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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과 함께 읽는/道를 證한 노래는

005_01 구태여 세운 이름

증도가 현각의 노래

두 곳은 무명(無明)과 불성(佛性)이다. 구태여 ‘이름 세우다’ 함은, 이름 없는 곳에 구태여 이름을 세우는 것이다.


무명(無明)과 불성(佛性), 불교의 오래 된 열쇠말이다. 이런 말, '이름'이라고 부른다. 말로 하는 사랑, 이름이 가장 중요한 수단이다. 우리는 이름으로 사랑하고, 이름으로 소통한다. 강(强)을 '구태여'라고 새긴다. 요즘에는 이런 일, '억지로'란 말을 쓴다. 무명(無明)과 불성(佛性), 이런 이름은 구태여, 억지로 세운 이름이다. 이런 이름은 사람들이 붙인 이름이다. 사람의 위(爲), 사람의 '하염'이다. 본래는 없던 이름, 사람의 필요로 세운 이름, 그래서 '구태여', '억지로'라고 한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구태여 세운 이름, 언해불전에서 이름을 다루는 방식이다. 나는 이 말을 보면 저절도 저 시가 떠오른다. 이름을 부르면 꽃이 된다. 『증도가』, 이 노래에서는 이름을 부르는 일도 '하염'이다. 우리가 뭔가를 한다면, 뭔 짓을 짓는다면, '무엇'이 된다. 뭔가 바뀐다. 이 노래는 그대의 면목, 본래의 낯과 눈을 보라고 한다. 본래의 낯과 눈에 하염이 더해지면, '새로 인 사람'이 된다. 본래의 사람과 새로 인 사람, 그 다름을 보라고 한다. 무명(無明)과 불성(佛性)은 이름이다. 불교 이야기를 꺼내는 사람은 예나 지금이나, 이런 이름에서부터 시작한다. 이 이름을 꺼내는 순간, 말을 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이름에 빨려 든다. 무명(無明)과 불성(佛性)이라는 이름은 '아래부터 온 이름'이다. 유래(由來)를 이렇게 새긴다. 예로부터 불러 온 이름. 이삼천년의 역사를 갖고 있다. 이 이름의 세계이다. 이 노래를 풀이하는 『증도가사실』도 이름에서부터 새로 시작한다. 무명은 무엇이고, 불성은 무엇이고...... 아래부터 이어 온 이름의 세계 속으로 끌고 들어 간다. 그렇게 이름을 부르면, 옛 노래는 사라지고 새 노래가 나톤다. 언해불전은 이런 짓을 하지 않는다. 무명은 그냥 '밝음 없은'이다. 이름을 부르긴 해도 구태여 풀이하려 들지 않는다. 풀이를 해야 할 때도 있지만, 지금은 아니다.

여기서 무명과 불성은 범(凡)과 성(聖)의 다른 이름일 뿐이기 때문이다. 구태여 세운 이름이고, 구태여 부른 이름이다. 범의 이름을 부르면 범이 된다. 성의 이름을 부르면 성이 된다. 뫼햇 늙은이, 들에 사는 늙은이다. 하염없고, 겨르로운 늙은이다. 이름을 부르고, 뭔가 새로 되고, '잇비 마롤'이라고 한다. '잇브다'는 노(勞), '고단하다'의 옛말이다. 구태여, 억지로 하는 일은 잇브다. 속절없고 부질없다.

증도가, 그대의 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