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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과 함께 읽는/道를 證한 노래는

001_01 마주하여 나톰

증도가 현각의 노래

도(道) 증(證)혼 노래는


이 노래를 부르리니

열반회상(涅槃會上)에 아래, 친(親)히 부촉(付屬)하시다

금색두타(金色頭陀)는, 웃음 마지 아니하니

두어 뿔 퍼런 뫼히, 새 집을 대(對)하얐도다


모옥(茅屋)을 '새집'이라고 새긴다. 새와 띠로 지붕을 얹은 초가집이다. 수타청산(數朵青山), 타(朵)는 한송이, 두송이, 보통 꽃을 헤아리는 말이다. '뿔'이라고 새긴다. 꽃처럼, 뿔처럼 퍼런 뫼가 두어 뿔 솟았다. 남명법천은 노래에 앞서 그림을 그린다. 퍼런 뫼와 새집을 마주 세운다. 이 노래에서는 대(對)라는 글자의 역할이 크다. 열반회상(涅槃會上)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열반에 들기 전에 가졌던 법회의 마당이다.

증(曾)을 '아래'라 새긴다. '옛날', 또는 '일찌기'의 뜻이다. 언해불전에서 흔히 쓰는 말투이다. 석가모니는 꽃을 들고, 가섭은 웃음을 마지 않았다. 이것도 그림이 그려진다. 한 장면, 한 마당이다. 남명은 이 것도 대(對)로 그린다. 석가모니의 노래에 가섭이 마주한다. 가섭의 노래에 석가모니가 마주한다. 마주하고, 노래한다. 그래야 '증(證)혼 노래'가 된다. 영가현각과 육조혜능이 마주하는 그림, 석가모니와 금색두타가 마주하는 그림, 남명은 여기에 두어뿔 퍼런 뫼와 새집이 마주하는 그림을 더 한다. 부촉(付屬)은 '부탁하다'는 말이다.

'도(道) 증(證)혼 노래는', 이건 영가현각의 그림이다. 남명은 이 그림을 석가모니와 가섭의 그림으로 노래한다. 언해불전, 세종과 두 아들은 두 그림을 '대(對)하여 나톰'이라고 새긴다. 그리고 '눈에 봄을 당하여, 나톰이 분명한 뜻이다'라고 풀이한다. 내게 언해불전은 '우리말투'이다. 언해불전을 읽기 시작하면서 '말투'란 말이 입에 붙었다. 따지고 보면 말투에 앞서 '투'가 있다. 국어사전은 투(套)라고 읽고, '버릇이나 본새'라고 풀이한다. 영가의 노래, 영가의 투가 있다. 남명의 노래, 남명의 투가 있다. 그리고 언해의 노래, 언해의 투가 있다. 나는 '언해의 투'를 본다. '나톰의 투'이다. '말투' 이전의 '투'이다. 요즘에는 스타일, 또는 애티튜드란 말을 쓴다.

선사들은 노래를 좋아한다. 언제나 노래를 부른다. 선사들이 자주 쓰는 말에 평창(評唱)이란 말이 있다. 요즘에는 누군가 노래를 부르면, 누군가는 평론을 한다. 비평이라고도 한다. 선사들은 누군가 노래를 부르면, 노래로 마주한다. '석가모니는 꽃을 들고 가섭은 웃고', 이 구절에도 수백, 수천의 평창이 이어진다. 이게 참 볼만하다. 무한도전이 따로 없다. '무한(無限)'은 '그지없다'라고 새긴다. '무변(無邊)'은 '가이없다'라고 새긴다. 숱한 노래가 그지없고, 가이없이 이어진다. 세계의 중생이 그지없고, 가이없기 때문이다.

이런 노래, 요즘말로 치자면 평론이나 비평일 수 있다. 언해의 평창, 언해의 말투, 이건 그냥 '대(對)하여 나톰'이다. '나톰'은 표(表), 드러내고 나타낸다. 말로 나톨 수도 있고, 짓으로 나톨 수도 있다. '나토지 않음'으로 나톨 수도 있다. 이게 이 노래를 언해하는 이들의 '투'이다. 세종과 두 아들의 투이다. 그리고 이들의 투를 이어, 『증도가남명계송』을 마저 부른 이들의 '투'이다. 나는 이 '투'가 재미있다. 흔치 않은 '나름의 투'이기 때문이다. 『증도가』는 유명한 노래이다. 숱한 평창이 있었다. 숱한 투가 있었다. 세종과 두 아들의 투는 유별나다. 무엇보다 아주 쉽다. 나같은 바보도 따라 읽고, 따라 부를 수 있다. 그러다 보면 고개가 절로 끄덕여 진다. 이런 투, 잊혀졌다는 게 기이하고 희한하다.

두어 뿔 퍼런 뫼히, 새 집을 대(對)하얐도다


언해는 이 구절을 세가지 뜻으로 나누어 읽는다. 이건 언해의 평창이다. 세종과 두 아들의 노래이다. '문 앞에 뫼 빛이 치받으니, 가섭의 웃음 소리 길어라', 이건 '마주하여 나톰이 서로 분명'한 것이다. 그런데 가섭의 웃음과, 남명의 노래는 나누어 새긴다. '거의 머리와 뿔이 드러난 것'이고, '나무를 오르는 늙은 고양이가 몸을 뒤집는 뜻'이라고 한다. 이런 평창, 남명이 들었다면 뭐라 했을까?

아무튼 '늙은 고양이가 나무를 오르는' 장면, 이것도 절로 그림이 그려진다. 훌쩍 뛰었으나, 몸이 옛 몸이 아니다. '기(機)가 미치지 못한다'. 그래서 몸을 뒤집어 떨어진다. 떨어져도 고양이, 별 일 아니다. 웃음이 난다면 웃어도 그만이다. 그리고는 꽃을 잡는 것도 웃는 것도 '쓸데가 없는지라'고 마감한다. 현각과 혜능이 마주하여 나토고, 부처와 가섭이 마주하여 나토고, 이런 일은 사람의 일이다. 사람이 마주하면 뭔가를 한다. 뭔짓을 한다. 그렇다면 퍼런 뫼와 새집이 마주하면 뭘 할까? 퍼런 뫼와 새집, 사람이 그걸 본다면 뭘 보는 걸까?

'도(道) 증(證)혼 노래는', 이제 겨우 시작이다. 언해의 노래는 말하자면 이 구절에 대한 물음이다. 세종의 풀이와 새김, 말하자면 노래에 앞서 달아 주는 총론이나 총평이다. '우리는 이렇게 보거든?' 이런 투, 흔한 투가 아니다.

증도가, 그대의 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