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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과 함께 읽는/道를 證한 노래는

005_02 밝음, 아롬의 조건

증도가 현각의 노래

둘 없은 곳이 또 없어야 본래의 사람을 보리니, 이는 이른바 성경(聖境)을 또 잊은 곳이다.

하다가 성경을 잊지 못하면, 이는 새로 인 사람이라, 본래의 사람이 아니다.


앞에서 '본래의 사람'과 '새로 인 사람'을 마주 세웠다. 이제 '본래의 대평(大平)'과 '비롯하는 대평'을 마주 세운다. 본대평(本大平)과 시대평(始大平)의 대구이다. 대평, 승평(昇平), 태평(太平), 다 같은 말이다. '배움그쳐 하염없은 겨르로운 노인'은 태평하다. 야노(野老)를 '뫼햇 늙은이'라고 새긴다. ‘뫼’는 산(山)의 옛말이다. 이에 비해 ‘’는 들(野)의 옛말이다. 둘 다 ‘ㅎ’ 받침이 있었다. 그래서 '뫼햇'이다. 산에 사는 늙은이와 들에 사는 늙은이, 이제는 둘다 '뫼햇'이라고 쓸 수 밖에 없다. 산이건 들이건, 어디에 살든, 대평하고 승평하다니 좋은 일이다. 좋은 일이라지만 좋아 할 것 없다고 한다. 노(勞)를 '잇비'라고 새긴다. 구태여 세운 이름, 잡들 것 없다. 본래의 승평에 잇블 것도 없다.

이는 '사람마다 각성(覺性)이 제 두려이 일었거니, 어찌 오늘날에 닦음을 쓰리오?' 함을 가잘비시니라


영가현각의 노래, 본래의 면목, 본래의 사람, 본래의 대평, '본래'를 거듭 노래한다. 언해는 그 까닭을 저렇게 요약한다. 짧고 분명하다. '본래 제 두려이 일었거니', 본자원성(本自圓成)을 이렇게 새긴다. 이 말도 언해불전을 읽는 열쇠말이다. 이 노래에도 몇 차례 나오지만, 언해불전 전체에 두루 쓰인다. 원(圓)이란 글자는 '두렷하다'라고 새긴다. 동그라미, 원만하고 완전하다. 성(成)이라는 글자는 '일다' 또는 '일우다'이다. 본래부터 제 안에 완성되어 갖춰 있다.

불타(佛陀)는 예서 이르기는 각자(覺者)이시니


각(覺)이 두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알다'는 뜻이니, 이지(理智)로 진(眞)을 비취실새, 적정(寂靜)이오,

둘은 '살피다'는 뜻이니, 양지(量智)로 속(俗)을 비취실새 혜명(慧明)이라


영가는 무명과 불성을 마주 세운다. 남명은 '구태여 세운 이름'이라고 한다. 언해는 무명을 '밝음 없음'이라고 읽는다. 그리고 불성은 '각성(覺性)이라고 읽는다. '알다'이고, '아롬'이다. 언해는 구태여 세운 이름, 아예 무시한다. 설명하려 들지도 않는다. 언해불전에는 영가현각이 지은 책, 두가지가 담겨 있다. 하나는 『증도가남명계송(證道歌南明繼頌)』이고, 다른 하나는 『선종영가집(禪宗永嘉集)』이다. 위의 구절은 『선종영가집(禪宗永嘉集)』의 구절이다. 부처의 각(覺)을 두가지로 나누어 새긴다. '아롬과 살핌'이다. 하나는 이치를 아롬이고, 둘은 중생을 '살핌'이다. 알기만 한다면 부처가 아니다. 살핌으로 중생을 향하기 때문에, 중생들의 부처가 된다. 아롬과 살핌, 모두가 '비추다'이다. '비춤'이다. 아롬과 살핌을 '빛'으로 가잘빈다. 한결같다. 언해불전의 번득한 '투'이다.

무명은 '밝음 없음'이다. 불성, 또는 각성은 '아롬'이다. 이 대구를 따르자면 '밝음 없음'은 '아롬 없음'이 된다. 빛, 또는 빛을 비춤, 그래서 '밝음'으로 '아롬'을 가잘빈다. 이 말투의 특징은 '아롬'의 대구를 '모롬'으로 부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롬'은 누구에게나 '본래 제 두려이 일었거니', 본자원성(本自圓成)'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중생이 모르는 까닭은 '밝음 없음'의 탓이다. 빛이 덮여 캄캄하기 때문이다. 모자란 것은 오직 '빛' 뿐이다. 오직 '밝음' 뿐이다. 빛을 가리던 '덮음'이 걷히면, 그래서 빛이 비추면, 누구나 그냥 안다. '덮음'과 그래서 '밝음 없음', 이것은 중생의 조건이다. '덮음'이 걷히면 빛이 비춘다. 이것은 아롬의 조건이고 부처의 조건이다. 불성, 각성, 아롬, 뭐라고 부르던 거리낄 것 없다.

어찌 오늘날에 닦음을 쓰리오?


'닦음'은 수(修), 수행(修行)을 가리킨다. 불교에는 갖가지 수행의 도구, 닦음의 방편들이 있다. 경전을 읽고, 염불을 하고, 보시를 하고, 참선을 하고....... 이런 것들은 '아롬'의 조건이 아니라고 한다. 언해의 저 짧은 한마디에 이 모든 이야기가 담겨 있다. 이 노래는 길다. 이제 겨우 몇 구절이다. 그런데 언해는 시작부터 저 한마디를 툭 던져 넣는다. 이게 참 딱부러진다. '밝음 없음'의 조건, '덮음'만 걷으면 된다. 그러면 그대로가 부처이다. '닦음'도 '하염'이다. '본래 두려이 일었거니', 잇비 닦을 것도 없다. 아롬과 대평이 비롯했다고 잇비 경하할 까닭도 없다. 빛만 비추면 모로기 안다. 그냥 안다. 수행도 점차도 부질없다.

증도가, 그대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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