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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인천강, 평등과 자유의 열쇠/말의 얼굴

1.7 말대가리

가히는 사람이 흙무적으로 치거든 흙무적을 므너흘고

사자는 사람이 흙무적으로 치거든 흙무적을 버리고 사람을 너흐나니


무적은 무더기의 옛말이라지만 뜻은 좀 다르다. 눈싸움을 할 때면 눈을 뭉쳐 동그랗게 눈덩이를 만든다. 그런 게 눈무적이다. 눈싸움도 싸움이라면 눈무적은 무기이다. 흙무적도 마찬가지. 개를 흙무적으로 때리면 개는 흙무적을 향해 달려든다. 그런데 사자는 흙무적은 제쳐 두고 때리는 사람에게 달려든다. 므너흘다, 너흘다, 물어 뜯는다는 옛말이다. 때리는 사람을 이빨로 물고 찢어 발긴다.

꽤나 널리 알려진 말이다. 사자라는 짐승이 서쪽에서 왔듯, 이 말도 서쪽으로부터 왔다.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키는데, 달은 보지 않고 손가락만 본다는 말도 있다. 비슷한 말 같지만 느낌이 확 다르다. 달이야 보지 않아도 그만이다. 손가락을 본들 핀잔이나 들을까 뭐 크게 달라질 것도 없다. 그런데 사자의 비유, 물고 뜯고 찢어 발긴다. 끔직하다. 목숨도 걸렸다. 개는 바보를 비유한다. 날아오는 흙무적만 볼 줄 알지 때리는 사람은 보려고도 하지 않는다. 따져 볼 겨를도 없이 무작정 달려 든다. 사자는 영리한, 날랜 이를 비유한다. 누가 무엇으로 때리는지 다 보고 다 안다. 달려 들어야 할 때, 달려 들어야 할 곳을 향해 달려든다.

시혹 사람이 믿지 않을진대 뜻가장 물어라

의구(意句)가 섞여 달려 천만 얼굴이로다

의구는 힐란할 제의, 가진 뜻과 묻는 언구(言句)이라


장미대선에 토론회가 열렸다. 다섯 명의 후보가 서로 묻고 대답한다. 마음이 급하다. 급한 사람이 섞이다 보니 때로는 난장판이 된다. 상상을 해 보자. 저들이 눈싸움, 아니 흙싸움을 한다고 치자. 그들의 무기는 흙무적이다. 상대를 향해 이리 저리 흙무적을 던져 댄다. 차마 못 볼 장면이겠다. 하지만 저들은 말로 싸운다. 힐란(詰亂)은 말싸움이다. 말싸움에선 말이 무기다. 말무적을 던져댄다. 흙무적의 뜻도 실은 말무적에 있다. 말무적에 달려 들어 말무적만 므너흐는 이들이 많기 때문이다.

말싸움, 말무적을 던져 댄다. 말무적에도 얼굴대가리가 있다. 언해불전은 말무적을 의구(意句)로 나누어 부른다. 의구는 의(意)와 구(句)의 대구이다. 가진 뜻과 묻는 말이다. 흙무적이건 말무적이건, 개가 됐건 사자가 됐건 무적으로 치려면 가늠을 하고 겨냥을 해야 한다. 의(意)가 바로 가늠이고 겨냥이다. 던지고 때리는 이의 목표이고 의도이다. 사슴을 본 하이에나는 침을 질질 흘린다. 너는 내 밥이야. 이런 것도 하이에나의 ‘가진 뜻’이다. 뜻을 이루려면 속임수도 쓴다. 겨냥하는 뜻을 감추려고 한다.

문자는 도를 나토는 그릇이며, 사람을 인도하는 법이다. 모름지기 문(文)과 의(義)기 서로 도와 혈맥이 사뭇 꿰어 정심(精審)하며 상밀(詳密)함이 갖추어, 떨어지고, 불리며, 뒤집히고, 외욤이 잠깐도 그 사이에 섞이지 아니한 뒤에야 능히 사람으로 알게 하여 만세의 귀감이 되리라.

그렇지 않으면 능히 사람의 눈을 열지 못할 따름 아니라, 도리어 사람을 혹하는 그릇이 되리라.


교정(校正)이란 말이 있다. 요즘의 사전은 ‘오자, 오식, 배열, 색 따위를 바르게 고침’이라고 풀이한다. 고려대장경을 교정대장경이라고 부른다. 고려는 교정의 나라였다. 저 구절은 고려로부터 이어온 오래 된 교정의 전통이고 기술이다. 문자는 그릇이다. 구(具)를 그릇이라고 새겼다. 요즘엔 도구나 기구란 말을 쓴다. 그릇은 대가리이다. 뭔가를 담는다. 문(文)에 의(義)가 담긴다. 글과 뜻이다. 담는 것과 담기는 것, 이것도 대가리와 얼굴의 대구이다. 교정은 대가리와 얼굴의 관계를 다루는 기술이다. 글과 뜻의 관계를 혈맥에 비유한다. 글의 맥락이고 뜻의 맥락이다. 글과 뜻이 사무치게 꿰는 일이 교정이다. 탈(脫), 연(衍), 도(倒), 오(誤), 이 네 글자는 교정의 기술을 다루는 이를테면 전문용어이다. 이런 글자까지 우리말로 새겨 읽었다. 탈(脫)은 뭔가가 떨어져 나간 것이다. 이에 비해 연(衍)은 뭔가가 끼어들어 불어난 것이다. 도(倒)는 뭔가가 뒤집힌 것이다. 오(誤)는 뭔가가 외고, 그릇된 것이다. 당시의 교정은 오자나 오식이 아니었다. 글의 혈맥과 뜻의 혈맥을 함께 자세히 살핀다. 요즘이야 논리나 논술이 있다. 말대가리의 기술, 그것도 맏높은 기술자의 몫, 학문과 교육의 당당한 분야였다.

문자의 혹함이 되지 아니하고, 능히 성인의 뜻을 바로 아는 이를 찾기 어렵다


성인의 뜻, 이 뜻은 의(意)이다. 의의(意義)란 말도 대구이다. 그런데 의(意)와 의(義), 둘 다 뜻이라고 새긴다. 말그릇에 담긴 뜻, 의미의 맥락이 있고, 의도의 맥락이 있다. 의도는 겨냥이고 가늠이다. 무적을 던지는 목표이고 목적이다. 가히는 흙무적을 므너흔다. 사자는 던진 사람을 므너흔다. 이것이 가히와 사자의 차이이고, 의(義)와 의(意)의 차이이다. 가히는 말무적에 담긴 의(義)를 므너흘지만, 사자는 말무적에 담긴 의(意), 겨냥과 가늠을 므너흔다.

힐란, 말싸움을 하려면 말무적의 얼굴대가리를 잘 헤아려야 한다. 그런데 싸움의 목적, 말무적에 있지 않다. 싸움의 목적은 때리는 것이다. 물어 뜯는 것이다. 당연히 때리는 이의 가늠과 겨냥이 알맹이다. 말하자면 가늠과 겨냥이 말무적의 믿얼굴이다. 후보 다섯의 말싸움, 말무적이 섞여 달린다. 말무적이 뒤섞이니 누가 누구를 왜 때리는지 가늠하기도 어렵다. 천만의 말무적, 천만의 얼굴이 섞여 달린다.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 이런 책이 있었다. 싸움판에 꽃이 날아 온다면 어떨까? 아이스크림이나 초콜렛이 날아 온다면 어떨까? 눈무적이나 흙무적과는 상황이 다르겠다. 총알이나 미사일, 핵폭탄이라면 또 어떨까? 싸움판에서야 말로 대가리와 얼굴이 중요하다. 뭐가 날아 오는지 알아야 한다. 그래야 피할 길, 살혬을 찾을 수 있다. 가늠과 겨냥, 누가 때리는지 어딜 왜 때리는지도 알아야 한다. 천만의 얼굴이 섞여 달린다면 더 급하다. 천만의 얼굴, 일일이 따져 볼 겨를이 없다. 이럴 때는 그냥 가늠과 겨냥에서 살혬을 찾아야 한다. 나를 겨냥하는 이를 찾아 달려가야 한다. 물어 뜯어야 한다. 원인을 아예 없애 버려야 한다.

“뜻가장 물어라”, 나는 이 말이 참 좋다. 이젠 잊혀진 어감, 원문은 임정징(任情徵)이다. 수필(隨筆)이란 말이 있다. “붓 가는 대로”라는 뜻이다. 임정(任情), 요즘 말로 바꿔 보자면 “뜻 가는 대로”이다. 징(徵)은 물음이다.

가장: 부사

여럿 가운데 어느 것보다 정도가 높거나 세게


요즘 가장이란 말은 부사로 쓰인다. 15세기에 이 말은 가장하다, 동사로도 쓰였다. “끝까지 다하다”라는 의미였다. 뜻가장에서 가장은 조사이다. 여기서의 ‘뜻’은 의(意)이다. 겨냥이나 가늠이다. 속셈이다. 내게 무적을 던져 대는 이의 뜻도 있고, 거기에 맞서는 나의 뜻도 있다. ‘뜻 가는 대로’ 라는 어감과 ‘끝까지’, ‘남김없이’라는 어감이 함께 담겼다. 한문에서는 느끼기 힘든 우리말의 어감이다. 뜻이 있다면 머뭇거리지 말고, 체면 차릴 것도 없이 가장, 생각나는대로 끝까지 캐물어야 한다. 이런 게 맞는 이의 살혬이다. 개처럼 맞지 말고 사자처럼 살고 싶다면 뜻가장 므너흘어야 한다. 물고 뜯어야 한다.

말무적의 의구(意句)를 묻는 까닭은 말무적으로 속이려 드는 모진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말깨나 글깨나 하는 이들은 알게 모르게 사람을 속인다. 때리려는 속셈이 들었다. 얼굴대가리나 의구(意句)의 대구는 말무적으로 사람을 속이는 기술이다. 때리는 기술이다. 마찬가지로 이 대구는 말무적에 속지 않는 기술이다. 피하고 므너흐는 기술이다. 말싸움에 말무적도 므너흘지만, 무엇보다 던지는 자를 므너흘어야 한다. 뜻가장 므너흘어야 한다. 그게 싸움의 기술이다. 논리이고 논술이고, 교정의 기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