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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인천강, 평등과 자유의 열쇠/자유

3.10 한 글자의 자유


언어도단(言語道斷)

말 할 길이 끊어졌다는 뜻으로, 어이가 없어서 말하려 해도 말할 수 없음을 이르는 말, ‘말이 안됨’으로 순화


국어사전의 풀이는 이렇다. 언어도단은 ‘말이 안됨’이다. 요즘에는 다들 이런 뜻으로 쓴다. 말이란 게 고약하다지만, 재미도 있다. 놀기도 좋고, 놀이기도 좋다. ‘언어도단, 심행처멸’, 심심한 김에 구글 번역기를 돌려 보았다. 구글 번역기도 AI이다. 역시 말을 다룬다. 그것도 세계의 말이다. 그런대로 쓸만하다. 놀기도 좋다.

중국어: 言語道斷, 心行處滅

영어: Verbal passage, Heart line off

일본어: 구두(口頭) 로드 오프(고또 로도 오흐), 오프 하트 라인(오흐하또라인)

우리말: 구두 길에서, 심장 라인 오프에서


번역이야 맘대로 선택할 수 있다지만, 구글 AI는 역시 영어가 중심이다. 이 결과로 번역의 수순을 짐작해보면, 역시 영어와 일본어가 앞쪽에 있다. 한자로 넣으면 중국어로는 번역도 하지 않는다. 일본어 번역은 진짜 웃긴다. 언어를 고또(口頭)라고 새긴다. 그래도 여긴 한자라도 있다. 우리말 번역은 그냥 ‘구두 길에서’이다. 단(斷)이란 글자는 그냥 무시한다. 영어 번역이 그렇다. 일본말 번역은 구두를 빼놓고는 다 영어다. 로도(road)도 오흐(off)고, 하또라인(heart line)도 오흐다. 웃기긴 해도 그나마 말은 된다. 우리말 번역은 맨 끝이다. 구글 AI의 말투, 웃다 보면 이것도 속이 편해진다. 하여간 구글 번역기, 빠르게 발전한다. 한 달쯤 지나면 바뀔까? 그것도 궁금하다. 심심할 틈이 없다.

노릇의 말씀, 흰소리는 접어두고,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 이게 마냥 웃어 넘길 일은 아니다. 구글 AI의 번역, 구두(口頭)에서 시작해 보자. ‘입끝’이란 말이다. 혀끝에 놀아나다, 이런 말도 있다. 이건 설두(舌頭)이다. 둘 다 언어, 말씀을 가리킨다.

구두선(口頭禪)

실행이 따르지 않는 실속이 없는 말.


구두, 입끝, 우리말에도 그리 낯선 말은 아니다. 다만 이 말에 담긴 의미와 의도가 바뀌었을 뿐이다. 말이란 게 도대체 뭘까? 말의 믿얼굴에 대한 물음이다. 입끝, 혀끝, 이런 말에 말의 믿얼굴이 담겼다. 구글 AI도 이런 걸 다 배워야 한다. 그래야 웃기는 번역을 피할 수 있다. 그게 가능할까? 답은 뻔하다. 가능할 수가 없다. 구글 AI도 어차피 말을 배워야 한다. AI가 무슨 수로 사람의 말을 배울까? 시작은 어차피 사전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언어도단, 이런 말을 어디서 어떻게 배우겠는가? 챗봇과 사람이 이야기를 나눈들, 말이 안되는 말, 실속이 없는 말, 이런 뜻을 벗어날 수 없다. 그런데 언어도단 심행처멸, 그런 말이 아니다. 사람도 모르는 말, AI가 알까? 아직은 모른다. 언젠간 알겠지, ‘싱귤래리티(Singularity)’ 거기가 AI의 특이점이겠다.

말씀의 길이 긋고, 마음 녈 곳이 없을새


이것도 말의 믿얼굴이다. 두 가지를 나누어 이야기한다. 하나는 말씀의 길이고, 다른 하나는 마음 녈 곳이다. ‘내 마음 갈 곳을 잃어’, 이런 노래도 있다지만, 실은 이런 게 말을 하는 까닭이다. 말을 나누는 까닭이다. 길은 소통의 길이다. 혼자 살혬이 없다면, 누군가, 어딘가 기대야 한다. 그래서 소통을 한다. 마음을 열고 길을 연다. 내 마음이 녀는 곳을 소리에 담는다. 말에 담는다. 그리고 입을 벌려 소리를 만들고, 말을 뱉는다. 이건 말을 하는 사람의 자리이다. 소리의 드틀이 내 귀를 찌른다. 내 귀에 어린다. 그리고 그 그리메를 따라 내 마음이 년다. 이건 말을 듣는 사람의 자리이다.

내게 공 하나를 다오, 그러면 난 네게 모자를 줄께.


말은 대화가 된다. 둘이 주고 받는 말, 이게 가장 작은 말의 단위이다. 말은 길이고 줄이다. 실제 이어지고 통하는 것은 생각과 생각이다. 마음과 마음이다. 물론 말이 통해야 마음도 통할 수 있다. 말이 통해야 두 마음이 나란히 녈 수 있다. 말을 주고 받는 까닭은 나란히 가고 싶기 때문이다.

당신 어머니 이름을 기억할 수 있어요? 어떻게 생겼어요? 어디서 태어났는지는 아세요? 행복했던 어릴적의 추억은 없나요? 자기가 누군지는 알아요?

고스트를 해킹당한 사람들은 참 슬퍼. 창피한 일이지. 게다가 이 불쌍한 놈은 정말 고약하게 해킹당했다니까.


만화영화 공각기동대의 장면이다. 신분제 사회로 가야 한다던 공무원, 나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월인천강을 떠올렸다. 그리고는 바로 저 불쌍한 놈의 낯빛을 떠올렸다. 저이도 정말 고약하게 해킹당했구나. 도적을 맞았구나. 이런 거야 뭐 나 한 사람의 꾀이겠다. 아무튼 공각기동대의 인형사, 그는 해커(hacker)이다. 그는 컴퓨터 네트워크도 해킹하지만, 멀쩡한 사람의 두뇌도 해킹한다. ‘고스트-해킹’이라고 부른다. 기억을 지우기도 하고 만들어 넣기도 한다. 사랑스런 처와 천사 같은 딸도 넣어 준다. 그리곤 고위 공무원을 해킹하도록 한다. 곡도가 곡도를 해킹한다. 인형사는 그렇게 사람을 조종한다. 잡고 놓는다. 네트워크와 세계를 괴뢰로 만든다. 곡도로 화(化)한다. 인형사는 해커의 코드네임이다. 이름이다. 그의 이름이 그의 얼굴이 된다. 그도 세계도 이미 다 안다. 그가 바로 도적이다. 도적의 중매, 도적의 꾀이다.

해커는 쪼개고 부순다. 전전(翦翦)이란 말이 다시 떠오른다. 바사차다, 잘게 부수는 자이고, 차갑고 냉정한 자이다. 그가 쪼개고 부수는 것도 말이다. 그가 바사차는 것은 컴퓨터 프로그램이다. 프로그램을 적는 컴퓨터 언어, 컴퓨터 스크립트이다. 해커도 줄을 타고 들어간다. 유선도 있지만, 무선도 있다. 접속하고 연결하는 줄이다. 마리오네트, 줄을 가지고 노는 자, 놀리는 자, 그는 그래서 인형사이다. 줄을 타고 들어간다지만 그가 놀리는 것은 접속의 줄이 아니다. 그가 놀리는 것은 말의 줄이다. 그가 들어가는 세계가 바로 말씀이 읏듬인 세계이기 때문이다. 고스트를 해킹하는 인형사, 고스트가 다시 고스트를 해킹하도록 만든다. 서로가 서로를 해킹한다. 이런 건 그냥 만화일까? 그냥 상상일까?

의식의 바람이 북을 쳐, 간대로 말을 내어, 속여 친한 벗이 되나, 실은 원수이며 새옴이라. 도덕(德)을 그르쳐 도(道)를 막아 허물이 지극히 무겁다. 멀리 여의되 원수의 도적 피하듯 함이 마땅하다.


내 이제 그 근원을 뽑아 내고자 한다면 저 구업(口業)의 입술과 혀와 엄과 이와 목과 배꼽이 의식의 바람이 북을 쳐 소리가 그 중에서 남을 보나니

,

마음이 인연에 붙기 때문에 허(虛)와 실(實)의 두가지로 달라진다. 실하면 이익하고 허하면 손감(損減)하니, 실은 선(善)이 나는 근(根)이오, 허는 악(惡)이 나는 본(本)이다. 선악의 근본이 입으로 말하는 데에 붙는다. 


구업(口業)은 입으로 짓는 짓이다. 입이 하는 일, 물론 말이다. 입시울 소리, 혓소리, 엄소리, 닛소리, 목소리, 훈민정음의 소리도 똑 같다. 배꼽의 힘으로 숨을 불어 목청을 울린다. 이 일의 뒤에는 의근(意根)이 있다. 의식의 뿌리가 이 일을 이끈다. 그래서 이 일을 '의식의 바람이 북을 치다'라고 부른다. 여기서는 망(妄)을 ‘간대로’라고 새긴다. 멋대로, 가는대로 거짓말을 지어낸다. 새옴은 시새움의 옛말이다. 속이 텅 빈 말, 속절없고 부질 없는 말은 원수의 말이 되고 도적의 말이 된다. 의식의 꾀가 말의 꾀로 바뀐다. 꾀의 소리가 사람을 얽어 맨다. 사람을 곡도로 만든다. 곡도로 된 사람, 곡도로 된 세계는 제쥬변을 잃는다.

관념적(觀念的)

관념에만 사로잡혀 있는, 또는 그런 것.


말 이야기가 자못 길어졌다. 말과 자유, 말로부터의 자유, 이런 이야기를 줄곧 하고 다녔다. 그럴 때마다 ‘관념적’이라는 비판을 듣곤 했다. 솔직히 나는 지금도 이 말이 무얼 뜻하는지 잘 모른다. 대강 뭔가 ‘속절없고, 부질없는’이란 뜻으로 들어 넘긴다. 속이 텅 빈 헛소리겠다. 늘어지는 이야기 그렇게 들릴 수도 있겠다.

사형판결문을 이두와 한문으로 쓴다면 문리를 모르는 어린 백성은 한 글자의 차이로도 억울함을 당할 수 있다. 이제 그 말을 언문으로 써서 바로 읽어 듣게 해 준다면 아주 어린 사람이라도 모두 쉽게 알아 억울함을 품는 이가 없을 것이다.


『세종실록』의 구절이다. 세종의 말씀이다. ‘한 글자의 차이’, 이건 뭘까? 15세기 조선, 한문으로 판결문을 쓰고 적을 수 있었던 사람은 몇이나 될까? 서당개 풍월이라도 읊을 수 있었던 이는 또 얼마일까? 문리를 모르는 어린 백성은 얼마였던가? ‘한 글자의 차이’, 한번 바꾸면 아주 바뀐다. 다시는 억울함을 품는 이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신하들은 판결의 평등과 불평등은 옥리(獄吏), 사람에게 달린 것이지 말과 글자에 달린 것이 아니라고 비판한다. 비판과 반대는 끈질겼다. 세종의 말씀은 끝내 세상을 바꾸지 못했다. 바로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억울함을 품고 죽은’ 이들의 뉴스를 듣는다. ‘한 글자의 차이’, 세종의 말씀, 나는 ‘한 글자의 자유’라고 말하고 싶다. 문리를 모르는 어린 백성이라 해도, 그의 몸은 제 몸이다. 제 목숨이다. 목숨이 걸린 일에, 옥리는 또 뭐람. 한 글자의 차이, 알고 속이는 자도 있고, 모르고 속이는 자도 있다. 그래도 이런 게 바로 ‘천개의 입도 모자라다고 슬퍼하고 투덜대는’ 자들의 심보다. 문리를 좀 안답시고, 글 좀 한다고, 천개 만개, 남의 입, 남의 몸을 독점하려 하다니. 모두 쉽게 알아 먹을 수 있는 우리말, 그게 뭐 그리 잘못일까?

남의 비방 좇으면, 뜻이 편안하니

일체의 말씀이, 오직 바람소리라

나무 사람과 꽃새가, 일찍이 서로 만나니

제 뜻이 없어, 제 놀라지 않더라


살다 보면 비판도 받고 비방도 당한다. ‘남의 비방을 좇다’는 말은 흘려 넘긴다는 말이다. 다른 생각을 내지 않겠다는 말이다. 나무를 스치는 바람소리로 흘려 듣는다. 그리하면 뜻이 편안하다. 남을 비방하는 사람을 ‘나무사람’이라고 한다. 목인(木人)이다. 비방을 므던히 흘려 듣는 사람은 꽃새라고 한다. 꽃새가 므던하면 비방하던 사람도 나무사람이 된다. 비방하는 이는 말로 꾀를 쓰는 이이다. 말의 중매, 도적의 꾀이다. 갖가지 달콤한 말과, 이로운 말로 옭아매고 앗아간다. 편안한 사람을 불편하게 만든다. 나무사람에게 제 뜻이 있을리 없다. 제 뜻이 없으면 꾀를 쓸리도 없다. 구두선도 공염불도 바람소리고, 달콤함도 이로움도 얽어매는 줄이다. 므던한 꽃새, 이건 꽃새의 자유일까? 꽃새의 자유는 꾀를 쓰는 사람도 자유롭게 만든다. 바람소리 같은 쉽고 번득한 말, 모두가 편안하다.

우리 모두가 자유로워질 때까지, 우리들 누구도 자유롭지 않다.


바람소리라지만, 꽃새라지만, 그래도 이건 너무 겨르롭다. 꿈 같은 노래, 부질없는 소리다. 그렇다 해도 ‘관념적’이면 또 어떤가? 꿈이면 또 어떤가? 우리 모두 꽃새가 될 때까지, 꽃새의 꿈을 꾼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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