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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의 말투/기관목인 판타지

08_곡도의 이익

기관목인 판타지

환암(幻菴)은 조계(曹溪)의 의표(儀表)요, 한산자(韓山子)는 우리 무리의 영수(領袖)이다. 진실로 서로 닷옴이 무겁고 예를 다한다. 이 어른들은 어떻게 공부를 했기에 이럴 수 있을까?


도은(陶隱) 이숭인(李崇仁)의 말씀이다. 한산자는 목은(牧隱) 이색(李穡)이다. 환암혼수(幻菴混修, 1320~1392)는 고려말의 조계종, 선불교를 상징하는 선승이다. 환암(幻菴)은 이른바 당호, 그가 살던 방에 건 이름이다. 이 들은 고려말의 영웅이다. 요즘에는 스타라는 말을 쓴다. 불교와 유교, 또는 선불교와 성리학의 두 어른, 이들은 말 그대로 스타였다. 아니 영웅이나 스타라는 말로도 부족하다. 그들은 고려말 지식과 사상, 종교의 상징이었다. 무엇이라도 할 수 있는 실세였고, 누구나 알고, 따르고 싶었던 모범이었다. 언해불전은 애중(愛重)을 '닷옴이 무겁다'라고 새긴다. 도은의 말씀은 빈말이 아니다. 환암과 목은의 우정이랄까, 남은 기록을 보아도, 이들의 '무거운 닷옴'은 남다르다. 환암이 부탁하고 목은이 지은 환암기(幻菴記), 멋진 글이다. 새삼 두 영웅의 우정을 기리려는 건 아니다. 이 글에 담긴 두 어른의 말투가 언해불전의 말투와 단단하고 끈끈하게 얽혀 있다. 기관목인 판타지, 이 이야기 근본, 뿌리와 밑을 나톤다. 기관목인이나 괴뢰를 '곡도'라고 읽고, 환(幻)이란 글자 또한 '곡도'라고 새기던 사람들의 뿌리와 밑이다.

몸이 곡도인 것은 사대(四大)가 이것이다.

마음이 곡도인 것은 연영(緣影)이 이것이다.

세계가 곡도인 것은 허공의 꽃이 이것이다.


그러나 이미 곡도라고 했으니, 이는 볼 수 있고, 닦을 수 있다. 볼 수 있는 것을 보고, 닦을 수 있는 것을 닦으니, 이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과는 같지 않다. 이것이 내가 평일에 서 있는 자리이다. 이게 어찌 단멸(斷滅)로 들어가는 것이겠는가?


또 이른바 삼관(三觀)이라는 것이 있어 따로 닦기도 하고,

단수(單修)와 복수(複修)로 청정한 정륜(定輪)을 완성하니,

곡도를 일으켜 듣글을 녹이는 기술이 그 속을 관통하고 있다.


그러므로 곡도가 이 말학(末學)에게 주는 이익이 아주 작지만은 않다. 이것이 내가 머무는 방에 내걸고자 하는 뜻이다. 그래서 내 소문을 듣고 내 방으로 들어오는 이들이 다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게 하려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고요하고 걸림 없이 한가하게 머무는 자리에 뭐라고 이름을 걸고, 말을 세워 지붕 위에 다시 지붕을 더하겠는가?


모암토동(茅菴土洞)이란 말이 있다. '새집과 흙굴'이라고 새긴다. 새를 얹은 초가집이고, 흙으로 파고 세운 흙집이다. 스님들이 사는 집이다. 요즘엔 보통 토굴이라고 부른다. 환암(幻菴)은 환(幻), 곡도로 세우고 곡도를 얹은 곡도의 굴이다. 혼수(混修)가 사는 집은 곡도로 된 곡도의 굴이다. 혼수가 부탁하고 한산자가 지은 환암기(幻菴記)에 그 사연이 담겼다. 환암은 '곡도가 말학에게 주는 이익'을 이른다. 환암이란 당호, 집에 건 이름은 환암의 선물이다. 내가 머무는 방으로 오는 이들에게 주는 선물, '스스로를 돌아 볼 수 있게 하기 위하여'라고 한다.

환암은 기환소진(起幻銷塵)이란 말을 쓰기도 한다. 이런 말은 까다롭다. 『원각경언해』는 '환(幻)을 니르와다 듣글을 사김'이라고 새긴다. '곡도를 일으켜 듣글을 녹임'이란 말이다. 이 말은 환암의 열쇠말이다. 자성(自省), 또는 반성, 제 스스로를 돌아 보고 살피는 방법이다. '듣글을 녹임'은 이 방법의 이익이다. 환암의 집은 말하자면 놀이동산의 거울의 집이고, 곡도의 집이다. 곡도를 보고 곡도를 닦는 공부, 교육의 자리이다. 그것도 몸으로 하는 공부, 시청각교육의 현장이다. 환암이란 이름은 공부를 위한, 이익을 위한 간판이다. 언해불전의 말투를 따르자면 '냇보람'이다.

망인사대(妄認四大)하야 위자신상(爲自身相)하고

육진연영(六塵緣影)으로 위자심상(爲自心相)할새


사대(四大)를 거츠리 그르 알아 제 몸의 얼굴을 삼고

육진(六塵)의 연영(緣影)으로 제 마음의 얼굴을 삼을새


연(緣)은 육진(六塵)에 버믈시니, 육진에 버므는 마음은 그르메 같아 실(實)하지 아니할시라


일체불세계(一切佛世界)가 허공화(虛空華) 같아, 삼세(三世) 다 평등하여 오며 감이 없으니


위의 두 구절은 『원각경언해』의 새김이다. 아래의 구절은 『금강경삼가해』의 우리말 풀이이다. 환암은 몸이 곡도라고 한다. 마음도 곡도이고, 세계도 곡도라고 한다. 『원각경』의 구절, 환암은 저렇게 읽는다. 몸과 마음과 세계, 모두가 곡도라고 한다. 환암의 말투는 곡도를 앞세운다. 이런 말투, 이런 사람은 드물다. 곡도라는 말, 보통은 가잘빔, 비유로 여긴다. 그래서 보통은 '있음'과 '없음'을 앞세운다. 환암에게는 곡도가 열쇠말이다. '조계의 의표'가 '선비의 영수'에게 곡도를 건넨다. 목은은 곡도를 '술법으로 지어낸 환술(幻術)'로 읽는다. 『금강경』의 사여게(四如偈)를 들어, '있음'과 '없음'의 사이를 가른다. 나의 몸과 마음, 있음과 없음 사이에 있다. 그리고 '곡도의 심식(心識)을 배운 뒤라야 환암의 됨됨이를 알 것'이라고 한다. 목은은 곡도로 환암을 읽는다. 서로 '닷옴이 무거운' 이들, 그들의 말이라면 고려의 말이다. 우리 역사에 이런 일도 있었다. 환(幻)이라는 글자, 곡도라는 말, 그만큼 널리 쓰던 말이었다.

근(根)과 경(境)은 안의 육근(六根)과 밖의 육진(六塵)이다. 육식(六識)은 서로 좆는다. 법(法)은 근(根)과 진(塵)과 식(識), 이 셋이 다 법이다. 비비어 괴이하다고 한 것은 눈을 비비어 괴이함을 낸다는 것이다. 근과 경과 법 사이에 보고 듣고 아롬에 짓는 바와 하는 바가 모두 다 비비어 괴이함이다.


그르메의 일이 섞이고 벌린다고 한 것은 육진에 연(緣)하는 그르메로 나의 마음을 삼는다면, 육진이 다 그르메이니, (앞의) 다섯 식(識)이 진(塵)을 취하여, 육식(六識)이 나누어 가리기 때문에, 그르메의 일이 섞어 벌린다고 하였다.


육근(六根)과 육진(六塵), 몸 안의 뿌리이고, 몸 밖의 드틀, 또는 듣글이다. 드틀은 뿌리에 마주 서는 몸 밖의 대상이다. 뿌리와 드틀이 비비고 버믄다. 언해의 우리말 풀이는 친절하다. '보고 듣고 아롬에 짓는 바와 하는 바가 모두 다 비비어 괴이하다', 불교의 한자말투, 몇백년이 지난 지금도 한자말을 쓴다. 불교책을 좀 읽었다는 사람들, 한자말이 훨 쉽다고 하는 사람들도 참 많다. 정말 쉬운 걸까? 정말 아는 걸까? 언해불전은 그런 말을 우리말로 바꿔 쓴다. 비비어 괴이한 일, 이런 일이 곡도의 본질, 곡도의 믿얼굴이다. 얼굴과 그르메의 사이에서 목은이 말하는 '있음'과 '없음'이 갈린다.

곡도를 일으켜 듣글을 녹이는 기술이 그 속을 관통하고 있다.


기환소진(起幻銷塵), 환암이 환암이란 이름을 뒤집어 쓰고, 내 거는 까닭이다. 드틀에 비비고 버므는 일, 그래서 거츨게 그르 아는 일, 그걸 반성하라는 뜻이다. 곡도라는 말은 주문과도 같다. 곡도는 곡도를 부른다. 불러 일으킨다. 곡도를 볼 수 있으면, 곡도를 닦을 수 있다. 곡도를 일으켜 곡도를 녹여 버린다. 비비고 버믈 일도 없다. 환암은 그 일을 술(術)이라고 부른다. 곡도를 보고 곡도를 닦는 일도 환술이다. 곡도의 기술이고 술법이다. 환암은 늘 그러고 산단다. 이런 일이 곡도가 주는 이익이라고 한다. 언해불전에 담긴 기관목인 판타지, 이것도 '곡도를 일으켜 듣글을 녹이는 기술'이다. 부처를 바라보는 이들에게 주는 이익이고 선물이다. AI, 인공지능, 곡도인 사람이 곡도를 일으켜 곡도를 만든다. 곡도의 사람과 곡도의 기계, 이런 상상도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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