시한 이야기이다. 그래도 화가 나는 까닭은 실제 때문이다. 실제와 구지는 사람과 사람으로 만났다. 실제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구지는 일지선으로 남았다. 이어지는 이야기는 더욱 괘씸하다. 사람들은 실제를 부처를 낳은 어머니로 삼는다. 실제는 구지를 낳아 놓고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실제는 다만 영가현각의 냇보람을 따라 막대를 흐늘고 구지 앞에서 섰을 뿐이다. 실제에게 대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구지는 그 덕에 한 손가락의 선을 얻었다. 구지의 일지선을 낳았다지만, 딱히 그것도 인정하지 않는다. 그 자리에는 천룡이 앉았다. 사라진 실제, 그거면 됐다. 그런가? 실제의 이야기는 이름 모를 할매의 이야기로 이어진다. 제 몸을 버리고, 제 딸의 몸도 버린다. 남자의 몸, 남자 부처를 낳아 주면 그만이다. 도적의 꾀가 따로 없다. 반성은 바라지도 않는다. 저런 이야기, 암자를 태우기 전에 저런 이야기를 먼저 태워 버려야 하지 않을까? 용녀와 천녀, 제 딸에게 부끄럽지도 않나?

수컷의 조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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