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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과 함께 읽는/道를 證한 노래는

016_01 노래의 마디

증도가 현각의 노래


모로기 알고

여래선(如來禪)을


육도만행(六度萬行)이 체(體)의 가운데 두려우니


꿈 속에 명명히(明明)히 육취(六趣)가 있나니

깬 후(後)에 비어 대천(大千)이 없으니


영가현각의 노래, 320 구절의 긴 노래이다.

언해본에는 법동류(法東流)의 한 구절이 빠져, 319 구절이 담겨 있다. 『증도가남명계송』의 서문에도 '320편'이라고 했지만, 같은 구절이 빠졌다. 그 까닭, 아직은 모르겠다.

아무튼 긴 노래, 마디가 있다. 이 다섯 구절도 하나의 마디이다. 그리고 이 마디 안에도 나름의 짜임이 있다. 이 마디의 짜임새, 앞의 두 구절과 뒤의 두 구절이 가운데 구절을 싸고 있다. 가운데 구절이 이 마디의 중심이다. 언해본은 남명의 노래를 따라 이어진다. 따라서 남명의 노래를 따라 가다 보면 현각의 마디를 놓칠 수도 있다. 뭐 이런 마디도 어차피 듣는 '그대'의 몫이다. 부르는 사람, 듣는 사람, 깜냥이 다르겠다. 그래도 영가의 마디, 마디의 짜임새, 말하자면 이런 것도 서비스이다. '오직 꺼져 떨어짐을 면콰뎌', 영가현각, 늙은 할배의 마음이 담겼다. 마디를 따라 읽으면 그만큼 따라 가기도 쉽다.

모로기 알고, 여래선(如來禪)을


우리나라 불교, '돈점(頓漸) 논쟁'이란 게 있었다. 돈(頓)이란 글자, 언해불전은 '모로기', 또는 '문득'이라고 새긴다. 점(漸)은 '점점'이다. 모로기나 문득은 '모르다'와 '알다'의 사이에 있다. '점점'은 그 사이가 점점 좁아진다는 뜻이다. 세계, 시간과 공간에 사이가 있다. '모르다'는 어느 끠에 '알다'로 바뀐다. '모로기'는 그 사이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다. 모르면 모르는 것이고, 알면 아는 것이다. 그 바뀜에 사이도 없고, 점점도 없다. 영가현각은 선사이다. 그래서 선을 이야기한다. 여래의 선, 모로기 안다. 이게 앞의 두 구절이다.

꿈 속에 명명히(明明)히 육취(六趣)가 있나니

깬 후(後)에 비어 대천(大千)이 없으니


뒤의 두 구절, '꿈과 깸'이 짝을 이룬다. '모로기 알다'고 했으니, '모롬과 아롬'의 짝이기도 하다. 몰랐을 때는 '꿈과 깸'을 알지 못한다. 깨고 나면 꿈인줄도 알고, 깸인줄도 안다. 육취(六趣)는 여섯 가지 윤회의 길이다. 윤회의 길은 꿈의 길이다. 대천(大千)은 온 우주, 온 세계이다. 깨고 나면 우주도 없고, 세계도 없다.

육도만행(六度萬行)이 체(體)의 가운데 두려우니


이 한 체(體)는 '모롬과 아롬', '꿈과 깸'의 몸이고 바탕이다. 그래서 언해는 '내 몸에 본래 뒷논 것을 아니' 라고 풀이한다. 본유(本有)를 '본래 뒷논'이라고 새긴다. 원(圓)은 '두려우니'라고 새긴다. '두렵다', 요즘은 '원만하다'는 한자말을 쓴다. 두려움은 온전함이다. 빠짐이 없다. 내 몸 안에 모롬도 있고 아롬도 있다. 본래 다 빠짐없이 가진 것이기 때문에 모를 수도 있고, 알 수도 있다. '본래 뒷논 것'이기 때문에 '점점'도 필요없다. 모르면 모르지만, 알면 모로기 안다. 영가현각의 마디, 그 짜임이 이렇다. 긴 노래, 이 짜임새를 거듭 싸고 돈다.

이 마디에는 두 개의 각(覺)이 있다. 하나는 '알다'라고 새긴다. 다른 하나는 '깨다'이다. 잠에서 깨고, 꿈에서 깬다. '아롬'과 '깸', '깸'은 '아롬'의 비유, 가잘빔이다. 꿈도 깸도 가잘빔이다. '아롬과 깸', 같은 글자를 쓴다는 게 새롭다. 언해의 말투가 이렇다. 꿈에서 깨는 일, '점점'은 없다. 깨면 바로 안다. 그래서 돈(頓)이다. 문득이고 모로기이다. 꿈도 깸도 '본래 뒷논 것'이기 때문이다. '꿈과 깸'은 '모롬과 아롬'의 가잘빔이다. 두 개의 짝, 몸은 한 몸이다. 내가 내 몸 안에 가진 것이다. 몸 안에 함께, 한데 가진 것, 사이는 없다. 그래서 점점도 없다. 그걸 모르면 중생이라 부른다. 그래서 남명은 시신(始信), '처음 믿으라'고 노래한다. 몰라도 제 탓, 알아도 제 탓이다. 원인이 똑 같다.

증도가, 그대의 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