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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과 함께 읽는/道를 證한 노래는

017_02 아롬의 그릇

증도가 현각의 노래

사구(四句)는 초범오도지구야(超凡悟道之具也)이니

사구는 범(凡)에 건너 뛰며, 도(道)를 아는 그릇이니


문자(文字)는 현도지구야(現道之具也)이며 도인지방야(導人之方也)이니

문자는 도(道) 나토는 그릇이며, 사람 인도하는 법(法)이니


나는 '그릇'이란 말이 좋다. 언해불전도 이 말을 즐겨 쓴다. 이 말 하나로 많은 이야기를 한다. 이 말 하나로 이야기가 참 쉬워진다. 요즘 말투로 치자면 '그릇의 이론'이나 '그릇의 철학'이랄까? 그래도 나는 그냥 '그릇의 말투'라고 부른다. 언해불전의 말투를 읽는 또 하나의 열쇠말이다.

'모로기 아로리니'. 이건 영가의 노래이다. '모로매 밀밀(密密)히 아로리니', 남명은 그 아래에 이 한 마디를 걸친다. 알려면 모름지기 '빽빽히', '쵝쵝이' 알아야 한다. 나는 '잔소리'라고 부른다. 모로기 아는 일에 '빽빽히'는 없다. 문을 열면 그냥 환하다. 그냥 훤히 안다. 남명은 적정무위(寂靜無爲)라고 한다. 언해는 '고요하고 하욤없어'라고 새긴다. 예를 들어 노자나 장자의 무위(無爲), 불교에서도 자주 쓰는 말이다. 그런 말을 '하염없다'라고 새긴다. 모로기 아는 일, 달리 무슨 짓을 할 까닭도 없고, 필요도 없다. 요즘말로 고쳐 읽자면 모로기 아는 일에 '잔머리 굴리지 마라'는 뜻이겠다. 남명의 잔소리는 말하자면 할매의 마음이고, 할배의 자비이다. '빽빽히' 아는 일, 남명은 사구(四句)를 들어 준다. 네 개의 구절, 사구(四句)는 논리의 말투이다. 있음과 없음, 서양의 논리는 둘로 나눈다. 인도의 논리는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은' 구절과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구절, 두 개의 구절을 더한다. 네 구절은 말하자면, 빽빽히 아는 방법이다.

두려운 부채를 비록 가져, 달의 둘레를 비기나

두려운 부채는 말씀을 가잘비고, 달의 둘레는 여래선을 가잘비시니


의(擬)라는 글자를 '비기다'라고 새긴다. 앞에서 '너기다'라고 새기던 그 글자이다. 네 구절은 말씀의 논리이다. 두려운 말씀은 빽빽한 말씀이고, 빽빽한 논리이다. 동그란 말은 온전한 말이다. 빈틈없는 논리이다. '모로기 아로리니', 말과 논리로 비길 일이 아니란다. 행여나 그러지 말라는 부탁이다. 『증도가사실』은 그래도 여래선을 빽빽히 쪼갠다. 보살과 성문(聲聞)과 인천(人天)과 외도(外道)의 선을 나누고, 여래의 선과 가린다. 과연 빽빽하다. 언해는 슬쩍 비껴 간다. '아롬이 오히려 그릇일새', 지금은 그릇을 걸어야 할 때가 아니다.

문자(文字)는 현도지구야(現道之具也)이며 도인지방야(導人之方也)이니

문자는 도(道) 나토는 그릇이며, 사람 인도하는 법(法)이니


이건 함허의 말투이다. '도구(道具)'와 '방법(方法)'이란 말이 나온다. 문자는 도구이고 방법이다. 길을 나토는 도구이고, 그래서 사람을 인도하는 방법이란다. 언해는 '도구'와 '방법'을 '그릇'이라고 새긴다. 훈민정음은 문자이다. 세종과 두 아들, 글자를 새로 만들었다. 그 이들도 함허의 저 구절을 함께 읽었다. 함께 우리말로 새겼다. 그 이들도 언해의 우리말투, '그릇의 이론', '그릇의 철학', '그릇의 말투'를 잘 알고 있었다. '모로기 아로리니', 너기거나 비기지 말라지만, 마땅한 그릇이 없다면 나톨 길도 없고, 이끌 수도 없다. 그래서 그들은 그릇을 새로 빚었다. 어린 백성을 위한 그릇, 도구와 방법을 만들었다.

그릇이라는 우리말, '담다'라는 동사로 바로 이어진다. 그릇은 뭔가를 담기 위해 만든 물건이기 때문이다. 도구와 방법이란 한자말, 지금은 누구도 새기려고 들지 않는다. 한자말 그대로 우리말로 여긴다. 사전의 풀이에도 한자말이 이어진다. 차라리 한자를 가르치고 배우라고 한다. 어쨌거나 도구나 방법이란 한자말은 명사이다. 동사로 이으려면 다른 절차를 거쳐야 한다. 이게 그릇이란 우리말과 도구나 방법이란 한자말의 가장 큰 차이이다.

마음을 맑히며, 사려(思廬)를 고요히 하여

문(文)을 붙어 의(義)를 궁구하며

의(義)를 붙어 문(文)을 찾으면


곧 문의(文義)의 그른 것이 터럭마큼도 숨지 아니하여

말갓말갓이 밝아 나타남이

세상의 병이 어진 의원의 손에서 도망하지 못한 듯 하리라


문(文), 글월은 그릇이다. 그릇 안에 의(義), 뜻이 담긴다. 글월은 담고, 뜻은 담긴다. 담는 것과 담긴 것, 딱 붙어 있다. 그래서 붙어서 찾으라고 한다. 요즘에는 '미디어와 컨텐츠의 의미론'이라는 서구 외래어를 쓰기도 한다. 위의 글도 함허의 의미론이다. 나는 '그릇의 의미론'이란 말이 더 좋다. 함허는 글월이라 하지만, 불교의 그릇, 성명구문(聲名句文), 네 가지 그릇을 들어 준다. 입과 귀로 나누는 말씀, 소리를 그릇으로 삼는다. 소리에 뜻을 담아 나톤다. 이름도 그릇이고, 구절도 그릇이고, 글월도 그릇이다. 말로 하는 소통, 그릇에 담는 일이고, 담긴 것을 꺼내는 일이다. 그릇에 다시 그릇을 담는다. 담는 일도 사람의 일이지만, 꺼내는 일도 사람의 일이다. 담을 때도 조심해야 하지만, 꺼낼 때도 조심해야 한다. 담고 꺼내는 일은 그릇에 붙는 일이다. 무엇보다 그릇이 좋아야 한다. 물을 담으려면 물그릇을 찾아야 한다. 불을 담으려면 불그릇을 찾아야 한다. 그릇이 쉬우면 담고 꺼냄도 쉽다. 그릇을 짓는 것도 사람의 일이다. 함허는 병과 의사를 가잘빈다. 그릇이 좋으면 병의 고통도 사라진다. 아롬을 향하는 그릇의 말투이다. 그릇을 돌아 보라고 한다. 담는 일, 꺼내는 일, 잘 살피라고 한다.

증도가, 그대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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