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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과 함께 읽는/道를 證한 노래는

010_01 이름과 얼굴

증도가 현각의 노래

물과 더품에 이름과 얼굴이, 다르다 여기지 말라.


명상(名相)을 '이름과 얼굴'이라고 새긴다. 앞에서는 형(形)과 상(像)을 얼굴이라고 새겼다. '얼굴'이란 말의 쓰임, 이제 다시 상(相)이라는 글자가 더해진다. 이런 글자들, 물(物)이란 글자,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물이나 물거품, 다 '것'이다. 사물이다. 물건이다. 명상(名相), 또는 '이름과 얼굴'은 '것'의 이름이고, '것'의 얼굴이다. 이름과 얼굴은 사람의 위(爲), 사람의 '하욤' 또는 '하염'이다. 사람이 물건을 보고 듣는 방식이다. 그리고 보고 들은 것을 서로 소통하는 방식이다. 물건에 이름을 달아 준다. 이름으로 사유하고 소통한다. 물건에는 얼굴이 있다. 이 얼굴은 물건 자체의 얼굴이다. 그 물건을 이름으로 부르면 물건의 얼굴이 함께 불러진다. 그래서 물건의 이름과 얼굴이 짝이 된다. 이 얼굴은 이름에 담긴 얼굴이다. 이름과 함께 따라오는 얼굴이다.

너겨 의론(議論)하며 사량(思量)하면, 어지러운 뫼에 가리리라


위(謂)라는 글자를 '너기다'라고 새긴다. 앞에 나왔던 말이다. 이런 새김도 언해불전의 말투이다. 위(謂)라는 글자는 보통 '말씀'에 붙여 쓴다. 말로 하는 사유, 말로 하는 소통을 전제로 한다. 의론하고 사량하는 일을 전제로 한다. 명상, 이름과 얼굴은 의론과 사량의 재료이다. 느끼다, 너기다, 혜다는 '하욤'의 길이다. 그리고 이 '하염'을 말로 나토는 재료가 되기도 한다. 저 구절은 사람의 '너기다'를 가리킨다. '하염'의 헛점, 빈틈을 이른다. '너기다'는 분석을 전제로 한다. 나누고 가리는 일이다. 물과 거품, 이름이 다르다. 이름이 다르면 이름에 달려 오는 얼굴도 다르다. 물과 거품은 다른 물건, 다른 것이다. 그렇게 여기지 말라고 한다. 그렇게 여기면 '어지러운 뫼'에 가린다. 이 구절은 '너기다'라는 동사를 앞에 두고 읽어야 한다. 이름과 얼굴의 짝은 '너기다'라는 동사의 재료로서의 이름과 얼굴이다. 요즘 말투로 읽자면 물건의 이름과, 이름이 가리키는 물건의 본질, 또는 속성이다. 뭐라고 부르건 그런 '너기다', 조심하라는 말이다.

본래의 근원 천진이 이아(이 것인가)? 상호로 장엄한 몸이 이아?

한 몸에 두 가지 마음을 나누어 짓도다.


무형(無形)호되 환유상(還有像)하시니, 

봉인(逢人)하야 설시비(說是非)하시나니라.


얼굴 없으되 도리어 얼굴 겨시니, 

사람 만나서는 시비(是非)를 이르시나니라.


한 몸에 두 가지 마음을 나누어 짓는다. 이런 일이 '너겨 의론하며 사랑하는' 일이다. 사람의 마음이고, 사람의 하염이다. 부처에게도 이름도 있고 얼굴도 있다. 이름을 부르면 얼굴이 따라 온다. 그 얼굴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얼굴이다. 물과 거품에도 이름이 있다. 얼굴도 있다. 그런 '너기다'를 망상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거짓'이란 뜻이다.

탐내다, 성내다, 어리다, 사람의 '하염'이다. 사람을 아프게 하고 죽게 하는 원인이기 때문에 독에 가잘빈다. 세 가지 독을 '속절없는 거품'에 가잘빈다. 물은 사람이 짓는 일, '하염'의 본래 얼굴이다. 본래의 얼굴에 속절없는 거품이 '일며 없다'. 물의 이름과 거품의 이름, 물의 얼굴과 거품의 얼굴, 다르다 여기지 말라고 한다. 거품은 다만 물에서 '일며 없다'. 물에서 일고, 물로 돌아간다. 일면 거품이라 부르지만 물로 돌아가면 거품이란 이름도 얼굴도 허망하다. 비고 속절없다. 다만 물의 이름, 물의 얼굴일 뿐이다.

무명실성(無明實性)이 즉불성(卽佛性)이니

밝음 없는 실(實)한 성(性)이, 곧 불성(佛性)이니


무명과 불성의 짝, 불성을 다시 진여(眞如)라고 바꿔 부른다. 이런 말도 툭 던지고 넘어간다. 물과 거품의 짝은 이 구절을 거듭 가잘비는 말이다. 이 구절을 다른 가잘빔으로 풀이한다. 이건 현각의 말투이고, 이 노래의 말투이다. 노래가 이어지면 풀이도 이어진다. 말과 가질빔도 조금씩 바뀌며 이어진다. 툭 던지고 넘어가는 데에도 다 까닭이 있다. 이름과 얼굴의 짝도 마찬가지이다. 구태여 따로 자세히 풀이하지 않아도, 따라 부르다 보면 익숙해진다. 말투도 번득해지고 노래가 가는 길도 훤해진다. 이 말투가 본래 그렇다. 한자말투를 우리말투로 바꾸어 부르는 언해의 말투이기도 하다.

증도가, 그대의 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