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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과 함께 읽는/道를 證한 노래는

009_02 속절없는 허공

증도가 현각의 노래

오음(五陰)은 뜬 구름이, 속절없이 가며 오나니

삼독(三毒)은 물 거품이, 속절없이 나며 없나니


이 두 구절도 짝으로 읽는다. 오음(五陰)과 삼독(三毒)도 짝이다. 뜬 구름과 물 거품도 짝이다. '가며 오나니'와 '나며 없나니'도 짝이다. 그 사이에 '속절없이'가 있다. 두 개의 '속절없이', 하나는 공(空)이고 다른 하나는 허(虛)이다. 뜬 구름은 가며 온다. 물 거품은 나며 없다. 출몰(出沒)을 '나며 없나니'라 새긴다. '없다'는 말, 요즘에는 형용사로만 쓴다. '있다-없다'의 짝, '있다'는 동사로도 쓰이지만, '없다'는 그럴 수 없다. 언해불전은 '없다'를 동사로도 쓴다. 요즘 말로는 '없애다', 또는 '없어지다'라고 해야 한다. 짝으로 쓰던 말투, 짝으로 새겨야 맛이다. 뜬 구름과 물 거품, 가잘빔이다. 불교에서도 언해불전에서도 흔히 쓰는 비유이다. 뜬 구름은 오고 간다. 언제 오고 언제 가는지 알 수 없다. 뜬 구름이 오면 하늘을 가린다. 봉우리도 가린다. 뜬 구름이 가면 하늘도 드러나고 봉우리도 나타난다. 물 거품은 나며 없다. 잠깐에 생겨 났다 잠깐에 사라진다. 가며 오는 사이에 나며 없는 일을 가잘빈다. 그런 일, '속절없다'고 한다.

맑음이 갠 허공에, 한점의 하(霞)도 없음 같도다


언해불전에는 허공(虛空)이란 말도 자주 나온다. 구름도 노을도, 한 것도 없는 '빈 하늘'을 가리킨다. '맑다'라고도 하고, '좋다'라고도 한다. 이 때의 하늘은 천공(天空)이다. '비다'는 하늘의 얼굴이다. 빈 하늘, 허공의 얼굴은 '비고 또 빈'이다. '빈 자리'는 공간이라고 부른다. 뜬 구름은 그 빈 자리를 오고 간다. 물 거품이 나며 없는 사이는 시간이라고 부른다. 둘 다 텅 비었다. 사람이 허공. 빈 하늘에 지어 부친 이름이다. 언해의 말투를 따르자면 위(爲)이고 '하염'이다. 뜬 구름과 물 거품은 가잘빔이다. 허공에 짓는 사람의 '하염'을 가잘빈다.

환화공신(幻化空身)은 '곡도같이 된 빈 몸'이라 새긴다. 우리의 몸도 뜬 구름처럼 오고 간다. 물 거품처럼 나며 없다. 된 몸은 빈 몸이다. 비었기 때문에 속절없다. 비었다는 말은 '얼굴이 없다'는 말이다. 땅콩의 대가리를 까도 얼굴이 없으면, '허탈하다'고 한다. 빈 집에 들어 서면 '고독하다'고 한다. 공수래 공수거, 빈손으로 가며 오나니, '허무하다'고 한다. 공(空)이라는 글자도 흔한 글자이다. 언해불전에도 자주 나온다. 명사, 이름이로도 쓰지만, 동사나 형용사로도 쓴다. 그럴 때는 보통 '공(空)하다'라고 한다. 한자 이름에 '-하다'를 달아 우리말처럼 쓰던 말투, 15세기 언해불전에서도 흔한 말투였다. 그런데 이 노래, '공하다'라고 쓰던 자리에 '비다' 또는 '속절없다'로 바꾸어 쓴다. '공하다'를 '비다' 또는 '속절없다'로 바꾸어 쓰려던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있었다. 이 노래에는 이들의 말투가 담겨 있다.

속절없다


단념할 수밖에 달리 어찌할 도리가 없다.

<쇽졀없다<월곡>←쇽졀+없-


사전의 풀이는 이렇다. 『월인천강지곡』에서 어원을 찾는다. 그런데 언뜻 보기만 해도 뜻이 다르다. 허(虛)나 공(空), 구태여 뜻을 맞춰 보려고 해도, 쓰임새가 너무 좁다. 하기야 15세기의 말과 요즘의 말, 말은 같아도 뜻이나 쓰임이 바뀐 말이 어디 이 말 뿐일까. 어쨌거나 이런 풀이로는 이 노래를 따라 가기 어렵다. '속절없다', 어찌보면 하찮은 한마디랄 수도 있다. 그래도 이런 말투가 이 노래를 끌어 간다. 이런 말투로 불교와 선(禪), '그대의 낯과 눈'을 노래한다.

공양을 먹고 속절없이 날 지냄이 못하리라

하다가, 무리를 좇아 속절없이 시절을 지내면, 저 끠에 염라노자가 밥의 값을 혜리니


앞의 '속절없이'는 등한(等恨)이다. 뒤의 '속절없이'는 공과(空過)이다. '등한하다', 사전은 '관심이 없거나 소홀하다'고 풀이한다. '등한'은 '부졀없다'고 새기기도 한다. '부질없다'의 옛말이다. 염라노자는 염라대왕이다. 시(時)는 '끠'라고 새긴다. 아무 생각없이 밥이나 먹고, 무리와 어울려 시절을 보내는 스님들을 꾸짖는 말이다. 그러다가 언젠가는 밥값을 톡톡히 치러야 한다. '속절없이'는 이렇게 무서운 말이다. '한(閑)'이라는 글자, '한가하다'는 말, '겨르롭다'라고 새기기도 한다. 이건 '배움 그쳐 하염없은' 늙은 도인의 한가함이다. 때로는 '속절없다'고 새기기도 한다. 이건 게으른 젊은 스님들의 한가함이다. 그 밥값의 차이는 뭘까?

넌즉한 문(門) 아래사, 도리어 서로 만나리라

아이는 어찌 능히, 넌즈시 알리오

넌즈시 본래의 마음을, 잃어 버리놋다


등한(等恨)이란 말, '속절없다'에서 '넌즉하다'로 이어진다. 그리고 다시 '넌즈기'와 '넌즈시'로 번진다. '넌지시'의 옛말이란다. 사전은 '드러나지 않게 가만히'라고 풀이한다. 이 풀이도 헷갈린다. '비다', '속절없다', '부질없다', '겨르롭다', '넌즉하다', '넌즈시'...... 이 노래, 이런 말투가 이어진다. 이런 말이 다, 요즘의 상식과는 차이가 있다. 무엇보다 이런 말은 다 허공이란 말에 붙어 있다. 노래의 흐름, 말투의 흐름을 따라 가지 못하면, 이런 말도 속절없이 넘어 간다. 이런 말을 골라 새기던 사람들이 있었다. 나는 이런 말을 보면 '잇비', 또는 '잇브다'란 말이 떠오른다. '애쓰다'는 말이다. 누군가 잇비 고른 우리말투였다. 바뀌고 잊혀진 말투, 그들의 밥값은 얼마나 될까? 그 값은 누가 치렀을까? 부질없는 상상만 남았다.

증도가, 그대의 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