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세종과 함께 읽는/道를 證한 노래는

003_02 하염과 붙음

003_01 한자말을 다루는 기술

구름의 자취며 학의 양자어니 어디 붙으리오


남명의 노래이다. 영가의 무위(無爲), '하염없음'을 노래한다. 남명은 무위라는 말 대신에 '의탁(依托)'이란 말을 쓴다. 요즘에도 자주 쓰는 말이다. 국어사전은 '의지하여 맡김'이라고 풀이한다. 언해불전은 그저 '븥다'라고 새긴다. '붙다'의 옛말이다. '붙다'라는 우리말 새김, 언해불전에서도 아주 두드러지는 말투이다. 영가의 무위와 남명의 의탁, 그리고 언해의 붙다, 말은 달라도 세 노래가 한데 어울린다.

허공에 뜬 구름의 자취, 하늘을 나는 학의 모양, 어디에도 의탁하지 않는다. 의탁하지 않으면 위(爲)도 없다. 남명은 겨르로운 도인의 모습을 구름의 자취와 학의 모양에 견준다. 겨르로운 도인의 위(爲)와 구름과 학의 위(爲)를 견준다. 하염없다. 아무짓도 하지 않는다. 아무 데도 의탁하지 않기 때문이다. 의탁은 위(爲)의 근거이다. 의탁이 없다면 위(爲)도 없다.

밥 오나단 입 벌리고, 잠 오나단 눈 감나니라


언해불전의 구절이다. 요즘에는 '귀차니즘'이란 말이 있다. '배고프면 먹고, 졸리면 잔다'는 말도 있다. 그런데, 입 벌리고, 눈감고, 나는 이걸 처음 보고 몇일을 웃고 다녔다. 초극강의 '귀차니즘'이랄까, 아무튼 이 말도 '겨르로운' 도인의 모습이다. 이럴 때는 '게으른 노인'이란 말도 쓴다. 게으르단 말도 모자라다. 위(爲)를 '하욤'이라고 새긴다. 작위(作爲) 또는 작용(作用)이란 말도 있다. 언해불전은 이 말을 '하저즐다'라고 새긴다. 사람은 동물이다. 하욤이 없을 수 없다. 겨르로운 도인도 동물이다. 하욤이 없을 수 없다. 아무리 게을러도 입이라도 벌리고, 눈이라도 감아야 산다. 영가의 말, '겨르로운 도인'의 무위는 굶어 죽는 무위는 아니다. 그래서 '부러'라는 말을 쓰기도 한다. 의도를 가지고 지어내는 짓이다. 구름의 자취와 학의 양자는 그런 모양이다.

수연무소작(隨緣無所作)

연(緣)을 좇아 짓논 바 업도다


연(緣)은 브틀시오 기(起)는 닐시니 브터니닷 말이니


'븥다'라는 말, 언해불전에 정말 자주 나온다. 풀이도 새김도 필요없는 쉬운 말이다. 쓰임새도 아주 넓다. 영가의 무위와 남명의 의탁, 저기서는 연(緣)이라는 글자를 쓴다. '연을 좇아 짓논 바'가 영가의 '위(爲)이다. 작위이고 작용이다. '하욤'이고 '하저즈롬'이다. 연이라는 글자가 가 바로 '붙다'이기 때문이다. '브터니닷', '붙어서 일다는' 말이다. '닐다'라는 말, 요즘에 '일어나다'라고 쓴다. 구름의 자취와 학의 양자에는 '붙어 일다'가 없다. 겨르로운 도인의 모습에도 '붙어 일다'가 없다. 붙지 않는다면 '닐다'도 없다.

연기(緣起)라는 말, 영어로는 '디펜던트 어라이징(dependent arising)'이라고 부른다. 불교를 배운 서양 사람들, 범어로 불교를 배웠다면 범어 이름을 쓴다. 중국어나 일본어로 배웠다면 중국어나 일본어 이름을 쓴다. 그리고는 저렇게 제 말로 풀어준다. 그렇게 쓰던 말이 일상의 말이 되고, 학술 용어로도 쓰인다. 어려운 범어나 한문, 서로 다른 외국어, 제 말로 바꿔 쓰면 쉽다. 디펜던트, 남명의 말로는 '의탁(依托)'이다. 언해불전의 말로는 '붙다'이다. 그래서 연기는 '브터니닷', '붙어 일어나다'고 새긴다. 말이야 다르더라도 뜻은 닮았다. 말의 쓰임새에 익숙해지면, 뜻도 점점 더 닮아 간다. 15세기의 '브터니닷'이란 말, 그래서 참 고맙다. 처음엔 낯설어도 이런 게 우리말투이다. 이런 말투로 불교의 이야기, 연기의 이야기 쉽게 할 수 있다.우리말로 하는 사랑, 『증도가사실』, 언기(彥琪)의 사김과 견주어 보면 금새 알 수 있다. 이 노래의 우리말투, 이 노래를 읽는 또 하나의 재미이다.

겨르로운 도인은 일 없는 도인이다. 구름의 자취며, 학의 양자, 어디에도 붙지 않는다. 유(有)와 무(無), 있고 없고의 이분법이다. 어디에도 붙지 않는다. 중간을 넣으면 삼분법이다. 어디에도 붙지 않는다. 있고 없고의 중간은 뭘까? 보통은 2*2=4, 사분법으로 나눈다.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중간,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은 또 하나의 중간이다. 있고 없고, 그리고 중간의 삼분법도 언해불전의 독특한 말투이다. 긴 노래, 이제 겨우 첫 마디, 서두를 것 없다. 몇 구절 읽다 보면 금새 친해진다. 일 없는 도인, 아무 데도 붙지 않는다. 붙지 않으면 '닐지도' 않는다. 그래서 일 없다. 그래서 겨르롭다. 언해불전의 우리말투, 말이야 정말 쉽다.

증도가, 그대의 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