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월인천강, 평등과 자유의 열쇠/본래평등, 본래자유

4.3 한가지 고른 봄 - 평등의 뿌리

 

여덟 돌아감을 브터 미묘하게 맑은 견정(見精)을 가려 일러 여래장(如來藏)을 나토고

 

네가 나를 보는 견정(見精)의 밝은 근원이, 이 봄이 비록 미묘하게 맑은 마음이 아니나, 둘째 달 같아 닰그르메가 아니다.

 

진실의 달로 미묘하게 맑은 마음을 가잘비고, 둘째 달로 견정의 밝은 근원을 가잘비고, 닰그르메로 드틀에 버므는 분별을 가잘비셨다.

 

『능엄경언해』의 구절이다. 견정(見精)이란 말이 나온다. 나는 처음 이 말을 보았을 때, 요정(妖精)이란 말이 떠올랐다. 사전을 찾아 보니 ‘요사한 정령(精靈)’이란 풀이가 나왔다. 요사란 말도, 정령이란 말도 번득하지 않다. 얼른 느낌이 오지 않는다. 요정이 '요사한 정령'이라면, 견정은 '견의 정령'일까? 서양 전설에서 온 말이라니, 헷갈릴 만도 하겠다. 헷갈리는 한자말, 견정이란 말부터 따져 보자.

정(精)은 위무잡(謂無雜)시고, 진(進)은 위불태(謂不怠)시니

정(精)은 섞은 것 없음을 이르시고, 진(進)은 게으리지 않음을 이르시니

 

진실의 기(機)는 골아 섞은 것 없음을 이르니라

어미 낳은 가외는 순(純)하여 섞은 것 없으니

 

가외는 '외', 고의'의 옛말이다. 어미는 아기도 낳지만 고의도 낳는다. 아기의 여린 맨살에 입히는 속옷이다. 어미가 낳은 고의, 순(純)하다고 한다. '섞은 것이 없다'고 한다. 순(純)과 잡(雜)의 대구이다. 이에 비해 장바닥에서 파는 고의, 어떤 실을 썼는지 알 수 없다. 이 실 저 실, 싸구려 실을 섞어 짜기도 한다. 어미가 제 아이를 위해 낳은 고의, 섞을 리가 없다. 어미의 고의와 시장의 고의, 이게 순잡의 차이이다. 섞지 않은 순한 실, ‘고르다’라고 새기기도 한다. 섞은 것 없는 순한 옷, 고른 옷, 이게 정(精)의 뜻이다. 정진(精進)은 '오로지 나아감', '오로지 게으르지 않음'이다. '나아감' 밖에 달리 섞은 것이 없다.

문질(文質)이 빈빈(彬彬)하야사

문채와 얼굴이 골아사

 

문(文)은 문채(文彩)오, 질(質)은 얼굴이라

이 말은 『논어(論語)』의 말씀, 공자님의 말씀이다. 문채(文彩)는 무늬이다. 무늬와 얼굴을 마주 세운다. 이것도 얼굴대가리의 대구이다. 빈빈(彬彬)을 ‘고르다’라고 새긴다. 순(純)하고 고르다. 섞은 것 없이 순하고 고른 것, 그런 것을 '진실하다'고 한다. 언해불전은 공자님의 말씀을 이렇게 읽는다. 어미가 낳은 고의는 진실한 고의이다. 이런 새김, 이런 풀이, 참 친절하다. 이렇게 읽어 버릇하면 말도 뜻도 번득해진다. 아기를 위해 고의를 낳는 어미의 마음, 말 한마디, 글자 하나도 이렇게 낳고 이렇게 써야 한다. 그러면 번득해진다. 요(妖)란 글자, '요사하다'는 뜻도 있지만, '요염하다'는 뜻도 있다. 아리땁다는 말이다. 요정은 섞은 것 없는 '고른 아리따움'이다. 견(見)은 '보다', 또는 '봄'이다. 견정(見精)은 '섞은 것 없는 고른 봄'이다. '순수한 '봄'이다.

눈 비븨윰을 인하여 달이 되니

 

이야기는 다시 닰그르메, 월인천강으로 돌아간다. 진실의 달과 닰그르메의 이야기이다. 이제 그 사이로 ‘둘째달’이 끼어든다. 하늘에 진실의 보름달이 떴다. 자다가 일어나 졸린 눈을 비비면 달이 두개로 보인다. 그게 둘째달이다. 견정을 둘째달이라고 한다. 낯선 말, 갈수록 태산이다. 닰그르메에 대하여는 앞에서 얼마간 이야기를 했다. 연진분별(緣塵分別), 드틀에 버므는 분별이다. 비비고 버믈면 없던 달도 생겨난다.

하늘의 달은 진실의 달이다. 얼굴을 가진 달, 몸을 가졌다. 이에 비해 물에 비친 달은 그르메의 달이다. 물의 달은 그르메로 눈에 어린 달을 비유한다. 내 눈에, 내 몸의 뿌리에 어린 달이다. 그르메에는 얼굴이 없다. 몸도 없고 살도 없다. 진실의 달과 그르메의 달, 차이가 뭘까? 이 차이는 얼굴의 차이이다. 예를 들어 진실의 사과에는 얼굴이 있다. 질긴 껍질도 있고, 부드러운 살도 있다. 시고 단 사과의 살, 베어 물으면 맛도 있고 속도 든든하다. 하지만 내 눈에 어린 그르메의 사과, 빨갛고 둥글고...... 그르메의 모양 밖에는 가진 게 없다. '그림의 떡'이란 말도 있다. 실속이 없다고도 한다. 이런 것이 얼굴과 그르메의 차이이다. 이런 이야기를 자꾸 하는 까닭은 눈에 어린 그르메를 얼굴이라고 착각하거나 착오하기 때문이다. 그르 보고 그르 안다. 그르메로 놀이를 삼고 그르메 놀이에 착 달라 붙기 때문이다. 그 사이에서 갖가지 차별이 생겨난다. 그 전에는 없던 차별이다.

둘째달은, 진실의 달과 그르메의 달 사이에 낀다. 이 또한 비유이다. 얼굴과 그르메를 가리는 기술이고 방법이다. 비비고 버므는 사이에 생겨난 또 하나의 달이다. ‘견(見) – 봄’은 내 몸의 뿌리를 대표한다. 뿌리가 하는 일을 대표한다. ‘봄’이 다른 감각에 비해 특별해서가 아니다. 다른 뿌리도 마찬가지이다. 봄의 뿌리를 밝히면 여섯 뿌리도 쉽게 알 수 있다.

여덟 돌아감을 브터 미묘하게 맑은 견정을 가려 일러

 

견정(見精)은 ‘봄이 고르다’, 또는 '고른 봄'이란 말이다. 유(由)는 ‘브터’, 변(辯)은 ‘가려 일러’라고 새긴다. ‘여덟 돌아감’은 팔환(八還)이다. 환원(還元)이란 말이 있다. ‘본래의 상태로 돌아가다’는 뜻이다. 화학에서는 ‘산화-환원’이란 대구를 쓴다. 어떤 물질이 산소와 섞이는 일을 산화라 부르고, 섞였던 산소가 떨어져 나가는 일을 환원이라고 한단다. 이 말은 리덕션(reduction)을 번역한 말이다.

언해불전에서도 환원(還元)이란 말을 자주 쓴다. ‘근원으로 돌아감’, '뿌리로 돌아감'이다. ‘여덟 돌아감’은 견정, 고른 봄을 논증하는 방법이다. 뿌리로 돌아가는 기술이다. ‘보다’ 또는 ‘봄’에는 대상이 있다. 드틀이다. 눈이 드틀에 붙는 일, 버므는 일이 ‘봄’이다. ‘봄’이란 어떤 걸까? 그래서 ‘봄’이 일어나는 모습을 관찰하고 분석한다. ‘봄’은 섞는 일이다. 드틀에 붙는 일이다. 드틀에 비비는 일이고, 드틀과 버므는 일이다. 눈이 드틀과 버믈고 섞이는 일을 관찰하고 분석한다. '여덟 돌아감'은 그런 일이다. 눈과 드틀을 하나하나 가려 보는 일이다.

나의 눈이 하는 일, 나의 '봄'에 섞인 것들을 하나하나 가려낸다. 그리고 가려낸 것을 하나하나 온 자리로 돌려 보낸다. 예를 들어 하늘의 달을 본다. 달의 밝음은 진실의 달로부터 온다. 물에 있던 것도 아니고 내 눈에 있던 것도 아니다. 달의 빛을 달로 돌려 보낸다. 달의 모습을 달로 돌려 보낸다. 이런 일이 '돌려 보냄'이다. 봄의 대상, 봄의 드틀을 객진(客塵)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손님이다. 여행을 하던 사람, 밤이 되면 여관에 머문다. 손님이 되어 여관에 붙고 여관에 버믄다. 그러나 아침이 되면 여관을 떠난다. 제 볼 일을 보고 제 집으로 돌아간다. 제 집, 제 자리로 돌아 가는 일, 그게 환원이다. 뿌리로 돌아가는 일이다.

여관에는 여관을 지키는 주인이 있다. 손님이 다 떠난 여관, 주인은 혼자 남아 방을 치운다. 또 다른 손님을 기다린다. 손님이 다 돌아가고 주인 혼자 남은 여관, 또는 여관의 주인이 여관의 정(精)이다. ‘섞은 것 없는 여관’이다. ‘순한 것’이고 ‘고른 것’이다. ‘여덟 돌아감’은 여덟가지 사례이고 순서이다. ‘봄’이 이뤄지는 사이에 들어 온 손님들, 하나하나 돌려 보낸다. 모두 돌려 보내고 남은 것, 더 이상 돌려 보낼 곳이 없는 것, 그것이 견정(見精)이다. ‘봄’, 그 자체이다.

나의 '봄'은 밖에서, 또는 어디 다른 데서 온 것이 아니다. '보다', 또는 '봄'은 돌려 보낼 수도 없고, 돌려 보낼 곳도 없다. 섞인 것들을 모두 돌려 보내고 남은 것, 견정은 ‘순수한 봄’이고 ‘고른 봄’이다. 환원(還元), 또는 리덕션(reduction)은 동서고금에 오래 된 방법이다. 예를 들어 데카르트는 ‘순수한 사유’로 돌아간다. 언해불전의 말투를 따르자면 '고른 사랑'이다. 칸트는 ‘순수한 이성’으로 돌아간다. 후설은 ‘순수한 의식’으로 돌아간다. 불교의 환원은 이 보다 훨씬 더 오래된 방법이다. 돌려 보내고 남는 것은 달라도 돌려 보내는 방법은 똑 같다.

눈 비븨윰을 인하여 달이 되니

 

이것은 말하자면 실험이다. 내 눈을 비벼 보면 안다. 그르메가 어른 거린다. 둘째 달이 생겨난다. 둘째 달은 본래 없는 달이다. 제 눈을 비벼 보면 금새 안다. 비비고 버므는 사이에 그런 일도 생긴다. 둘째 달을 이야기 하는 까닭은 비비고 버므는 일을 살펴 보라는 뜻이다. 내 눈이 하는 일, 내 봄에서 시작되는 것들을 잘 보고 잘 살피라고 한다. 거기서부터 환원, 돌려 보냄이 시작한다. 섞은 것을 가려내는 관찰과 분석이다. 밖에서 온 것, 그 사이에서 그르 보고 그르 안 것을 가려내는 기술이고 방법이다. 진실의 달과 그르메의 달, 그 차이를 관찰하고 분석한다.

흐르며 그침이 덛덛홈이 없으니

고요하며 덛덛한 심성(心性), 알지 못함을 붙으니

 

눈이 있는 이는 누구나 본다. 사람만 보는 게 아니다. 뿌리를 가진 중생이라면 누구나 다 본다. 누구나 다 보지만, 누구나 돌려 보내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다 돌려 보내고 남은 것, 순수한 봄, 고른 봄, 봄의 주인은 누구일까? 누구는 ‘자아(自我)’ 또는 ‘나’라고 부른다. 누구는 ‘마음’이라고 부른다. 누구는 ‘영혼’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공각기동대는 ‘고스트’라고 부른다. 영혼불멸(靈魂不滅)이란 말도 있다. 자아와 마음, 또는 영혼은 사라지지 않는다. 변하지도 않는다. 언해불전은 상(常), 변하지 않는 것을 ‘덛덛하다’라고 새긴다.

제법무아(諸法無我), 제행무상(諸行無常)

 

‘나’도 없고 ‘덛덛함’도 없다. 이게 불교의 가르침이다. 모든 물건, 모든 존재는 시간과 공간의 틀 안에서 낳고 머물고 옮아 흐르다가 사라진다. 그 사이에 ‘나’라고 부를 것도 없고, ‘덛덛한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런데 언해불전은 여기서 ‘덛덛함’을 논증한다. 그 ‘덛덛함’의 근거가 바로 견정이다. 순수한 봄, 고른 봄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불교에서 말하는 ‘덛덛함의 논증’을 ‘불교가 아니다’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덛덛함’을 부정하는 것이 불교인데, 이걸 다시 구태여 논증하려 하기 때문이다. 인도의 불교가 중국으로 옮겨지는 과정에서 중국의 사상과 섞이는 사이에 생겨난 튀기라고도 한다. 가짜불교라고도 한다.

하지만 견정(見精)의 덛덛함, 이건 다르다. 예를 들어 환원 또는 리덕션의 방법은 서구 근대의 특성이라고들 한다. 환원의 방법은 근대 이전의 종교나 형이상학을 벗어나려고 한다. 믿음을 떠나 사람이 가진 것, 사람의 힘으로 사람의 문제를 풀어 보려고 한다. 환원의 덛덛함은 종교나 형이상학의 덛덛함과는 다른다. 견정의 덛덛함도 마찬가지이다. 이건 감각의 덛덛함, 상식의 덛덛함이다.

견정의 덛덛함은 중생의 자유와 평등을 논증하기 위한 덛덛함이다. 한 사람의 평등이 아니라, 모든 중생의 평등이다. 이런 문제는 이른바 보편(普遍)의 문제이다. ‘누구나 똑 같다’는 논증이다. 이런 논증은 쉽지 못하다. ‘덛덛함’을 바탕으로 하지 않는다면 생각을 시작할 수도 없고, 말을 꺼낼 수도 없다. 견정의 순수는 ‘봄의 덛덛함’이다. 눈을 가진 자는 ‘누구나’ 본다. 자아니 영혼이니 이런 것은 그 뒤에 누군가 구태여 붙인 이름일 뿐이다. ‘봄’은 까다로운 일이 아니다. 석가모니는 사람의 문제, 또는 세계의 문제들이 모두 ‘봄’에서부터 비롯했다고 한다. 여섯가지 뿌리가 하는 일이다. '봄'의 논증은 근(根), 뿌리의 논증이다. ‘봄’에서 시작한 일이기 때문에 ‘봄’에 붙어 모두 풀어 낼 수 있다고 한다. 석가모니도 환원의 방법을 쓴다. 생노병사의 모습을 관찰하면서 원인과 근원을 따진다. 그렇게 순수한 봄, 고른 봄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고른 봄에서부터 다시 시작한다.

『능엄경언해』는 '고른 봄'을 ‘덛덛하다’고 한다. 고른 봄의 덛덛함, 이런 걸 길게 따지는 까닭은 '부처의 봄과 중생의 봄이 똑 같다'는 말을 하고 싶기 때문이다. 내가 보듯, 너도 본다. 너의 봄으로부터 네가 중생이 되었듯, 나의 봄으로부터 부처가 되었다. 원인이 같으면 결과도 같다. 부처가 했던 일, 중생이 따라 하면 부처가 된다. 이 말을 하고 싶기 때문이다. 이런 말에 종교니 형이상학이니, 자아니 영혼이니, 까탈스럽게 따질 필요가 없다. 이런 말, 이런 생각도 다 돌려 보낼 수 있다. 내가 뒷논 것, 내가 가진 것에 붙으면 된다. 

봄의 덛덛함, 부처도 가졌고, 중생도 가졌다. 봄의 평등, 원인의 평등이다. 부처는 알고 중생은 모른다. 이건 다름이고 차별이다. 뭔가 잘못 됐다. 원인은 같은데, 결과가 다르다. 뭔가 다른 일이 끼었다. 견정이나 환원은 그걸 반성하는 일이다. 비비고 버므는 사이에 끼어든 일, 가리고 골라 돌려 보내면 된다. 그러면 그릇된 결과, 고칠 수 있다. 알 수 있다. 봄의 덛덛함을 가리는 까닭은 고치라는 뜻이다. 제가 본래 뒷논 것, 찾아 먹으라는 말이다. 

우리 모두가 자유로워질 때까지, 우리들 누구도 자유롭지 않다.

이 건 본래 자유인데 자유롭지 못한 세계의 일이다. 모두가 함께 얽혀 사는 세계, 자유롭지 않은 사람이 남았다면 미안하다. 불편하다. 자유롭지 못한 일, 그릇된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도 미안하다. 불편하다. 모르는 이들이 잔뜩 남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애를 쓴다. 우리 모두가 다 알 때까지, 우리들 누구도 아는 게 아니다. 그릇된 일이 남았다면, 그래도 고치려고 애를 쓰지 않는다면, 자유로울 수도 없고, 아는 것도 아니다. '봄의 덛덛함'은 고치라는 이야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