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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인천강, 평등과 자유의 열쇠/말의 얼굴

1.6 한쪽으로 흐르는 냇보람


다시 일러라, 이 어떤 표격(標格)인고?

표(標)는 나토아 보람할시오, 격(格)은 나토온 법(法)이라


옛 성인의 냇보람을 봄이 마땅하거늘


표격(標格), 언해불전의 말투, ‘나토다’는 ‘나타내다’, ‘드러내다’ 라는 뜻의 옛말이다. 표(標)는 드러내어 보여주는 행위를 가리킨다. ‘보람하다’, 동사로도 쓴다. 격(格)은 보여주는 틀이다. 그릇이다. 말하자면 길에 널린 간판이나 광고판, 플래카드도 냇보람이다. 요즘 정치인들이 즐겨 쓰는 프레임이나 캐치프레이즈도 냇보람이다. 냇보람에는 틀이 있다. 대가리가 있고 얼굴이 있다. 대가리를 만나면 누를지 말지, 깔지 말지 선택해야 한다. 그러려면 무엇보다 먼저 얼굴대가리를 의심해야 한다. 잘 살펴야 한다. 

촛불의 겨울은 가고 다시 퍼런 봄이 왔다. 꽃 피는 시절, 장미대선이란 말도 나왔다. 어떤 대통령 후보가 ‘4차 산업혁명’이란 말을 들고 나왔다. 그게 유일한 살혬이라고 했다. 산뜻한 냇보람이다. 그래서 퍼런 봄은 느닷없이 산업혁명의 푸른 봄이 되었다. 그런데 저 냇보람의 말미를 따져 보면 이게 참 뜬금없다. 증기기관에서 시작하여 전기와 컨베이어 벨트의 시대를 거쳐, 컴퓨터와 자동화의 시대, 그리고 그 다음엔? 세계경제포럼(World Economic Forum)을 만든 클라우스 쉬바프(Klaus Schwab)는 ‘그 다음’에 ‘4차 산업혁명’이란 이름을 붙였다. 2016년 1월 포럼에서 발표한 보고서의 제목은 “일자리의 미래, 4차 산업혁명을 위한 고용과 기술, 그리고 인력 전략”이었다. 제목만 보자면 ‘일자리의 혁명’이 미래의 살혬인 것처럼 보이긴 한다. 막 시작한 혁명, 우리도 얼른 숟가락을 얹으면 금방 마술처럼 푸르른 살혬이 뛰쳐 나올 것도 같다. 나맟에 한 것도 없는 가난한 사람도 일자리를 얻고 나맟을 챙길 기회가 온 것처럼 느낄 수 있다.

과연 그럴까? 이른바 많은 전문가들이 ‘Cyber-Physical System’을 들먹인다. 줄여서 그냥 CPS라고 부른다. 말대가리에 담긴 얼굴을 모르면, 그냥 암호에 불과하다. 신비하고 신령한 암호, 모르면 무섭다. 아무려나, 컴퓨터 네트워크 기술로 기계와 사람을 연결하는 일, 이게 어제 오늘에 나온 게 아니다. 빈대가리의 노래에 공각기동대 만화영화를 들먹이는 데도 까닭이 있다. 미스 하라웨이가 하던 이야기도 똑 같다. 미스 하라웨이도 하늘에서 떨어진 게 아니다. 비슷한 SF의 전통 또한 더 오래 됐다. 기계와 기계, 사람과 기계, 사람과 사람이 연결되어 간다는 상상이다. 상상이나 환상이 현실이 되는 세계, 세계가 뒤집힌다. 어떤 전문가는 CPS를 ‘연결과 자동화’란 말로 요약하기도 한다. 거기서 무지 큰 시장, 무지 큰 돈이 나올 것이라고 한다. 너무나 커서 혁명이라고 부른다.

사이보그의 몸은 연결된 몸이다. 기계로 연결되고, 네트워크에 연결된다. 그것이 사이보그의 존재론이다. 사이보그는 그래서 사람과 사이보그의 얼굴대가리를 의심한다. 사이보그의 살혬을 찾는다. 4차 산업혁명을 주장하는 이들도 연결에 주목한다. 그러나 그들이 주목하는 것은 연결된 몸의 효율이다. 더 많은 일을 더 쉽고 더 빠르게, 게다가 더 싸게 할 수 있는 혬이다. 그 혬으로부터 더 많은 돈을 상상한다. 무지 많은 돈, 이것은 그들의 살혬이다.

많은 전문가들은 4차 산업혁명이 가난한 사람보다 부자들에게 훨씬 더 많은 혜택을 줄 거라고 주장한다. 특히 낮은 기술, 낮은 임금의 일자리는 자동화로 인해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이게 새로운 것도 아니다. 역사적으로 산업혁명은 늘 더 큰 불평등으로부터 시작했고, 정치적, 제도적 변화의 시대로 이어졌다. 19세기 초에 시작한 산업혁명은 부와 권력의 거대한 양극화로 이어졌다.


포브스(Forbes), 미국 잡지의 기사이다. 이런 것도 이미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4차 산업혁명은 미국과 영국을 비롯한 서구자본, 시장을 주도해온 소수의 백인 남성 엘리트가 주도하는 게임이다. 미스 하라웨이는 30여 년 전에 벌써 이럴 줄 알았다. 그래서 그는 그때부터 그 게임에 저항하는 페미니즘의 틀을 설계했다. 공각기동대의 오마쥬는 그냥 장난이 아니다. 그래서 2017년판 공각기동대의 화이트워싱은 더 고약하다.

미스 하라웨이의 말마따나 우리는 이미 사이보그이다. 키메라이고 하이브리드이고 튀기이다. CPS, 연결과 자동화의 시스템, 천 개, 억만 개의 입을 가진 이들, 그래도 '너무 적다'고 한다. 스스로를 '츠기 여긴다.' 그런 이들이 아니더라도 이 세계는 저 길을 향해 갈 것이다. 그리고 4차가 되든 5차가 되든 혁명은 끊임없이 벌어질 것이다. 얼굴대가리를 의심하는 사이보그, 그 자리가 우리의 존재론이 시작되는 자리이고 우리의 정치가 싹트는 자리이다. 누구를 위한 혁명이고, 누구를 위한 정치일까?

사이보그의 몸은 연결된 몸이다. 대가리도 연결되고 얼굴도 연결된다. 그런데 늘 빠지는 게 있다. 나맟이다. 사람이 연결된다면 당연 그의 나맟도 연결되어야 한다. 내 나맟이 빈다면 내 나맟도 알아서 채워 주어야 한다. 그래야 자동화 시스템의 연결도 완성된다. 하지만 언제나 제 나맟은 제 나맟이다. 자동으로 연결되는 나맟, 그냥 상상만 해도 빨갱이가 된다. 자유시장의 적이 된다. 

4차 산업혁명, 이 말대가리만 가지고도 누군가는 엄청난 돈을 벌 것이다. 제 나맟에 엄청난 물건들을 채울 것이다. 그들에게는 그게 자동화이고 연결이다. CPS를 통해 나맟이 연결되기는 한다. 그러나 그 연결은 한쪽 방향을 향해 흐르도록 설계된다. 자본시장을 주도하는 서구의 몇 나라, 몇 기업을 향해 흐르는 연결이다. 예를 들어 전문가들은 이른바 빅데이터를 다루는 기업이 엄청난 돈을 벌 거라고 예언하기도 한다. 연결된 몸이 생산해 내는 방대한 데이터, 기업은 사람들이 인터넷에 접속하고 클릭을 할 때마다 데이터도 가져 가고, 돈도 가져간다. 이런 게 사롤 혬, 살혬이라면 누구의, 누구를 위한, 누구에 의한 살혬일까?

저 대통령 후보가 4차 산업혁명을 주장한 직후, 반도체의 미래를 예측하는 신문 기사가 나왔다. 그들의 살혬도 빤하다. 4차 산업혁명이야 어차피 서구 빅브라더의 게임이다. 아시아에 아무리 많은 사람이 산다 해도 아시아는 아직 변방이다. 삼성이 아무리 큰 재벌이라 한들 그 게임을 이끌지는 못한다. 구글은 알파고를 만든다지만 우리에겐 이세돌 밖엔 없다.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이 참에 반도체나 많이 팔면 그만일까? 낙수 효과라는 말대가리, 이런 냇보람도 있다. 어딘가 돈이 생기면 어쨌거나 국물이 좀 흐르진 않을까? 그렇다 해도 한 나라의 지도자가 이런 냇보람을 들고, 이 나라 젊은이들을 그렇게 이끌어도 되는 걸까? 그런다고 그들의 나맟이나 얼굴이 정말로, 저절로 든든해질까? 저 대통령 후보는 이런 걸 다 알았을까? 그 사람의 대가리 속, 누가 알겠는가? 다만 알았다면 차마 내세우지 못했을 냇보람이겠다.

빈대가리 쪼아 봐야 손가락만 아프고 몸만 고달프다. 허탈하고 속상할 뿐이다. 냇보람은 냇보람일 뿐이다. 누군가의 냇보람은 누군가의 나맟을 향하게 마련이다. 그 냇보람이 내 나맟에도 좋은 거라면, 내가 직접 누르고 고르고 깨뜨려 봐야 한다. 냇보람의 얼굴을 확인해야 한다. 의심하자면 한도 끝도 없다지만, 어차피 천 개의 입을 가진 이들은 빈 나맟에 관심이 없다. 연결의 시대, 의심하거나 말거나, 내 빈 나맟도 모두 연결되기 마련이다. 다만 흐름의 방향이 문제이다. 빈 나맟은 빈 나맟의 길, 빈 나맟의 살혬을 찾아야 한다. 빈 나맟에게도 그럴 자유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