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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과 함께 읽는/道를 證한 노래는

016_02 눈썹의 평등

증도가 현각의 노래

모로기 알고


곧 전(筌)을 잊으리니

예를 부터 눈섭 털이, 눈 가에 있도다

향상(向上)의 기관(機關)을, 어찌 족히 이르리오

배 고프거든 밥 먹고, 잇브거든 자니라


'모로기 알고', 영가가 한 마디를 부르면, 남명은 세마디, 네 마디를 부른다. 남명은 말이 많다. 그 말이 아주 화려하다. 그의 별명이 만권(萬卷)이었다고 한다. 책 만권을 가졌다는 뜻일까. 만권을 다 읽었다는 소리일까? 만권의 노래, 만권에서 캐온 말씀, 그의 말씀에는 다 뿌리가 있다. '모로기 알고', 만권의 세 네마디가 이 한 마디를 덮는다. 말문이 탁 막힌다. 말의 뿌리를 따라 가다 보면 옆길로 새기 십상이다. 그런데, 세종과 두 아들은 만권의 노래도 우리말로 새겼다. 친절한 우리말 풀이도 달았다. 이게 참 우리말 잔치다. 긴 노래, 만권의 뿌리를 가진 한자말들, 그걸 우리말로 새기고 풀었다. 15세기 우리말투의 실험, 실험도 이런 실험이 없다. 잔치도 이런 잔치가 없다. 그래서 나는 영가의 노래도 노래지만, 만권의 노래가 고맙다. 만권의 말을 다루는 언해의 말투가 즐겁다.

만권의 노래, 전(筌)이라는 글자는 『장자(莊子)』가 뿌리이다. 『원각경언해』에서는 『주역』의 말투를 빌어, 장자의 말투를 풀이한다. 그리고 이들의 말투에 견주어 부처의 말투와 조사의 말투를 가린다. 전(筌)이란 글자에는 말투에 관한 긴 이론이 담겨 있다. 이 이론은 요즘 말로 존재와 인식에 관한 이론이다. 그리고 이런 이론들, 말을 통해 주고 받는 소통의 이론이다. 언해불전의 말투를 따르자면, '이숌'과 '아롬', 그리고 '니롬'과 '드롬'의 틀이다. 부처의 말투는 본래 인도 사람의 말투였다. 부처의 말씀을 한문으로 새기고 풀이하면서 전(詮)이란 글자를 쓰기 시작했다. 그 뒤로 『장자(莊子)』의 전(筌)은 부처의 전(詮)을 가잘비는 말이 되었고, 부처의 말을 듣고 아는 이론과 방법이 되었다. 전(筌)은 '그릇'이라고 새긴다. 물고기를 잡는 그릇, 요즘엔 통발이라고 부른다. 전(詮)은 '이르다'라고 새긴다. 고기를 잡기 위해 그릇을 쓰듯, 사람을 알게 하기 위해서도 말을 쓴다. 그릇은 말에 대응한다. 이 이론을 따르자면 '말은 그릇'이다. '잡다'라는 동사는 '이르다'는 동사에 대응한다. 짓이나 일, 그릇을 가지고 뭔가를 한다.

전(筌)은 고기 잡는 그릇이라.

기관(機關)은 일이라 하는 말이라.


'전(筌)을 잊다' 함은, 고기 잡고 그릇을 잊을시니, 오늘날의 아롬이 오히려 그릇일새, 안 마음도 또 잊음을 가잘비시니라.


내 몸에 본래 뒷논 것을 아니, 각별히 새로 이룬 기특(奇特)이 없을새, 이르시되 예를 부터 눈섭 털이 눈 가에 있다 하시니, 하마 기특이 없으면, 아침 오고 나조가 감에 배 고프거든 밥 먹고 잇브거든 잘 따름이니라.


이 불조(佛祖)의 향상(向上)의 기관(機關)이니, 어찌 족히 기특하다 이르리오. 그럴새 이르시되, '향상(向上)의 기관(機關)을, 어찌 족히 이르리오' 하시니라.


고기잡는 그릇도 있지만, 토끼잡는 그물도 있다. 숱한 그릇, 그릇에는 모양이 있고 쓰임이 있다. 고기잡는 어부라 해도 고기만 잡고 살지는 않는다. 잡은 고기를 팔기도 하고, 먹기도 한다. 고기가 목적이 아니다. 고기도, 고기 잡는 그릇도 활계(活計), '사롤 혬'의 수단이다. 그래서 고기를 잡으면 그릇을 잊으라고 한다. 말도 그릇이다. 말에는 뜻이 담긴다. 말에도 숱한 말이 있다. 말에도 모양이 있고 쓰임이 있다. 그래서 말을 통해 뜻을 전했다면 말을 잊으라고 한다. 고기잡는 그릇으로는 토끼를 잡기 어렵다. 그릇 하나로 온갖 짐승을 다 잡을 수 없다. 그래서 그릇에 집착하지 말라고 한다. 말 한마디로 온갖 소통을 다 할 수도 없다. 그래서 말에 집착하지 말라고 한다.

언해의 풀이는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남명의 전(筌)을, '아롬이 그릇'이라고 풀이한다. '알다'는 동사이다. 사람이 하는 일이나 짓이다. 짓의 앞 뒤에 원인이 있고 결과가 있다. 그 사이의 일을 사유할 수도 있고, 말로 이를 수도 있다. '모로기 알고', 사랑하거나 이르는 일에도 그릇을 쓴다. 염(念)도 그릇이고, 상(想)도 그릇이다. 이 그릇을 나토기 위해 이름을 달면, 이름이 그릇이 된다. 그릇으로 하는 사랑, 그릇으로 얻은 아롬, 아롬이 다시 그릇이 된다. 그릇에 집착하면 아롬이 망가진다. 아롬이 망가지면 사롤 혬도 망가진다.

남명의 노래, 만권의 이야기가 툭툭 튀어 나온다. 그의 노래를 따라 부르려면, 이런 이야기를 들을 줄 알아야 한다. 그는 그런 긴 이야기들, 글자 하나에 우겨 넣는다. 언해는 그걸 우리말로 새기고 풀이한다. 노래가 길어지고, 말이 늘어지면 노래의 맛을 버린다. 맛도 없고, 재미도 없고, 지겨운 일이 된다. 그래서 언해의 말투는 짧고 쉽다. 이런 것도 미리 설계한 투이다. 노래의 맛을 따라 가는 게 우선이다.

의구미모(依舊眉毛)가 재안변(在眼邊)이로다

예를 부터 눈섭 털이, 눈 가에 있도다


기래끽식(飢來喫食)하고 곤래면(困來眠)하나니라

배 고프거든 밥 먹고, 잇브거든 자니라


'모로기 알고', 남명은 문득 그릇을 노래한다. 그리고 그릇은 눈썹으로 이어진다. 언해불전에는 눈썹이란 말이 참 자주 나온다. 그만큼 즐겨 쓰는 가잘빔이고 열쇠말이다. 언해는 남명의 눈썹을 두 가지로 풀이한다. 하나는 '내 몸에 본래 뒷논 것'이다. 다른 하나는 '새로 이룬 기특(奇特)이 없다'이다. 눈썹은 내 몸에 본래 뒷논 것이다. 본래 뒷논 것, 새로 이룬 게 아니다. 기특할 게 없다. 이 두가지가 '모로기 알고'의 얼굴이다. 아롬의 노래는 그릇의 노래가 된다. 그릇의 노래는 눈썹의 노래가 된다. 제 멋대로, 제 깜냥대로 제 노래를 부른다. 남명의 노래, 언해의 풀이, 죽이 척척 맞는다.

그대는 아니 보는가


이 어떤 낯인고

‘이 어떤 낯인고’라 함은, 묻는 것의 면목(面目)이라


남명의 눈썹은 '그대의 낯'을 가리킨다. 언해는 면목(面目)이라 부르고 '낯과 눈'이라고 새긴다. 본래면목(本來面目)이나, 진면목(眞面目)이란 말을 쓰기도 한다. 이런 한자말들, 사전은 '중생이 본디 지니고 있는 순수한 심성', 이런 투로 풀이한다. 하지만 선사들의 말투 그리 무겁지 않다. 그대의 낯짝을 보아라, 그대는 누구야? 정체를 밝혀라. 눈썹은 그런 말이다. 그냥 눈썹, 낯과 눈이라 부르면 구태여 풀이할 것도 없다. 사전도 필요없고, 이런 잡소리들도 다 부질없다. 나는 다만 이런 말투가 아깝다.

각각 눈썹 털이 눈 위에 빗겼나니라


부처 이르신 법이 오직 눈 위의 눈썹 털을 이르시니

하다가 이 눈 위의 눈썹 털인댄, 날 제 덛덛이 있나니, 뉘 홀로 없으리오


이건 『금강경삼가해』, 함허의 풀이이다. 불법(佛法), 부처의 법, 오직 '눈썹 털'이란다. 누구나 날 때부터 타고난 털이란다. 고유(固有)를 '덛덛이 있나니'라고 새긴다. 상(常)이란 글자도 '덛덛이'라고 새긴다. '개에게도 불성이 있을까?' 선불교의 흔한 화두이다. 불성이나 심성, 진여니 여래장이니, 갖가지 어려운 말을 들이댄다. 한문으로 번역한 불교, 부처가 자주 쓰던 말이다. 성(性)이란 글자도 그릇이다. 이 그릇, 무슨 불변의 진리처럼 쓴다. 물도 담고 불도 담는다. 그래서 불성이나 심성, 하늘이나 진리, 신처럼 여기는 사람들도 있다. 거꾸로 불교가 그런 '덛덛한 진리나 불성'을 주장한다면, 그건 모순이라고 비판하는 이들도 있다. 제 눈썹을 믿으라는 종교도 있나? 이런 건 불법의 뜻은 커녕, 불교의 말투를 몰라서 하는 소리들이다. 잘난 체 하는 한자말투 탓이다. 이런 그릇, 잊어야 한다. 이런 말투, 버려야 한다. 누구나 본래 뒷논, 덛덛하게 있는 불성이나 심성은 그런 어려운 말이 아니다. 네 낯의 눈썹털 같은 말이다. 내 몸에 눈썹 털을 가졌듯, 내 몸에 '아롬'도 가졌다. 누구나 '모로기 알' 수 있다. 제가 가진 것, 어디 쫓아 다니며 돈 내고 배울 일도 없다. 부처의 가르침 오직 그거란다. 그게 전부란다.

누구나 덛덛이 가진 눈썹, 언해불전은 '한가지'란 말을 쓴다. 평등을 이렇게 새긴다. '모로기 알고', 이 노래에서 남명은 '한가지 눈썹', '눈썹의 평등'을 노래한다. 언해는 다시 '한가지 아롬', '아롬의 평등'으로 풀이한다. 내 몸에 본래 가진 것, 눈썹도 아롬도 몸의 평등이다. 내 낯의 눈썹, 기특할 게 없다. 기이할 것도 없고, 특별할 것도 없다. 제가 가진 것은 자유이다. 한가지로 가진 것은 평등이다. 몸의 자유, 몸의 평등, 이런 말도 헷갈린다. 그래서 눈썹을 노래한다. 눈썹의 자유이고 눈썹의 평등이다. 부처의 법이 오직 이것이듯, 언해불전의 말투도 오직 이것이다. 이런 뻔한 말, 구구하게 적고 앉았는 내 꼴이 우습다.

증도가, 그대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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