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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인천강, 평등과 자유의 열쇠/평등

2.2 기이할셔


즈믄 가람에 물 있으면 즈믄 가람에 달


달의 평등, 물의 평등, 월인천강은 평등의 노래였다. 부처의 가르침, 평등한 가르침을 이 한마디에 담았다. 그런데 월인천강, 이 말이 또 쉽지 못하다.

래무소래(來無所來)하샤미 월인천강(月印千江)이오

거무소거(去無所去)하샤미 공분제찰(空分諸刹)이로다


오셔도 오신 바 없으니, 달이 즈믄 가람에 비침이오

가셔도 가신바 없으니, 허공이 여러 나라에 나뉨이로다


이게 함허의 노래, 함허의 월인천강이다. 그리고 그 아래 우리말 번역은 세종과 두 아들의 노래이다. 오시고 가시고, 부처가 오고 가는 일이다. 부처의 가르침이 오고 간다. 가르침에는 본래 상대가 있다. 가르침을 주는 이가 있고, 가르침을 받는 이가 있다. 예를 들어 게임에도 상대가 있다. 투수는 공을 던지고 포수는 공을 받는다. 부처가 세상을 향하여, 중생을 향하여 돌아선다. 그리고 중생에게 가르침을 던진다. 이런 걸 ‘오시다’라고 표현했다. 부처도 사람이다. 시간과 공간 안에 존재한다. 늙기도 하고 죽기도 한다. 이런 건 ‘가시는 일’이다.

『석보상절』과 『월인천강지곡』, 요즘 말로 치자면 석가모니의 또는 부처님의 전기이다. 부처가 중생에게로 ‘왔던 일’, 그리고 시간이 흘러 ‘갔던 일’을 적었다. 함허는 그 일을 부처의 가르침이 ‘오는 일’과 ‘가는 일’로 노래했다. 그리고 오는 일과 가는 일을 다시 월인천강(月印千江)과 공분제찰(空分諸刹)로 나누어 노래했다.

공분제찰(空分諸刹), 나라에는 영토가 있다. 영토에는 국경, 경계선이 있다. 철조망을 치기도 하고, 장벽을 쌓기도 한다. 나라가 다르고 땅이 갈린다지만, 허공에 처음부터 금이 있을 턱이 없다. 금을 근다지만 허공이야 나뉘지도 않고 갈리지도 않는다. 나눌 수 없는 것을 구태여 나누고, 가를 수 없는 것을 억지로 가른다. 이 것도 평등과 차별에 관한 이야기이다. 같음과 다름에 관한 이야기이다.

석가모니가 처음 정각(正覺)을 이루고 사자후를 지었다.

기이하며, 기이할셔!

일체의 중생을 널리 보니, 여래의 지혜 덕상(德相)을 갖추어 두되, 오직 망상과 집착으로 알지 못하놋다.


이 말도 『금강경삼가해』의 구절이다. 정각은 ‘바른 아롬’이다. 석가모니는 오랜 수행을 거쳐 ‘바로 알았다.’ 그리고는 ‘기이할셔!’, 이게 첫마디란다. 사자처럼 울부짖었단다. 기이(奇異), 기(奇)라는 글자, 놀랍다는 말이다. 너무나 달라서 너무나 놀랍다. 그것도 두 차례나 놀란다. 뭐가 그리도 놀랍고 기이했을까?

부처는 바로 알았다. 그리고 놀랐다. 첫째 놀람은 ‘제 아롬’에 대한 놀람이다. 내가 왜 이걸 진작 몰랐을까? 왜 이제야 알았을까? 둘째 놀람은 중생과 세계에 대한 놀람이다. 저들은 또 왜 모를까? 몰랐던 것, 모르는 것, 이게 기이한 까닭은 알았기 때문이다. 누구나 알 수 있는데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알았다. 저들도 나랑 똑 같다. 내가 알았다면 저들도 알아야 한다. 그런데 모른다. 알아서 놀라고, 몰라서 놀란다. 이건 아니다. 뭔가 잘못됐다.석가모니의 아롬, 그 바탕에 부처의 지혜가 있다. 그걸 부처의 덕상(德相)이라고 부른다. 부처가 가진 것이다. 그런데 지혜가 됐건 덕상이 됐건, 석가모니만의 것이 아니다. 일체의 중생이 똑 같이 가졌다. 조건이 평등하다. 부처와 중생, 조건은 한가지, 본래부터 평등이다. 그런데 누구는 알고 누구는 모른다. 다르다. 한가지가 아니다. 평등하지 않다. 그래서 놀랍다. 평등한데 평등하지 않은 까닭, 망상(妄想)과 집착때문이란다.

중생이 한가지로 받았으되 모름을 너비 보샤 탄식하여 이르시되 기이할셔 하시고, 살고 죽는 바다의 가운데를 향하여 밑없는 배를 타고, 구멍없는 저를 부시니……


함허는 석가모니가 가르침을 시작하는 장면을 이렇게 노래했다. 이건 말하자면 함허의 기이함이다. 함허의 놀람이다. 동품(同稟)을 ‘한가지로 받다’라고 새겼다. 중생 모두가 한가지로 타고난 지혜의 덕상, 알 수 있는 능력, 본래평등이다. 살고 죽는 바다, 이건 평등하지 않은 중생의 세계이다. 평등한데 평등하지 않은 세계, 석가모니는 이 세계를 향하여 평등의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밑바닥이 없는 배, 구멍이 없는 피리, 밑도 끝도 없는 노래, 함허는 평등하지 않은 세계를 평등한 세계로 바꾸는 길을 이렇게 그렸다. 이런 일이 오시는 일이다. 바닥도 없고 구멍도 없기 때문에 오셔도 오시지 않는다고 한다. 이건 그냥 말장난이 아니다. 이런 세계, 현실이라고도 부르고 실존이라고도 부른다. 함허는 석가모니를 바라보며 놀란다. 그리고 다시 중생의 세계를 바라보며 놀란다. 월인천강과 공분제찰, 함허가 바라보는 부처의 가르침이고 가르침의 평등이다. 가르침이 있어도 평등하지도 않고 알지도 못하는 세계의 차별, 불평등이다.

아롬과 모롬, 그 사이의 놀람, 그런데 이게 끝이 아니다. 내가 알았듯, 너도 알 수 있어. 석가모니가 가르침을 펴기 시작한 뒤로도 즈믄 해가 두번 넘게 흘렀다. 그래도 모른다. 어진이는 어질고 어린이는 어리다. 불평등한 세계의 불평등한 세월만 속절없이 흘렀다. 그렇다면 부처는 뭐고, 가르침은 또 뭐람? 함허의 놀람이 이랬다. 본래 평등한 중생, 평등한 아롬을 얻을 길이 열렸는데도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평등의 노래, 몇천년을 불러댔어도 평등은 오지 않았다.

석가모니의 ‘기이할셔!’ 함허가 지어낸 이야기는 아니다. 함허는 이 이야기를 『화엄경』에서 읽었다. 널리 알려진 이야기지만, 숱한 이야기 중의 한조각일 뿐이다. 그런데 함허는 이 조각을 맨 앞에 내세운다. 기이할셔, 이 말에서부터 다시 시작한다. 이게 가르침의 시작이다. ‘내가 알았듯이 너도 알 수 있어!’, 이것은 함허의 관점이다. 함허의 해석이다. 이게 불교의 시작이고, 이게 불교의 전부이다. 함허는 놀람에 주목한다. 평등하지 않은 중생들의 세계도 기이하지만, 그런 세계를 향해 불러대는 부처의 노래도 기이하다. 함허는 석가모니가 가신 뒤로도 이천 남은 해가 흘렀다고 했다. 불교는 그 긴 세월 대륙을 넘나들었다. 말이 불교라지만 다 같을 리 없다. 갖가지 관점이 섞였고, 서로 다른 해석이 있었다. 때로는 심한 다툼도 있었다. 본래 평등의 기이함, 불평등의 기이함, 함허와 언해불전은 기이함에서 다시 시작한다. 부처의 가르침, 과연 효과가 있기나 한거야? 이천년의 가르침을 놀라움의 눈으로 다시 바라본다. 이건 그냥 불교가 아니다. 함허의 관점이다. 그리고 함허로부터 다시 시작하는 조선불교의 관점이기도 하다.

오셔도 오신바 없으니 달이 즈믄 가람에 비침이요


세종의 월인천강은 이런 말, 이런 뜻이다. 이건 세종의 기이함, 세종의 놀라움이다. 알 수 있는데 왜 알지 못할까? 누구나 한가지로 평등한데 왜 현실은 평등하지 않을까? 기이함, 놀라움, 함허가 시작하는 자리이고, 세종이 시작하는 자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