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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의 말투/기관목인 판타지

03_기관목인, 누구를 브트뇨?

기관목인 판타지

주나라 목왕(穆王)이 서쪽으로 시찰을 떠나 곤륜산(崑崙山)을 넘어갔다. 그러나 엄산(弇山)까지는 가지 못하고 돌아 왔다. 중국으로 돌아오는 길에 언사(偃師)라는 기술자를 만났다. 목왕이 불러 물었다.


목왕: 그대는 무슨 일을 할 줄 아는가?

언사: 신은 명령하시는 대로 다 해 볼 수 있습니다만, 신이 이전에 만들어 놓은 것이 있습니다. 임금님께서 먼저 보시길 바랍니다.

목왕: 다음날 가지고 와서 함께 보도록 하겠다.


이튿날, 언사가 임금을 뵙고자 하여 목왕이 불러 말했다.

목왕: 너와 함께 온 자는 누구냐?

언사: 신이 만든 광대입니다.


목왕이 놀라 돌아 보니, 걷고 숙이고 제치고 하는 것이 사람과 똑 같아 교묘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그 턱을 누르자 곡조에 맞춰 노래를 불렀고, 손을 잡자 장단에 맞춰 춤을 추었다. 시키는 대로 갖가지 변화를 부려 보이니, 목왕이 진짜 사람과 똑 같다고 여겨 왕후 성희(盛嬉)와 후궁들을 불러 함께 보았다.


연기가 끝날 무렵, 그 광대는 임금 좌우의 시첩들에게 눈짓을 했다. 목왕이 크게 노해 그 자리에서 언사를 죽이려 했다. 언사는 벌벌 떨며 바로 광대를 분해하여 목왕에게 보여 주였다. 가죽과 나무에 아교와 옻을 입히고, 검고 희고 붉고 푸른 빛으로 칠한 것이었다. 자세히 살펴 보니 속에는 간, 쓸개, 염통, 허파, 지라, 밥통, 창자 등이 들었고, 겉은 힘줄, 뼈, 관절, 피부, 털, 이빨, 머리털 등, 비록 모두가 가짜로 만든 물건이지만 없는 것이 없었다. 다시 결합을 하자 처음의 모습으로 돌아 왔다.


목왕이 시험 삼아 염통을 빼자 입으로 말을 할 수가 없었고, 간을 빼자 눈으로 보지를 못으며, 콩팥을 빼자 다리로 걷지를 못했다. 목왕은 비로서 즐거워하며 “사람의 교묘함이 조물주와 같을 수 있구나!” 라고 감탄했다. 


『열자(列子)』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열자는 전국시대, 도가(道家)의 중요한 인물이다. 같은 이름의 저 책은 기원전 4 - 5세기에 지은 것이라고 한다. 오랜 동안 도가 사상을 대표하는 저작, 도가의 경전으로 알려져 왔다. 게다가 주나라의 목왕이라면 기원전 9-10세기 적 사람이다. 삼천년 전에 있었던 일을 이천오백 년 전 사람이 기록해 놓은 이야기라는 뜻이다.

곤륜산이나 엄산이라는 땅은 또 어떤가? 곤륜산은 이 세상 모든 산의 조상이요, 모든 신선의 고향이라는 곳이다. 중국 도교의 영향으로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믿고 숭배하던 땅이다. 요즘엔 중국 서쪽 끝, 곤륜산맥을 연상하지만, 삼천년전의 곤륜산과 지금의 곤륜산맥이 똑 같은 동네라고 할 수 있을까? 게다가 엄산(弇山)은 곤륜산도 넘어 태양이 지는 땅이라고 했다. 해가 지는 곳은 서쪽의 끝이다. 해가 뜨는 곳은 동쪽의 끝이다. 동쪽 끝 부상에서 떠오른 태양은 하늘을 돌아 서쪽 끝 엄산으로 들어간다. ‘땅은 네모나고 하늘은 둥글다’고 믿던 시절의 이야기들이다. 이야기 속의 산과 바다, 오늘날의 지구본에서 찾고 따지는 일은 부질없다. 돌고 도는 지구본에 동서의 끝이란 건 없다.

『목천자전(穆天子傳)』이라는 책이 있다. 바로 저 주나라 목왕의 여행기라고 한다. 3세기 무덤에서 출토된 죽간(竹簡)을 바탕으로 5편으로 재구성했다고 한다. 이 책에 따르면 목왕은 지금의 낙양 인근에서 출발하여 지금의 감숙성, 청해성, 신강성 등지를 거쳐 곤륜산과 엄산, 이른바 서왕모(西王母)의 땅에 이르러 서왕모와 놀았다고 한다. 『열자(列子)』나 『목천자전(穆天子傳)』 모두 진위가 의심스럽다고도 한다. 오랜 세월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신화와 전설, 그리고 역사가 얽혀 있다. 그래도 『목천자전(穆天子傳)』은 중국 최초의 여행기이고 모험담이라고들 한다. 실크로드, 동서의 문명이 만나고 교류하던 최초의 기록이라고도 한다.

아무튼 저 목왕과 언사의 장면 또한 나름 유명한 장면이다. 근래 로보트나 안드로이드, AI가 첨단 산업, 또는 인기 좋은 판타지로 떠오르며, 중국 사람들도 좋아하는 이야기가 되었다. 말하자면 언사의 광대는 중국 역사 최초의 로보트, 안드로이드라고 한다. 당연 언사는 중국 역사 최초의 로보트 기술자가 된다. 언사도 광대도 판타지 게임의 인기좋은 캐릭터가 되었다.

삼천 년 전의 일, 그런데 이 언사의 광대가 노는 꼴, 공교의 기관목인과 똑 닮았다. 이 또한 공교롭다. 교묘한 기관장치야 인도는 물론 로마에도 있었다. 중국이라고 없으리란 법도 없겠다. 하지만 춤추고 노래하는 젊고 잘 생긴 남자, 임금의 여인에게 윙크하는 로보트, 맹랑한 남자 로보트에 질투하고 분노하는 임금, 죽이려고 줄을 끊고, 놀라고 반성하고...... 이야기의 구성이 똑 닮았다.

요즘이라면 표절 시비가 나올 법한 장면이다. 근거로 따지자면 공교의 기관목인이 언사의 광대를 압도하는 것처럼 보인다. 무엇보다 공교의 기관목인을 담고 있는 『생경』은 유래가 분명한 책이다. 후대에 엮어져 지은이도 분명하지 않은『열자(列子)』나 『목천자전(穆天子傳)』에 비할 바가 아니다. 게다가 기관목인 이야기, 불교에서는 흔한 상상이다. 이에 비해 언사의 광대는 『열자(列子)』밖에는 없다. 실제로 목왕과 언사의 이야기는 공교의 기관목인을 표절한 것이라는 사실을 논증한 중국의 학자도 있었다. 하지만 저 시간과 공간을 보라. 시간은 이삼천년을 오르내리고 공간은 인도와 서역, 중국을 주름잡는다. 진위를 둘러싼 논란이란 것도 따지고 보면 글자 몇 개를 두고 견주고 다투는 것에 불과하다. 누가 알겠는가? 저 길고 먼 이야기, 돌고 도는 이야기들.

(A)

마치 세상의 공교(工巧)한 환사가

곡도로 모든 남녀 짓듯 하니

비록 모든 근(根)의 움직임을 보나

모로매 한 기(機)를 빼혈지니

기(機) 없어 고요함에 돌아가면

모든 환이 성(性) 없음이 되리라


(B)

장담(張湛)이 이르기를 “이는 모두 기관이 시켜서 작동하는 것이다. 기관의 주인을 없애면 움직이게 할 수 없다.” 고 했다. 『대지도론』에서 이르기를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법(法)은 모두 ‘나’도 없고 ‘나에 뒷논 것’도 없다. 다만 여러 법이 화합하니 구태여 중생이라고 이름한다. 기관목인과 같이 비록 동작을 할 수는 있지만, 그 안에 주인이 없다.” 고 했다. 언사(偃師)의 비유도 이와 같다.


위에 인용한 (A)는 『능엄경(楞嚴經)』의 구절이다. (B)는 명나라 말, 청나라 초, 학자로 문장으로 이름을 떨쳤던 전겸익(錢謙益 1582-1664)이란 인물이 (A)의 구절을 해석하면서 달아 놓은 주석이다. 『능엄경』의 구절을 『열자(列子)』의 이야기를 들어 풀이한다. 장담(張湛)은 동진(東晉) 시대 사람으로 『열자(列子)』에 주석을 달았던 도가의 학자이다. 전겸익은 『능엄경』을 주석하면서 장담의 주석과 『대지도론』의 구절을 함께 인용한다. 『능엄경』에서 말하는 환술로 지은 몸과, 언사가 만든 광대의 몸은 모두 기관으로 작동하는 것일 뿐, 그 안에 주인, 나가 없다는 사실을 비유하고 있다고 한다. 말이야 그럴 듯 하지만, 조금 맹랑한 데가 있다.

붕(棚) 끝에 곡도 놀욤을 보라

빼며 이끔이 전혀 속의 사람을 빌었네


곡도의 노래, 추견(抽牽)을 '빼며 이끔'이라고 새긴다. 빼며 이끄는 것은 곡도에 걸린 줄이다. 속에 숨은 사람이 줄을 빼고 당긴다. 줄을 가지고 곡도를 조종(操縱)한다. 이 말은 '잡고 놓음'이라고 새긴다. 『능엄경언해』는 추(抽)를 '빼혀다'라고 새긴다. 여기서 빼혀는 것은 기(機)이다. 나는 동물이다. 내 몸의 움직임, 누가 빼고 이끄는가? 지도리를 쥔 자는 누구이고, 버튼을 누르는 자는 또 누구인가? 그걸 묻는다. 곡도나, 기관, 숨은 사람은 다 비유이다. 가잘빔이다. 『능엄경언해』만이 아니다. 비슷한 노래, 비슷한 가잘빔이 이어진다. 묻고 또 묻는다. 내 몸의 님자는 누구인가?

진(晉) 장담(張湛) 주(注)


이는 모두 기관이 시켜서 작동하는 것이다. 기관의 주인을 없애면 움직임을 다스릴수 없다. 마찬가지로 사람의 오장(五藏)에 병이 나면 밖의 일곱 구멍과 사지가 이에 반응하는 것과 같다.


당(唐) 노중현(盧重玄) 해(解)


무릇 안의 간과 담, 심과 폐는 바깥의 보고 듣고 걷고 신식(神識)이 움직이도록 하고, 나아가 생물(生物)이 되도록 해준다. 참으로 신(神)이 없다면 그 다섯 기관을 쓸 수 없다.


『생경』의 이야기와 『열자(列子)』의 이야기를 찬찬히 비교하여 보면, 기관장치에 대한 묘사에 두드러진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생경』의 기관목인은 기관과 360개의 관절에 대한 묘사가 전부이다. 다시 말해 기관의 몸을 움직이게 해 주는 장치들이다. 정교하다고는 하더라도 기관장치가 끈으로 연결된 관절을 움직이게 한다고 했다. 기관장치가 어떤 것이었는지는 몰라도 대개 서양 인형극에 나오는 마리오네트 인형에 가가까와 보인다. 이에 비해 『열자(列子)』의 광대는 그 몸에 대한 묘사가 훨씬 더 자세하고 정교하다. 먼저 몸을 안과 밖으로 구분하고, 안에는 ‘간, 쓸개, 염통, 허파, 지라, 밥통, 창자’ 등이 들었고, 밖에는 힘줄, 뼈, 관절, 피부, 털, 이빨, 머리털 등’ 있었다고 한다. 특히 흥미로운 부분은 안과 밖의 관계이다. 염통과 입, 간과 눈, 콩팥과 다리와의 관계, 장담은 이를 안의 오장, 그리고 밖의 일곱 구멍과 사지의 관계로 요약하고 있다. 사람의 몸에 대한 상당한 수준의 의학적인 지식이 포함되어 있다는 뜻이다. 안과 밖을 연결하는 혈맥이다.

불교문헌에 등장하는 기관목인의 비유는 전겸익이 주장하듯 분명 기관의 주인, 실체도 없고 근거도 없는 ‘나’란 존재와 깊은 연관이 있다. 무아(無我)라는 불교의 철칙이다. 『생경』의 기관목인 이야기는 색정과 애욕, 질투와 분노를 겨냥하고 있다. 쐐기를 뽑아내어 기관목인이 ‘죽어 무너지자’ 비로서 임금은 질투와 분노의 정체를 알아 차린다. 본래 주인이 없던 기관목인의 색정, 본래 없던 색정에 질투하고 분노하는 임금. 이야기의 최종의 목표는 기관목인의 몸과 욕망이 아니다. 문제는 임금의 욕망이요, 임금의 몸이다. 그 몸의 정체이다. 몸을 움직이는 주인의 정체이다.

이에 비해 장담이 언급하는 기관의 주인은 밖의 일곱 구멍과 사지를 움직이게 해주는 안의 내장기관이다. 염통은 입을 주재하고, 간은 눈을 주재하며, 콩팥은 다리를 주재한다는 사실이다. 겉으로 드러나는 입과 눈과 다리의 움직임은 실제로는 속의 염통과 간과 콩팥 등 내장기관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뜻이고, 내장기관의 작용이 몸을 움직이게 해 주는 원인이요, 주인이라는 뜻이다. 노중현은 이를 다시 생각과 정신으로 확대한다. 몸과 움직임을 주재하는 최후의 주인, 말하자면 인간의 영혼이다. 전겸익이 해석하듯 주인이 없다는 것을 말하자는 게 아니다. 거꾸로 주인이 없다면 움직임도 없다는 걸 강조하자는 것이다. 이처럼 기관의 주인, 표현은 같고, 몸의 정체를 다루지만 『생경』의 이야기와 『열자(列子)』의 이야기는 완전히 반대의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적어도 이 이야기, 그리고 이 이야기에 달린 장담의 주를 보면 그렇다. 장담은 기관의 주인보다는 기관 그 자체, 오장육부와 행동거지를 이어주는 혈맥, 기관의 발동과 작동, 그런 이치에 주목한다. 장담의 해석에 따르면 기관의 이야기는 의학이나 양생(養生)을 위한 우화가 된다.

동의보감의 신형장부도(身形藏府圖), 마치 언사가 목인을 제작하기 위해 그려 놓은 설계도처럼 보인다.

『능엄경』을 주석한 전겸익이 『생경』의 기관목인 이야기를 알고 있었는지 확인할 길은 없다. 하지만 그가 『열자(列子)』의 이야기를 인용한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나[아(我)]도 없고 나에 속한 것[아소(我所)]도 없다’는 주장, 불교에서는 흔해 빠진, 불교식으로 표현하자면 종(宗)으로 삼는, 우선순위가 가장 높은 가르침이다. 전겸익은 아마도 그런 가르침의 근거를 중국의 고전, 중국의 전통 안에서 발견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불교의 가르침에 좀 더 보편적인 증거들을 대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는 불교 전통의 기관목인 이야기들을 제쳐 놓고 『열자(列子)』의 기관목인을 선택했다. 그 이야기를 자세히 소개한 뒤에, 『능엄경』의 노래, 『대지도론』의 해석과 같다고 했다.

『열자(列子)』의 이야기는 『생경』의 이야기를 똑 닮았다. 앞뒤를 따져 보면 『생경』의 이야기를 표절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굳이 표절을 따질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든다. 이야기란 게 오며 가며 돌고 도는 것이기 때문이다. 2-3천 년을 두고 돌던 이야기, 그 때 그 때 정황을 추측할 수 있는 근거들이야 들어 볼 수도 있겠지만, 그 선후를 선명하게 밝혀줄 명백한 증거 따위는 어차피 존재하지 않는다. 장담은 자기 집안에 전승해 오던 『열자(列子)』의 조각, 단편들을 정리하여 책으로 엮었고, 여기에 몸소 주석을 달았다. 이로써 한나라 이후 오랜 동안 없어진 것으로 알려졌던 이 책이 부활하게 되었다고 한다. 중국의 학자들은 오래 전부터 고증을 통해 장담의 『열자(列子)』는 ‘출신도 분명하지 않고 내용도 어수선한 책’이라고 의심을 해 왔다. 그래서 장담 자신이 뿌리도 없이 흘러 다니던 이야기들을 모아 열자(列子)의 명성을 빌어 걸친 것이라는 의심도 있었다. 어쨌든 그 책의 내용이 어수선하다고 해서 일방적으로 베낀 것이라고 단정할 필요도 없다.

그 내용이 종종 불경(佛經)의 내용과 겹치기도 하지만, 큰 줄거리는 노장(老莊)과 같다. 문장이나 논증의 방식이 『장자(莊子)』와 비슷하다.


장담이 『열자(列子)』를 편집하고 주석을 달면서 썼던 서문의 한 구절이다. 불교의 가르침과 노장의 가르침, 장담이 이 두가지 가르침의 같은 점과 다른 점을 잘 알고 있었다는 뜻이겠다. 장담의 시대에 이미 두가지 가르침이 섞이고 있었다는 뜻이기도 하고, 당대의 지식인들이 그런 사실 또한 잘 알고 있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장담은 대뜸 기관(機關)이란 말로 주석을 시작한다. 이 말의 연원은 물론 불경이다. 장담 자신이 『생경』의 이야기를 이미 알고 있었다는 유력한 방증이다. 아무튼 그는 불교의 이야기를 중국의 이야기로 바꾸어 놓았다. 장담의 주석을 통해 무아(無我)의 이야기는 한의학과 양생의 에피소드로 바뀌었다. 시간이 흘러 명나라의 전겸익은 거꾸로 장담의 주석을 이용한다. 장담의 이야기를 다시 한번 불교의 이야기, 무아(無我)의 이야기로 뒤집었다는 뜻이다. 뒤집고 다시 뒤집고, 이야기는 그렇게 돌고 돈다.

노성자(老成子)가 윤문(尹文) 선생에게서 환(幻)을 공부했지만, 3년이 지나도록 가르쳐주지 않았다. 노성자는 허물을 반성하고 돌아가고자 했다. 윤문 선생은 예를 갖추고 방으로 들어가 좌우를 물리고는 말했다.


옛날 노담(老聃)이 서쪽으로 떠나려 할 적에 나를 돌아 보며 이르기를, 


태어남이 있는 기운과 꼴이 있는 모양은 모두가 환(幻)이다. 조화가 시작되고 음양이 변화하는 것을 생(生)이라고 하고, 사(死)라고 한다. 운수에 지극하고 변화에 통달하여 꼴에 따라 옮겨 가는 것을 화(化)라고 하고 환(幻)이라고 한다. 조물주는 그 기교는 교묘하고 그 공은 깊어 참으로 지극하기도 어렵고 통달하기도 어렵다. 꼴을 따르는 자는 그 기교는 드러나 보이고 그 공은 얕아, (조건에) 따라서 생겼다 따라서 사라진다. 환화(幻化)가 생사(生死)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비로서 함께 환(幻)을 배울 수 있다.’ 고 했습니다. 


저도 당신도 모두가 환(幻)입니다. 굳이 배울 게 있겠습니까?


노성자는 돌아와 윤문 선생의 말을 석달동안 깊이 생각하고, 마침내 존망(存亡)이 자재하고 네 계절을 뒤집을 수 있게 되어 겨울에 우레가 치고 여름에 얼음을 얼리며, 나는 것을 걷게 하고 걷는 것을 날게 하였다. 죽을 때까지 그런 술법을 드러내지 않아 세상에 전하지 않았다.


노자와 열자, 그리고 불교, 과연 닮기는 닮았다. 까마득한 옛날 이야기인 것 같지만, 그런 시절에도 사람은 살았고, 깊은 사색을 했고, 생각을 나누었다. 그렇게 얽히고 섥힌 이야기들, 따로 떼어 놓으면 뭔가 빠지는 부분이 생기게 마련이다. 닮았다는 말은 물론 똑같지는 않다는 뜻이기도 하다. 세월은 흘러 남은 것은 수수께끼 같은 자잘한 조각들뿐이지만, 견주고 맞춰 보는 것도 그래서 별미가 있다.

『생경』에는 「구생경(舅甥經)」이라는 이야기도 들어 있다. 비단을 짜서 나라에 납품하던 외삼촌과 생질이 우연히 왕실의 창고를 둘러 보고 욕심을 내어 함께 도둑질을 한다는 이야기. 신출귀몰의 생질 도둑과 꼭 잡고야 말겠다는 임금님의 집념이 부딪치다가 임금님의 딸까지 겁탈하게 되고, 끝내는 천하무쌍(天下無雙)의 총명함을 인정받아 공주와 제대로 혼인을 한다는 이야기. 몇 줄 되지도 않는 글이지만, 기발한 착상, 발랄한 구성, 유쾌한 결말…… 아무튼 재미있다. 요즘의 관점에서도 빠질 데 없는 소설 같은 이야기.

중국 근대소설의 백미로 알려진 『위성(圍城)』의 저자 전종서(錢鍾書 1910-1998)는 헤로도투스(484-425 B.C.)의 『역사』를 읽으며 이와 똑 닮은 줄거리의 이야기를 발견했다. 헤로도투스가 이집트의 성직자로부터 들었다는 이야기. 역사상 가장 부자였다는 파라오 람세스 3세의 비밀창고와 그 창고를 터는 도둑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는 나아가 이태리의 작가 마테오 반델로(1485-1561)의 소설에서도 똑 같은 이야기를 발견했다. 불교 경전과 헤로도투스의 『역사』, 그리고 셰익스피어 로미오와 줄리엣의 원조라는 마테오 반델로의 소설, 그 안에 담긴 똑 닮은 줄거리의 이야기. 전종서는 이를 소개하는 글에 ‘역사의 고사, 종교의 우화, 한편의 소설’이라는 제목을 달았다.

『생경』이라는 경전은 불교에서 ‘본생담(本生譚)’이라고 알려진 방대한 기록의 일부이다. '키 아롬'을 이룬 부처님은 이후 중생들을 위해 설법을 하면서 자신의 과거, 특히 전생의 이야기를 즐겨 했다. 전생에 여러 몸을 받아 태어나 했던 일, 수행, 그런 공덕으로 '키 아롬'을 얻을 수 있었다고 한다. 전생의 이야기가 주를 이루다 보니 업보에 따라 돌고 도는 윤회의 교훈을 담고 있다는 오해를 하기도 하지만, 전생이라는 배경은 이야기를 꺼내기 위한, ‘옛날 옛적 호랑이가 담배 피던 시절’, 또는 ‘왕년에 내가 군대에 있을 때’, 말하자면 이런 투의 장치, 일종의 말자루라고 보는 편이 옳을 것 같다. 이야기들이 대개는 윤회 자체를 겨냥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기존에 있던 종교와 철학의 근거를 모두 부정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기존의 근거를 부정하는 자리에서 이뤄지는 가르침, 그래서 불교의 가르침은 부처님의 아롬, 제 경험을 유일한 모델로 삼을 수 밖에 없다. 신도 아니고 초월적인 영웅도 아닌 인간 싯다르타, 그가 체험한 전에 없던 아롬, 인간이라는 똑 같은 조건에 놓인 사람들을 위한 가르침, 누구나 싯다르타를 모델로 삼아 똑 같은 수행을 쌓아 가다 보면 똑 같은 아롬으로 들어 갈 수 있다는 말이다. 저 이야기, 천하무쌍의 도둑 또한 부처님의 전생이었다. 방대한 본생 이야기는 그런 목적을 가지고 설해졌고, 그런 목적으로 기억되고 유통했다. 전종서가 종교의 우화라고 불렀던 『생경』 속의 이야기, 본생담의 이야기들은 그렇게 역사가 되기도 하고 소설이 되기도 했다.

조선말 『계압만록(溪鴨漫錄)』이라는 한문 설화집에도 이와 비슷한 ‘도둑사위’ 이야기가 담겨 있다. 우리나라에 팔만대장경이 남아 있었다곤 해도 예나 지금이나 「구생경(舅甥經)」 같은 생소한 경전을 보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것도 불교나 불교 책들이 문자 그대로 지리멸렬하던 조선 말기에 「구생경(舅甥經)」을 읽고 번안했다고 보기도 어렵다. 민간에도 비슷한 이야기들이 전하는 것을 보면, 오히려 훨씬 더 오래 전부터 전승되어 오던 이야기를 정리하여 기록한 것으로 보는 편이 옳을 것 같다. 아무튼 『계압만록(溪鴨漫錄)』의 이야기에서 도둑사위를 상대하는 사람은 임금이 아니라 이완대장이다. 부처님이 북인도 사위국 기수급고독원에서 했다는 전생 이야기가 이집트에서는 람세스 3세의 이야기로 조선에서는 이완대장의 이야기로 바뀐다.

이런 걸 보면 『생경』의 기관목인, 언사의 광대도 놀랄 일은 아니다. 길고 먼 세계, 그 사이를 떠 돌던 숱한 이야기들, 누가 알겠는가, 누가 짓고, 누가 비볐는지, 부질없고 속절없다. 기관목인은 누구이고, 빼고 이끄는 기관의 님자는 또 누구일까? 기관목인과 기관의 님자, 또 누구를 브트뇨?

02_기관의 발동 - 04_기관목인의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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