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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인천강, 평등과 자유의 열쇠/자유

3.4 줄 끊으니 나는 자유

인형사라는 건, 그 정체불명의 해커……?

범죄를 위해 수많은 사람들의 고스트를 해킹하였기 때문에 붙은 코드명이 ‘인형사’.

 

만화영화 공각기동대, 내가 이 만화를 좋아하는 까닭은 이 만화가 바로 ‘곡도 놀이’를 제대로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곡도놀이가 우리에게도 아주 익숙했던 놀이였고, 상상이었기 때문이다. 주제가부터 ‘괴뢰의 노래’이다. 환인과 환사, 공각기동대에서는 인형과 인형사라고 부른다. 마리오네트, 서양의 인형놀이다. 줄에 매달린 인형, 이 영화도 마리오네트의 이미지를 상징으로 내세운다. 수퍼테크놀로지, 인형의 줄은 유선과 무선으로 연결된다. 접속의 현실을 상징한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이고 미래란다. 사이보그가 되어 가는 사람의 미래, 그리고 그 속에 숨어, 빼고 이끌고, 잡고 놓고, 죽이고 살리는 ‘속의 사람’. 미스 하라웨이의 말을 빌자면 이게 우리의 ‘존재론’이다. 그렇다면 대통령의 얼굴대가리 걱정할 때가 아니다. 내 대가리, 내 얼굴, 당장 내 몸의 살혬이 여기에 걸렸다.

생사거래(生死去來)

붕두괴뢰(棚頭傀儡)

일선단시(一線斷時)

낙락뇌뢰(落落磊磊)

 

나고 죽고 가고 오고

붕(棚) 끝의 괴뢰

외줄 끊어질 때

헌칠하고 씩씩하고

 

공각기동대의 속편에는 이 노래가 거듭 등장한다. 이 노래는 조선의 함허와 비슷한 시대를 살았던 일본의 배우 제아미(世阿彌 1363-1443)의 노래라고 한다. 이 영화의 감독은 이 노래를 들어 제 영화를 풀이한다. 낙락장송이란 말이 있다. ‘헌칠한 소나무’란 말이다. 키도 크지만 쭈욱 빠졌다. 보기도 시원하다. 당당하고 씩씩하다. 줄이 끊어진 모습이다. 놀고 놀리는, 잡고 잡히는 인형사와 인형에게 주는 감독의 답이다.

각하선단아자유(脚下線斷我自由)

담박에 줄 끊으니, 나는 자유

 

이 노래는 12세기 중국 송나라 스님의 노래이다. 그도 곡도의 노래를 부른다. 빈대가리의 노래처럼 이 노래에도 계보가 있다. 공각기동대의 '붕두괴뢰(棚頭傀儡)'와 언해불전의 ‘덕 끝의 곡도’는 똑 같은 말, 똑 같은 노래다. 임제의 노래를 따라 부른다. 제 느낌, 제 깜냥으로 제멋대로 부른다. 언해불전의 함허도 제 노래를 이어 부른다. 일본의 제아미도 제 노래를 이어 부른다. 공각기동대의 감독도 제 노래를 이어 부른다. 이런 노래를 듣자면 재즈의 즉흥연주가 떠오른다. 즉흥연주에도 계보가 있다. 같은 가락도 제 흥, 제 멋대로 불어 젖힌다. 계보가 길다면 그만큼 명곡이다. 괴뢰의 노래, 곡도의 노래, 이 노래도 계보가 무척 길다. 그만큼 명곡이고, 유행가였다.

외외당당(巍巍堂堂)

뇌뢰낙락(磊磊落落)

요처자두(鬧處刺頭)

온처하각(穩處下脚)

 

높고 크고 당당하고

씩씩하고 헌칠하고

시끄러운 자리 머리를 싸매고

편안한 자리 발을 내려라

 

공각기동대 이노센스의 붕두괴뢰, 인터넷을 찾아 보면 정말 많은 말이 나온다. 온갖 말로 번역이 되어 있다. 그런데 낙락뢰뢰(落落磊磊), 이 구절에 대하여는 의론이 분분하다. 공각기동대의 노래도 그냥 나온 게 아니다. 다 밑이 있고 뿌리가 있다. 위의 노래는 천동굉지(天童宏智 1091-1157)의 노래이다. 각하선단아자유(脚下線斷我自由)도 이 스님의 노래이다. 선불교에는 다섯 종파가 있다고 한다. '붕두괴뢰'를 처음 노래한 이는 당나라의 임제 스님이다. 임제종의 조사이다. 이에 비해 뇌뢰낙락(磊磊落落)을 부른 천동굉지는 조동종의 조사이다. 임제종과 조동종은 선불교를 대표하는 두 기둥이다. 두 종파의 큰스님들이 시대를 넘어 노래를 주고 받는다. 낙락뢰뢰(落落磊磊), 또는 뇌뢰낙락(磊磊落落)에도 사연이 있다. 임제의 스승 황벽(黃蘗 751-850)은 외당(巍堂)과 뇌락(磊落)을 ‘대장부의 모습’이라고 했다. 늠름하고 씩씩한 대장부의 기상이다. 저 노래는 자유를 노래한다. 내 몸을 옭아 매던 줄과 끈을 담박에 끊어 버린, 제쥬변의 씩씩함이고 헌칠함이다.

무명강상초(無名江上草)

수의령두운(隨意嶺頭雲)

 

이름 없나닌, 가람 위의 풀이오

제 뜻을 좇나닌, 뫼 끝의 구름이로다

 

이건 『두시언해』의 구절이다. 중국 당나라 두보(杜甫 712-770)의 노래를 번역하고 주석했다. 우리 옛말의 뿌리만을 따르자면 이 책도 15세기 언해불전의 계보이다. ‘제 뜻을 좇아’, 수의(隨意)를 이렇게 새겼다. ‘뜻대로’, ‘뜻조차’, ‘뜻다히’, ‘뜻가장’ 다 비슷한 말이지만 느낌은 조금씩 다르다. 뫼 끝의 구름에서 '뜻대로', 또는 '멋대로'를 본다. 자유를 느낀다. 이건 두보의 느낌이고, 두보의 노래이다. 어디 옛 노래 뿐이겠나? 노래란 게 제 맛, 제 멋에 겨워야 한다. 제 느낌이 없다면 남의 노래, 남의 멋, 무슨 맛이 있을까?

깨끗함이 맑은 허공에 조그만 흐린 것도 없는 것과 같도다

 

이 것은 조선 함허의 노래이다. 『증도가남명계송』, 이것도 세종이 두 아들과 함께 국어로 번역했다는 언해불전이다. 함허는 『증도가남명계송』의 구절을 따다가 이어 부른다. 씩씩하고 헌칠한 모습을 맑은 허공에 비긴다. 붕두괴뢰, 공각기동대의 상상은 어둡다. 하지만 당나라 임제와 송나라 천동, 이들의 상상은 훤하다. 조선의 함허는 깨끗하고 맑다고 한다. 일본 제아미의 노래도 원래는 그랬을 것이다. 송나라의 스님은 자유(自由)라고 했다. 언해불전은 제쥬변이라고 한다. 어두운 까닭은 오늘 우리가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밝은 까닭은 우리 모두가 줄을 끊고 자유로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본래 자유로운데, 자유롭지 못한 현실, 바라보는 눈이 다르다. 누군가 내 대가리를 조종하던 끈, 끈이 끊어지면 자유다. 씩씩한 제 모습을 되찾는다. 함허는 깨끗하고 맑은 쪽을 보자고 한다. 그 쪽으로 함께 가자고 한다. 미스 리버티, 자유의 여신상도 끊어진 쇠사슬을 밟고 섰다. 미스 리버티는 사슬을 끊는 존재이다. 그래서 그이도 헌칠하고 씩씩하다. 끈이나 사슬, 끊어야 한다. 끊을 수 있다. 거기에 살혬이 달렸다. 자유롭지 못한 세계, 이런 것도 보기에 달렸다. 어두울 수도 있고, 환할 수도 있다.

뜻대로 불어제치는 재즈, 그런 자리에서도 자유를 느낀다. 말을 다루건, 목소리를 다루건, 색소폰을 다루건, ‘자유자재’라고 감탄한다. 색소폰을 다루는 능력, 재주도 자유롭다. 색소폰에 담긴 소리도 느낌도 자유롭다. 뫼 끝의 구름, 바람따라 흘러가는 구름에 무슨 제 뜻이 있을까? 그래도 사람들은 구름에서조차 자유를 꿈꾸었다. 헌칠하고 씩씩하다. 그래서 부럽다.

우리 모두가 자유로워질 때까지, 우리들 누구도 자유롭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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