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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과 함께 읽는/道를 證한 노래는

011_02 부처의 말투, 조사의 말투

증도가 현각의 노래

진공실상(眞空實相)은

처진 물이 처지니마다 어는 뜻일새,


묘유실상(妙有實相)은

버들 파라며, 꽃 벌건 뜻이라.


실상(實相), 진실하고 평실한 '읏듬의 상(相)'이다. '읏듬의 모습'이다. 언해는 이걸 다시 진공(眞空)과 묘유(妙有)로 나누어 풀이한다. 공(空)과 유(有)의 짝이다. '없음'과 '있음'의 짝, '빔'과 있음', 또는 '무윰'과 '있음'의 짝이다. '무윰'이란 말은 사전에도 없는 말이다. '무이다'라는 말이 나오기는 한다. '끊어 버리다', '거절하다'는 뜻이라고 한다. '뻐즈기', 또는 '뻐즉하다'는 말이 있다. '얼뮈다'란 말도 있다. 방불(髣髴)이나 사이비, 뭔가 비슷해 보이긴 해도 같지는 않다는 말이다. '뷔다'는 '비다'의 옛말이다. '뷤'이란 말과 '무윰'이란 말을 나란히 쓴다.

무윰과 이숌괘 반닥거니


'반닥하다', 또는 '번득하다'는 '완연(宛然)하다'는 뜻이다. 활짝 열려 '훤하고', '뚜렷하고', '분명하다'는 말이다. 척 보기만 해도 누구나 다 모로기 알 수 있다. 공유완연(空有宛然)이란 말이 있다. 언해불전은 이런 말도 저렇게 우리말로 옮겨 새긴다. 얼굴 없는 부처도 있고, 얼굴 있는 부처도 있다. 속이 텅빈 쭉정이도 있고, 속이 꽉찬 여름도 있다. 그런 말이 다 '무윰과 이숌'의 짝이다. 이런 말은 속절없는 헛소리, 빈소리가 아니다. 누구나 척 보기만 해도 누구다 다 훤하게 알 수 있는 진실의 모습이다.

진공실상(眞空實相)은

처진 물이 처지니마다 어는 뜻일새,


적수적동(滴水滴凍)이란 말이 있다. 이른바 '사자성어'이다. 적(滴)이란 글자, '믈뎜 뎍'이라고 읽는다. '믈뎜'은 '물방울'의 옛말이다. 물이 방울질 때마다 그대로 얼어 버린다. 물이 방울지는 모습이 '처지다'이다. 처지자마자, 방울지자마자 얼어버린다. 고드름이 달리는 모습, 선사들이 좋아하는 선사들의 말투이다. 유록화홍(柳綠花紅), 이것도 사자성어이다. 선사들이 즐겨 쓰는 선사들의 말투이다. '버들 파라며, 꽃은 벌겋다'. 믈뎜은 얼고, 꽃은 핀다. 이건 겨울과 봄의 짝이다. 이런 말에도 다 사연이 있다.

불교책을 보다 보면 '선(禪)'과 '교(敎)'라는 짝을 자주 보게 된다. '선교양종', 세종도 불교를 혁파하면서 전국에 선종 사찰 18, 교종 사찰 18, 모두 36개의 절만을 남겨 놓고 모두 없애 버렸다. 절에 '선교'가 있듯, 말투에도 '선교'가 있다. '교(敎)'는 불경의 말투, 부처의 말투를 가리킨다. 이에 비해 '선(禪)'은 선불교의 말투이고, 선사들의 말투이다. 불(佛)과 조(祖)의 짝도 있다. 조(祖)는 선불교의 할아비, 조사(祖師)를 가리킨다. 선불교의 큰스님이다. 부처와 조사, 말투가 다르다. '격(格)과 파격(破格)'이란 짝도 있다. '말과 논리'에는 격(格), 틀이 있다. 부처의 가르침에도 '말과 논리의 틀'이 있다. 이에 비해 선과 조사의 말투는 '틀을 깨뜨린다.' 격외(格外)라는 말도 있다. '틀 밖'의 말투이다. '틀을 벗어나는' 말투과 논리이다. 이 두가지 말투, 그 차이는 파(破)이다. 선의 말투는 교의 말투를 '깬다'. 뒤집고 깨고, 거친 말도 아주 많다. 요즘말로 치자면 비판, 또는 반역의 말투이다. 나는 '말투'라는 말을 좋아 한다. 말에도 투가 있다. '투'도 격(格)이다. 틀을 깬다지만, 깨는 일에도 격이 있고 투가 있다. 선과 교의 말투, 요즘에도 서로 만날 수 없는, 모순의 말투처럼 여기는 사람들도 많다.

'진공(眞空)과 묘유(妙有)'는 교의 말투이다. 불경으로 전해지는 부처의 말투이다. 이에 비해 '처진 물이 처질 때마다 어는 뜻일쌔', 또는 '버들 파라며, 꽃 벌건 뜻이라', 이건 선의 말투이고 조사의 말투이다. 진공과 묘유, 부처의 말투에는 뿌리도 있고 몸통도 있다. 오래 되고 널리 쓰이던 말의 틀이 있다. 언해는 공(空)의 모습을 '처진 물이 처지니마다 어는 뜻'이라고 새긴다. 그리고 유(有)의 모습은 '버들 파라며 꽃 벌건 뜻'이라고 새긴다. '무윰과 이숌이 반닥거니'라고 한다. 이런 게 언해불전의 말투이다.

언해불전의 말투, 그 가장 큰 특징은 '선과 교', '조와 불'의 말투를 나란히 쓴다는 점이다. 증도가의 말투, 현각의 말투가 본래 그렇다. 노래 안에 부처의 말투를 툭툭 던져 넣는다. 구태여 설명하려 들지도 않는다. 그리고는 부처의 말투를 제 말투로 바꾸어 노래한다. 겨르로운 늙은이의 평평한 나날이고, 평평한 말투이다. 평창(評唱)이란 말이 있다. 부처의 말투를 비평한다. 평가, 서로 다투어 값을 매긴다. 그런 값에도 투가 있다. 그런 투가 선의 말투, 조사의 말투가 되었다. 언해불전의 말투는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오래된 부처의 말투, 따라 읽기 어렵다. 따라 읽으려면 법수도 읽어야 하고, 주석서도 챙겨야 한다.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래서 조사의 말투가 나왔다. 그런데 조사의 말투는 쉽기는커녕, 말도 되지 않는다. 법수도 없고, 주석서도 없다.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언해불전은 그래서 부처의 말투와 조사의 말투에 짝을 짓는다. 게다가 이걸 누구나 아는 우리말로 바꾸어 준다. 이게 참 별미이다. 그런데 이 노래, 넌즈기, 겨르로이 따라 부르다 보면, 부처의 말투도 조사의 말투도 쉬워진다. 진공실상도 쉬워지고, 처진 물이 처지니마다 어는 뜻도 번득해진다. 반닥해진다. 그래서 내게 언해불전의 말투는 묘수이다. 공부를 따로 하지 않아도 공부가 절로 되는 묘수. '실상(實相)을 증(證)하면', 이건 현각의 노래이다. 이 구절을 다루는 언해에는 '언해불전의 말투'가 오롯이 담겨 있다. 아까운 말투, 그래서 이 이야기를 조금 하고 넘어 가려고 한다.

옛날 세종 장헌대왕께서 일찍부터 『금강경오가해(金剛經五家解)』 가운데 『야보송(冶父頌)』과 『종경제강(宗鏡提綱)』, 『득통설의(得通說誼)』, 그리고 『증도가남명계송(證道歌南明繼頌)』을 국어(國語)로 번역하여 『석보(釋譜)』에 넣고자 하였다.


문종 대왕과 세조 대왕에게 명하여 함께 짓도록 하고, 친히 교정하고 결정했다. 당시 『야보송』과 『종경제강』의 두 가지 해석과 『득통설의』는 이미 초고가 완성되었지만 교정을 할 겨를이 없었고, 남명의 『계송』은 겨우 30여 수를 번역하여 모두 일머리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세종과 두 아들은 두 가지 책을 함께 번역했다. 함께라는 말, 한끠에서 왔다고 한다. 일시(一時), 또는 동시(同時)이다. 언해불전은 '한끠'와 '한데'를 섞어 쓴다. 시간과 공간이다. 구(俱)라는 글자도 '한끠'나 '한데'로 새긴다. 시간과 공간을 여럿이 함께 하는 일이다. 저 세 사람은 『금강경오가해(金剛經五家解)』와 『증도가남명계송(證道歌南明繼頌)』을 한데에, 한끠에, 함께 읽고 함께 번역했다. 『야보송(冶父頌)』과 『종경제강(宗鏡提綱)』, 『득통설의(得通說誼)』, 여기로부터 언해불전의 말투가 비롯했다. 세종은 이 책을 먼저 번역했다. 『금강경오가해(金剛經五家解)』, 이 책은 『금강경』을 풀이하는 주석서이다. 이 책에 함허가 풀이를 달았다. 당연 함허의 말투가 담겼다. 부처의 말투를 함허의 말투로 다시 읽은 책이다. 세종은 이 책을 번역하면서 『증도가남명계송(證道歌南明繼頌)』을 번역하기 시작했다. 이 책은 영가현각의 노래책이다. 선종 조사의 말투가 담겼다. 세종이 국어로 번역했다는 두 책, 언해의 우리말투가 참 닮았다. 그런데 이 번역의 순서가 중요하다. 『증도가남명계송』의 말투는 『금강경오가해』를 그대로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물 처지어 얼음 됨이 진실로 있으나,

파란 버들과 꽃다운 풀이 의의(依依)하도다.

가을 달과 봄 꽃이 그지없는 뜻에,

자고의 울음을 겨르로이 들음이 막지 아니토다.


이건 『금강경삼가해』의 구절이다. 『야보송』과 『종경제강』, 『득통설의』를 번역하고 풀이한 책이다. 이 구절은 『야보송』, 곧 야보가 부른 노래이다. 부처는 부처의 말투로 보리(菩提)를 가린다. 야보는 선의 말투로 『금강경』, 부처의 말투를 노래한다. 적수성빙(滴水成冰)과 녹양방초(綠楊芳草)를 짝으로 노래한다. '가을달과 봄꽃의 그지없는 뜻'에 '자고의 울음을 겨르로이 듣는다'. 부처의 말투, 『금강경』에 대한 야보의 평창이다. 그런데 함허는 야보의 노래를 다시 부처의 말투로 바꾸어 풀이한다.

보리(菩提)는 중생과 부처가 한가지로 본래 뒷논 것이라, 그 가운데 이 범(凡)이며, 이 성(聖)이며, 득(得)이며, 득(得) 없음을 가림이 마땅하지 않다.


함허는 부처와 조사의 사이를 부지런히 오고 간다. 부처의 말투를 조사의 말투로 노래하고, 조사의 말투를 부처의 말투로 가리고 따진다. 그리고 부처와 중생이 '본래 제 뒷논 것'이라고 선언한다. 함허는 이런 말투를 '부처를 밝게 할 뿐더러, 조사를 빛내 펴는 일'이라고 부른다. 현각의 증도가를 번역하던 세종, '실상(實相)을 증(證)하면', 이 구절을 풀이하면서 야보의 노래, 함허의 말투를 그대로 따른다. 『증도가남명계송』에 담긴 언해의 말투, 『금강경삼가해』에 담긴 함허의 말투를 거듭 인용한다. 『증도가남명계송』에 담긴 언해의 말투, 『증도가사실』도 인용하고, 『선문염송』도 인용한다. 그래도 중심은 역시 함허의 말투이다. 『금강경삼가해』를 『증도가남명계송』를 읽기 위한 참고서, 주석서처럼 쓴다. 그래서 이 두 책, 함께 읽지 않으면 따라 읽기도 어렵다.

사람에게 구함이, 제 몸에 구함만 같지 못하니라.


한번 보고 한 번 들음에 이르러도 낱낱이 다 이 기(機)를 발하는 시절이며,

한 빛, 한 향(香)이 낱낱이 나의 산 눈을 열게 하는 것이로다.


이건 함허의 읽기, 함허의 말투이다. '평평하고 옹근 진실의 모습'을 아는 일, 사람을 찾아 구하는 게 아니라고 한다. 제 몸에서 구함만 못하다고 한다. '무윰과 이숌'이 반닥한 뜻, 부처도 부질없고, 조사도 속절없다. 활안(活眼)을 '산 눈'이라고 새긴다. 살아 있는 제 몸의 제 눈이다. 기(機)는 내 몸이 발동하는 일이다. '믈뎜'이 어는 일도 기(機)이다. 버들 파라며 꽃 벌건 일도 기(機)이다. 자고의 울음도 기(機)이다. 눈을 뜨고 눈으로 본다. 그래서 '보고 또 보라'라고도 한다. 현각은 그대의 노래를 불러 보라고 한다. 이건 현각의 말투이다. 함허는 본래 제 뒷논 제 몸을 보라고 한다. 살아 있는 제 몸으로 평평하고 옹근 모습을 보고 들으라고 한다. 이건 함허의 말투이다.

강남(江南) 삼이월(三二月)에, 꽃 피고 바람 덥거늘

자고(鷓鴣) 울음을, 맏 즐기노라.


이건 남명의 말투이다. 봄이 오면 자고새가 운다. 귀가 있으면 누구나 듣는다. 들으면 안다. 봄이로구나. 최호(崔好)를 '맏 즐기노라'라고 새긴다. 자고새의 울음 겨르로이 듣고, 맏 즐기고, '산 몸의 산 눈'을 열게 한다.

증도가, 그대의 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