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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과 함께 읽는/道를 證한 노래는

012_01 알게코자 부른 구절

증도가 현각의 노래

증실상(證實相)하면

절리미(絶離微)니


증실상(證實相)하면

무인법(無人法)하야


앞의 구절, '절리미(絶離微)'는 증실상(證實相)에 대한 남명의 노래이다. 실상을 알면 이미가 그친다. 여기 무인법(無人法)은 아래의 영가현각의 노래이다. 실상을 알면 '사람과 법'이 없다. 이미(離微)가 짝이듯, 인법(人法)도 짝이다. 두 구절 동사만 빼 읽으면 '알면 그치니'이고 '알면 없으니'가 된다. 언해는 '대(對) 긋나니'라고 풀이한다. 절대(絶對)이다.

이(離)는 있음이오, 미(微)는 없음이다. 동(東)은 있음에 속(屬)하고, 서(西)는 없음에 속(屬)하니, 이 실상(實相)은 세 구(句)에 붙지 아니할새 이르시되, 동녘 가에 있지 아니하며, 서녘에 있지 아니타 하시니라.


묻기를, 하다가 이 뜻이 갖추어지면 무윰과 있음이 반닥하거니 어찌 이 세 구(句)가 아니리오.


하다가 이 실상(實相)은 비면, 밑이 사뭇 비고, 있으면 밑이 사뭇 있나니, 비거나 있거나 함에 낱낱이 대(對) 긋나니, 어찌 세 구(句)에 거리끼리오.


'비면 밑이 사뭇 비고, 있으면 밑이 사뭇 있나니', 철저공(徹底空)과 철저유(徹底有)를 이렇게 새긴다. '밑이 사뭇', 대(對)의 극단, 대(對)의 끝이다. 그런데 '세 구(句)'라는 말을 거듭한다. 그래도 '세 구(句)'가 무슨 말인지 구태여 풀어 주지는 않는다. 철저한 대(對) 사이에 또 하나의 구(句)가 있다. 『선문염송』의 말투, 『금강경삼가해』 함허의 말투에서는 중간구(中間句)라 부른다. '어찌 세 구(句)에 거리끼리오', '알고 나면 긋고 없다', 언해는 이 말을 세 구(句)로 풀이한다. 영가의 노래, 시작부터 짝으로 시작한다. 작대(作對), '대(對) 되옴'의 말투는 영가에게도 이미 입에 붙은 말투였다. 말마다 구절마다 '대(對)'가 들었다. '세 구(句)'는 말하자면 언해의 결론이다. 영가와 남명의 노래, 언해는 여기서 '어찌 세 구(句)에 거리끼리오' 라는 말로 요약한다.

'거리끼다', 언해불전에는 이 말도 자주 보인다. '걸끼다'라고 쓰기도 한다. 언해불전의 말투, 말의 쓰임을 따져 보면 이 말은 '걸다'에 '끼다'를 더한 말이다. 예를 들어 괘홰(掛懷)라는 말은 '마음을 걸다'라고 새긴다. 농조(籠罩)라는 말이 있다. '대바구니 롱, 보쌈 조'라고 읽는다. 대나무로 바구니를 짜서 새나 물고기를 잡는다. 전제(筌蹄)라는 말도 있다. 고기잡고 토끼잡는 그릇이다. 언해불전은 농조(籠罩)를 '농(籠)을 끼다'라고 새긴다. 관(冠)이란 글자도 '끼다'라고 새긴다. 뭔가 그릇을 '덮어 쓰다', 또는 '덮어 씌우다'는 뜻이다. 마음에 걸고, 마음에 씌우고, '걸끼다'는 그런 뜻이다. 체각(滯殼)은 '대가리에 거리끼다'가 되고, 체공(滯空)은 '공에 걸끼다'가 된다. 구(句)에 마음을 걸지도 않고, 구(句)를 덮어 쓰지도 않는다는 말이다. 언해의 말투, '대(對) 긋나니'의 뜻이 이렇다.

이로부터 조계의, 문 밖의 구절

옛같이 흘러지어, 인간(人間)을 향하리


영가(永嘉)가 조계(曹溪)에 가서 하루 밤을 자고, 문 밖의 이 구절을 불러 내시니, 이 구절을 불러 내심은 사람이 알게코자 하심이다. 하다가 여겨 의론하여 뫼가 가리면 이 한 구절이 옛 같이 흘러지어 인간에 향하리라 하시니라.


언해는 영가의 노래를 구(句)라고 부른다. '이 구절을 불러 내심은 사람을 알게코자 하심이다.' 그런데 이 구절, '여겨 의론'할 게 아니라고 한다. 이런 말투는 고약하다. 사람을 알게코자 내신 구절, 도리어 사람을 헷갈리게 만든다. 영가도 남명도, 언해도 다 안다. 헷갈리는 구절, 헷갈리더라도 불러 내야 하는 까닭이 있다. 알면서도 구태여 불러 내신 구절, 여기에도 방법이 있다. 기술이 있다. 언해는 '세 구(句)의 말투'를 건넨다.

오음(五陰)은 뜬 구름이, 속절없이 가며 오나니

삼독(三毒)은 물 거품이, 속절없이 나며 없나니


물과 더품에 이름과 얼굴이, 다르다 여기지 말라.


뜬 구름은 속절없이 오고 간다. 물 거품은 속절없이 나며 없다. 공(空)과 허(虛)를 다 '속절없다'라고 새긴다. 그래도 가며 온다. 그래도 나며 없다. 이 것이 '속절없이'의 실상이다. 뜬 구름과 물 거품, 밑이 사뭇 비고, 밑이 사뭇 있다. 명상(名相)을 '이름과 얼굴'이라고 새긴다. 이름과 얼굴, 구(句)의 다른 말이다. 구(句)에는 이름이 있고 얼굴이 있다. '속절없이', 이 말은 유무(有無), 또는 '유공(有空)'의 짝 사이에 있다. 밑이 사뭇 있고, 밑이 사뭇 빈 사이, 영가의 구절은 그 사이에서 나온 구절이다. 그 사이에서 구태여 부르는 노래이다. 영가의 노래, 영가의 구절에도 이름은 있고, 얼굴도 있다. 구절이란 게 본래 그렇기 때문이다. 구절이 없다면 '알게코자' 할 길도 없기 때문이다. 구태여 불렀지만, 거리낌없이 부른 구절, 거리낌없이 들으라는 말이겠다.

'알게코자', 이런 말도 다른 데서는 찾아 볼 수 없는 언해의 말투이다. 이 말투를 따르자면 영가의 '도(道) 증(證)혼 노래'는 '알게코자' 부른 노래가 된다. '알면 긋고 없고', 이 말도 뒤집으면 '긋고 없고'를 알게코자 부르는 이름이다. '알게코자', 나는 이 말투가 마냥 좋다. 예나 이제나, 구절을 좀 안다는 사람들은 많아도, 진실로 '알게코자'하는 사람들은 드물다. 이 말을 보면 세종의 '어린 백성이......' 저절로 떠오른다. 말과 구절을 다룰 수 없었던 사람들, 그 사람들도 기회를 주면 알 수 있다. 그 사람들을 '알게코자 하는 노래', 그래서 구태여 잇비 부른 노래, 헷갈릴 리도 없고, 거리낄 까닭도 없다. 언해불전의 말투는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말투이다. 새로 만든 글자로 처음 기록한 말투이다. 처음엔 누구나 낯설다. 그래도 누구나 입에 익은 일상의 말투, 평평한 말투이다. 몇 번 중얼거리기만 해도 금새 입에 익는다. 입에 익으면 알기 쉽다. 말로 하는 소통, 그래서 말투에 달렸다.

증도가, 그대의 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