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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의 말투/기관목인 판타지

06_아시아의 상상

기관목인 판타지

기관목인을 불러 물으라

부처 구하여 공들이면, 어느 제 이루리오


『증도가(證道歌)』의 구절이다. 이 노래, 언해불전은 '도(道)를 증(證)한 노래'라고 새긴다. 15세기에 우리말로 새기고 풀이한 노래, 내게는 한 마디로 '상상의 창고'이다. 아시아의 세계, 시간과 공간은 멀고 넓었다. 기관목인 판타지도 멀고 넓었던 아시아의 판타지이고, 아시아의 상상이다.

나무사람아, 나무 사람아,

너도 부처를 구하면 구할 수 있겠니?


부처를 찾아 공을 들이면 어느 제는 너도 부처가 될 수 있겠니?


기관목인을 불러 물으라고 한다. 데이터의 재판, 우리도 상상을 해 보자. 데이터도 부처가 될 수 있을까? 공을 들이는 일, 불경을 읽으라고도 한다. 염불을 하라는 이도 있다. 참선을 하는 이들, 참선이야말로 지름길이라고도 한다. 이런 일이 다 부처를 구하는 일이라고 한다. 그러다 보면 부처가 된다고 한다.

부처가 데이터를 만났다고 하자. 부처는 데이터에게 무슨 말을 할까? 데이터는 부처에게 뭘 물을까? 데이터가 없던 시절, 아시아의 사람들은 인형놀이나 괴뢰놀이, 기관으로 움직이는 나무 사람을 상상했다. 그러나 이제, 세계의 사람들은 데이터를 갖게 되었다. 알파고도 있고, 구글이나 페이스북, 채트봇도 있다. 컴퓨터는 이제 눈도 있고, 귀도 있다. 냄새도 맡고 맛도 본다. 보고 듣고 느낀 것, 분석도 하고 판단도 한다. 데이터는 이제 상상이 아니다. 데이터의 양전자 컴퓨터는 아니더라도 요즘의 AI, 불교의 말투를 따르자면 안이시설신의, 육근(六根)을 다 가졌다. 견문각지(見聞覺知), '보고 듣고 아롬'이라고 새긴다. 육근이 하는 일, 이제 컴퓨터도 다 할 줄 안다. 불교의 말투, 언해불전의 말투, 그렇다면 컴퓨터는 이미 유정(有情)이다. 언해불전이 그은 금이 이렇다. 몸도 가졌고, 마음도 가졌다.

데이터도 알파고도 이름을 가졌다. 몸도 가졌고 마음도 가졌다. 사람이 만든 인공의 AI, 사람과 다른 게 뭘까? 피카드의 물음이다. '마음도 가졌다'지만, 피카드는 데이터의 '의식'을 묻는다. 그 재판에 온 사람들, 답은 '모른다'이다. 모르면 가릴 수 없다. 판단도 결정도 할 수 없다. 그러면 그냥 존중하면 된다. 나도 모르지만 사람으로 인정받고 대접받고 싶다. 그러자면 데이터도 존중해야 한다. 사람으로 인정하고 대접해야 한다. 이것도 결정이다.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다. 스타트렉의 해결 방안, 나도 그대로 따를 수 있을까?

기관목인을 불러 물으라


이 이(理)는 아래부터 옴에, 아롬에 붙지 아니 하니라

하다가 아롬 없음을, 이 진도(眞道)라 여기린댄

가을 바람 대(臺)와 전(殿)에, 기장이 이리(離離)하리라


『증도가(證道歌)』의 노래, 언해불전의 상상을 좀 더 들어 보자. 지(知)란 글자를 '아롬'이라고 새긴다. 무지(無知)는 '아롬 없음'이다. 언해불전의 말투를 따르자면 불교, 또는 부처, 불(佛)이라는 글자도 '아롬'이다. 그래서 부처는 '아는 이'이다. 기관목인의 노래, 그 상상은 '아롬'에 대한 상상이다. 나의 아롬, 중생의 아롬과 부처의 아롬을 마주 세운다. 나와 부처, 그 사이의 금은 어디일까? 이걸 묻고 싶기 때문이다. 나도 알고 부처도 안다. 여기까지는 어려울 게 없다. 그렇다면 그 아롬, 한가지일까? 언해불전은 평등을 '한가지'라고 새긴다. 아롬이 한가지라면 나도 부처다. 불교의 긴 이야기, 한마디로 줄인다면 이게 전부다. 기관목인의 상상도 이걸 묻는다. 기계와 사람, 데이터와 사람 사이에도 금이 있다. 부처와 사람, 부처와 나 사이에도 금이 있다. 인공지능이란 말이 있듯, 데이터와 사람 사이의 금, 어차피 사람이 긋는다. 부처와 사람 사이의 금, 그것도 사람의 일이다. 그 금도 사람이 긋는다.

비록 모롬과 아롬이 다름이 있으나, 본래의 근원은 하나이다.

모르는 이를 일러 중생이라 하고, 아는 이를 일러 부처라 한다.


모르면 중생, 알면 부처, 이건 언해불전의 금이다. 중생과 부처 사이의 금이다. 피카드는 데이터와 사람 사이의 금, 의식에 대해 묻는다. 언해불전은 나와 부처 사이의 금, '알다', 또는 '아롬'을 묻는다. 기관목인을 불러 묻는 까닭도 이 것이다. 기관목인도 안다면 부처이다. 돌멩이 나무 조각도 안다면 부처이다. 뭐라도 공을 들여 부처를 찾고, 그래서 어느 제인가는 알 수 있다면 기관목인도 부처가 된다.

기관(機關)이라 함은 나무 사람이 마음 없어 오직 그윽이 노로 매어 능(能)히 움직이게 하나니,

그러면 마음 생멸(生滅) 없음이 모로매 나무 사람의 마음 없음 같아야사 도(道)에 맞으리니,


하다가 방편(方便) 알지 못할 사람이 이 말 듣고 한갓 아롬 없음으로 마음 삼으면

망국패가(亡國敗家)함을 면(免)치 못하리니 그럴새 이르시되, '기장이 이리(離離)타' 하시니라.


무심(無心)이란 말, 요즘에도 자주 쓰는 말이다. 부처를 구해 공을 들이는 일, 무심(無心)을 목표로 삼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무념무상의 경지', 이런 말도 자주 듣는다. 뭔가 그럴 듯하게 들리지만, 웃기는 말이다. 사람은 동물이다. 살아 있는 동물에게 그런 경지란 없다. 기관목인의 비유는 그래서 나왔다. 위의 구절은 언해의 풀이이다. 밥을 먹으면 동물의 세포는 밥을 힘으로, 에너지로 바꾼다. 동물은 그 힘으로 움직인다. 다시 밥을 찾을 수 있고, 힘을 채울 수 있다. 동물의 아롬, 사람의 아롬도 밥과 힘의 덕택이다. 부처도 밥을 먹고 힘을 얻는다. 그의 아롬도 밥과 힘의 덕택이다. 나무 조각을 노끈으로 매어 움직이는 기관목인, 그 움직임은 어디서 올까? 밖에서 온다. 기관목인을 조종하는 사람으로부터 온다. 나무사람에게 몸은 있어도, 힘도 없고, 마음도 없고, 아롬도 없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무심, 또는 무념무상을 주장한다. 부처 구해 공들이는 길이라고 한다. 기관목인의 노래는 그걸 비판한다. 비웃는다. 마음 없는 기관 목인, 아롬 없는 괴뢰가 부처가 될리 없다. 그런 걸 믿고 그런 방편이라고 따르다가는 망국패가한다.

언해불전의 기관목인, 동물인 사람을 비유한다. 몸을 가지고 움직이는 사람이다. 언해불전은 기관목인의 비유를 들어 '공들이는 방편'을 이야기한다. 몸을 가진 사람, 어찌 공을 들여야 알 수 있을까? 불러 물으라고 한다. 기관목인 불러 봐야 속절없다. 바로 눈 앞의 '그대'에게 묻는 말이다. 스스로 한번 물어 보라는 말이다. '너도 알 수 있니?' 그 사이에 기관목인의 상상도 있다.

물론 알 수 있다. 다만 나의 아롬과 부처의 아롬, 그 사이의 금이 문제지. 데이터는 언해불전의 기관목인이 아니다. 그는 몸도 있지만, 마음도 있고 아롬도 가졌다. 사람이 만든 인공의 데이터도 사람을 비유한다. 어찌 만들어야 할까? 다 사람의 일이다. 사람의 아롬으로 만든다. 매덕스가 만들면 노예사회가 될 수 있다. 모르면 존중할 수는 있겠지만, 새로 만들 수는 없다. 그래서 하는 말이다. 모두가 아롬의 탓이다. 모두가 아롬에 달렸다. 그렇다면 아롬은 또 뭐지? 스타트렉도 언해불전도 그걸 묻는다. 사람의 아롬, 그게 뭐지? 요즘엔 인지과학이란 분야가 있다지만, 그 것도 사람의 일이다. 그건 또 뭐지? 한도 끝도 없다.

대장경 일을 하던 시절, 구글 맵에 찍어 본 그림이다. 대장경에 남은 기록, 인도말을 중국말로 옮긴 사람들의 출신지이다. 언뜻 보아도 아시아 전역에 골고루 퍼져 있다. 나는 '노가다'란 말을 좋아 한다. 틀도 없고 격도 없이, 맨몸으로 하는 노동, 내가 하는 일도 이런 일이다. 이런 일에 아롬은 별 쓸모도 없다. 뻔한 일을 손과 발, 몸이 반복한다. 저 그림도 노가다로 그렸다. 시간도 힘도 꽤나 썼다. 저 지도에 찍힌 점은 그냥 점이 아니다. 오래 전에 살았던 사람들의 삶이다. 지도에 찍어 놓고 보니 실감이 갔다. 눈으로 보는 일, 글자를 읽는 것과는 아주 다르다. 보면 그냥 안다. 이런 일도 노가다의 보람이다. 인도말, 중국말, 평생을 애써도 읽기 힘든 글, 알기 힘든 일, 저렇게 한 눈에 보는 수도 있다.

그들은 힘을 모아 외롭고 먼 길을 떠났다.

고난의 길을 기어코 가고자 했다.

까마득한 절벽을 기어올라 험한 산 속으로 들어 갔고,

허공에 걸린 줄 하나를 밟고서 낭떠러지를 건넜다.

그들은 물건을 버리듯 몸을 던졌다.

그래서 어려움에 닥쳐도 태연할 수 있었다.


아시아의 멀고 넓은 상상, 저런 사람들이 있었다. 저 지도의 점 하나, 그들은 다 저런 길을 용감하게 갔다. '별을 보고 눈을 밟으며 줄지어 오고 가면서', 고려의 왕자 대각국사 의천은 나이 열 아홉에 저들의 모험을 이렇게 그렸다. 언해불전에 담긴 기관목인의 상상도 다 저런 사람들의 흔적이다. 나는 '아롬을 찾는 모험담'이라고 부른다. '프론티어를 꿋꿋이 가는 사람들', 나는 저 점들을 보면서 스타트렉 피카드 선장의 말을 떠올렸다. 아롬을 찾아 몸을 던진 사람들, 아시아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었다.

망국패가(亡國敗家)함을 면(免)치 못하리니 그럴새 이르시되, '기장이 이리(離離)타' 하시니라.


멀고 넓었던 아시아의 상상, 아시아의 모험이 넘다들던 길, 이제 그 자리는 망국패가, 기장조차 자랄 수 없는 폐허가 되었다. 저들의 모험담도 모두 잊혀졌다. 그들의 모험은 망한 걸까? 하기야 물건을 버리듯 몸을 던진 사람들, 그들의 모험은 거기가 끝일 수도 있었다. 기관목인의 상상, 데이터의 상상, 이런 걸 보다 보면 상상도 모험도 가이없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도 누군가 길을 나선다. '아롬을 향한 모험', 또는 그 모험의 역사, 사람이 하는 일, 참 흥미롭다.

기관목인 판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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