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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의 말투/기관목인 판타지

04_기관목인의 믿얼굴

기관목인 판타지

어떤 환사(幻師)가 신심을 내어 주암산에 가서 스님들을 이바지했다.


공양을 마치자 시다라나무에 환술(幻術)을 부려 여인을 만들었는데 모습이 몹시 아름다웠다. 대중 앞에서 이 여인을 끌어 안고 입을 맞추며 함께 욕사(欲事)를 벌였다.


그러자 여러 스님들이 이 일을 보고는 화를 내며 이렇게 말했다.

부끄러움도 없는 놈이 더러운 짓을 하는구나. 이런 줄 알았다면 네 이바지를 받지 않았을 것이다.


환사는 나무라고 꾸짖는 소리를 듣고, 곧 칼로 여인을 베고 찔렀다. 사지를 도려내고 눈알을 뽑고 코를 잘라내고, 온갖 사나운 짓으로 여인을 죽였다.


욕사(欲事), 욕망의 일이다. 몸을 가진 남자와 몸을 가진 여자가 벌이는 욕망의 일, 어려울 게 없다. 요즘에는 '섹스'라는 말을 쓴다. 어렵지도 않은 일, 왜 한자나 영어를 쓸까? 이 이야기는 『대장엄론경(大莊嚴論經)』이란 책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2세기경 북인도에 살던 마명(馬鳴)이 지은 책이다. 열 다섯권이나 되는 긴 이야기책이다. 이 책을 한문으로 번역한 사람은 구마라집(344-413)이다. 이 사람은 서역의 사람이다. 타클라마칸 사막에 있던 구자국(龜玆國)이란 나라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인도와 서역을 오가며 불교를 배웠다. 나중에 장안으로 끌려가 숱한 불교책을 한문으로 번역했다. 이 사람들은 아시아 대륙을 누비던 초절정의 고수들이다. 이런 이들이 엮고 새긴 대륙의 이야기, 깨끗하게 남아 전한다는 게 신기하다. 대륙의 이야기들, 하여간 엄청 재미있다.

구마라집의 길


스님들이여,

제가 욕사를 벌이는 것을 보고 화를 내시고,

제가 욕망을 끊고 저 여인을 죽이는 것을 보고 다시 더 화를 내십니다.

그렇다면 저는 어떻게 여러 스님들을 받들어 모셔야 합니까?


제가 아까 한 짓은 바로 이 나무를 상대로 한 것입니다.

저 나무에 무슨 욕정이나 살해가 있겠습니까?


저는 스님들의 몸을 편안하게 해 드리기 위해 밥을 이바지했습니다.

저는 스님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드리기 위해 환술을 이바지했습니다.


나무 조각으로 여인을 만드는 사람, 그 사람을 환사(幻師)라고 부른다. 그 사람이 하는 일은 환술(幻術)이다. '일루져니스트(Illusionist)'란 영화가 있었다. 주인공 아이젠하임은 이른바 ‘오렌지 나무’로 알려진 일루젼을 나톤다. '오렌지 나무'는 프랑스의 일루져니스트, 로베르 우당(Robert Houdin 1805-1871)이 처음 만들었다고 한다. 따지고 보면 이건 마술도 아니고, 일루젼도 아니다. 이건 로베르 우당이 공들여 만든 기관일 뿐이다. 로베르 우당은 가업을 이어 시계를 만들던 시계공 출신이었다고 한다. 태엽으로 작동하는 시계, '오렌지 나무'와 같은 기관장치, 오토마톤(automaton)이라고 부른다. 오토마톤이나 오토마타(automata), 인터넷을 찾아 보면 숱한 그림이나 영상을 볼 수 있다. 로베르 우당의 오렌지 나무는 요즘으로 치자면 새로운 기술, 새로운 기계의 시연회를 닮았다. 일루져니스트, 은근한 조명 아래서 기관을 시동한다. 기관을 튕긴다. 손짓도 섞고, 말짓도 섞는다. 스티브 잡스가 하던 일도 비슷하다. 그도 그의 무대 위에서, 은근한 조명 아래서, 그의 아이폰을 튕긴다. 몸짓도 말짓도 섞는다. 테크놀로지와 일루젼을 적당히 버무린다. 로베르 우당은 그의 무대 위에서 오렌지 나무의 일루젼을 판다. 티켓을 팔아 큰 돈을 번다. 오렌지 나무는 감춰 둔다. 그런데 스티브 잡스는 파는 게 좀 다르다. 아예 아이폰을 판다. 이건 마치 오렌지 나무를 대량생산하여 팔아 먹는 것과도 같다. 하여간 떼돈을 번다.

바라건대 여러분, 제 말을 들어 주십시오.


부처님께서 경전에서 하신 ‘모든 법(法)은 환(幻)으로 지은 것과 같다’는 말씀을 어떻게 듣지도 못했단 말입니까? 저는 이제 그 말씀을 드러내 보이고자 이런 환술을 지었습니다.


환(幻)의 몸에는 목숨이 없습니다.

의식(意識)이라는 환사가 기관을 운전하여 눈으로 굽어보고 우러러 보고 돌아보고 둘러보게 하는 것 뿐입니다. 걸어서 나아가고 멈추게 하며, 말도 하고 웃게도 하는 것입니다.


이런 일을 미루어 이 몸이 참으로 무아(無我)임을 깊이 알아야 합니다.


로베르 우당은 일루젼을 팔았다. 스티브 잡스는 아이폰을 팔았다. 나무때기로 여인의 기관을 지어 무대에서 놀리는 환사, 그는 도대체 뭘 파는 걸까? 요즘엔 '사업 비밀'이란 말을 자주 듣는다. 그는 '사업 비밀'을 판다. 기관의 일루젼을 보기 위해 값을 치르는 사람들, 아이폰이라는 기관에 값을 치르는 사람들, 저 환사는 값을 치르는 사람들의 욕사, 욕망의 비밀을 까발린다. 그의 기관은 까발리기 위한 도구이다.

원효는 파계하고 총(聰)을 낳은 뒤로 속복으로 갈아 입고, 스스로 소성거사(小姓居士)라고 불렀다. 우연히 광대가 춤추며 희롱하던 큰 바가지를 얻었는데 그 모양이 아름답고 신기했다.


그 모양을 본떠 도구(道具)를 만들었다. 그리고 화엄경의 ‘모든 일에 걸림 없는 사람은, 한 길로 죽살이를 벗어난다’ 는 구절을 따 무애(無礙)라고 불렀다.


이를 가지고 온 마을을 다니면서 노래하고 춤추며 교화를 하고는 돌아 왔다. 『삼국유사』


무애(無㝵)

무애라는 놀이는 서역(西域)에서 온 것이다. 그 노래말에 불가(佛家)의 말이 많이 쓰인다. 또 우리말[방언(方言)]이 섞여 있어 받아 적기 어렵다. 임시로 곡조를 남겨 당시에 쓰던 음악으로 갖추어 둔다. 『고려사』


양주 회암사 법회에서 중 각원(覺圓), 신주(信珠), 신현(信賢) 등이 무애희(無㝵戲)를 벌이자, 부녀자들이 시주라 하여 옷을 벗어 주었다. 『세종실록』


무동이 들어와 무애무(無㝵舞)를 추었다. 『승정원일기』


원효가 희한하게 생긴 바가지를 본 떠 만들었다는 무애라는 도구. 춤추고 노래를 했다니 악기의 종류일 수도 있다. 희한하게 생겼다고 하니 뭔가 놀이를 위한 장치일 수도 있다. 어쨌든 인도와 서역을 거쳐 들어 온 놀이였던 것 만큼은 틀림이 없다. 이 것도 환사의 환술, 기관의 놀이였다. 이런 놀이의 자취가 고려를 거쳐 조선의 고종 황제 즉위 40주년을 기념하는 잔치에까지 이어졌다고 한다.

붕(棚) 끝에 곡도 놀욤을 보라

빼며 이끔이 전혀 속의 사람을 빌었네


환(幻)은 곡도이라

오직 혹(惑)이 본(本)이 업슨달 살피면, 허공(虛空)앳 꽃 같은 삼계(三界)가, 바람에 내 걷힘 같으며, 환화(幻化)같은 육진(六塵)이 더운 물에 얼음 녹음 같으리니


무애를 놀리며 춤추고 노래하는 원효, 그가 팔려던 것을 뭘까? 아무튼 원효의 짓, 언해불전은 '곡도 놀욤'이라고 부른다. 곡도는 괴뢰이기도 하고, 기관이기도 하고, 환(幻)이기도 하다. 본래는 다 같은 말이다. 남사당의 놀이를 이끄는 사람을 '꼭두쇠'라고 부른다. 꼭두는 꼭데기라고 한다. 우두머리라는 뜻이란다. 나는 언제나 곡도를 떠올린다. 그래서 '곡도쇠'라고 부른다. 나무때기로 여인을 지어 놀리는 환사, 그를 곡도쇠라고 부른다. 환사는 곡도쇠이고 환술은 곡도 놀욤, 곡도 놀이이다. 일루젼의 주인공, 아이젠하임도 곡도쇠라 부른다. 로베르 우당도, 스티브 잡스도, 원효도 다 곡도쇠라고 부른다. 그들은 다 곡도를 만든다. 제 무대를 제가 짓고, 제 곡도를 놀린다. 사람들의 욕망을 부추겨 곡도를 판다. 때로는 아주 큰 돈을 벌기도 한다. 부처를 '대환사'라고 부르기도 한다. 곡도쇠 중에서도 아주 큰 곡도쇠, 곡도쇠의 왕이다. 부처는 뭘 팔까? 하여간 부처의 곡도를 팔아 큰 돈을 버는 작은 곡도쇠들도 꽤 있다. 아주 오래된 놀이들이다.

곡도의 거짓이 세계를 속여

저 같은 곡도의 그물 가운데

갖가지 빛과 모양 지어내나니

다시 곡도쇠는 놀란 스님들 앞에서 긴 노래를 부른다. 환(幻)의 본질, 곡도의 믿얼굴을 노래한다. 우리가 사는 세계를 곡도의 그물이라고도 부른다. 이 세계에는 곡도쇠도 참 많다. 놀이를 벌이고 뭔가를 판다. 놀이에는 다 값이 있다. 뭘 파는 걸까? 우리는 무슨 값을 치르고 사는 걸까? 영화 일루져니스트, '쇼는 쇼일 뿐, 즐기라'고 한다. 맞는 말이다. 곡도쇠의 비밀을 알고 나면 재미도, 즐거움도 날아 간다. 쇼를 보러 가서도 끝도 없이 토를 다는 사람들도 있다. 이 것도 짜증난다. 제 사업의 제 비밀을 스스로 까발리는 곡도쇠, 거기서 살혬을 찾으라고 한다. 어쨌든 알고 나면 김 샌다.

03_기관목인, 누구를 브트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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