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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과 함께 읽는/道를 證한 노래는

008_01 얼굴 없는 부처, 얼굴 있는 부처

증도가 현각의 노래

본래의 근원, 제 성(性)인 천진불은

눈이 청련 같고, 이 구슬 같도다


이 두 구절, 언해는 '얼굴 없는 부처'와 '얼굴 있는 부처'라고 읽는다. '눈은 퍼런 연꽃 같고, 이는 구슬 같고', 부처의 얼굴이란다. 인터넷에서 '얼굴 없는 부처'를 찍어 보면 머리 없는 불상의 그림이 줄줄이 나온다. 처음엔 나도 그러려니 했다. 하지만 '얼굴없는 부처', 잠깐만 돌이켜 봐도 뻔하다. 하여간 '머리 없는 불상'은 아니다.

예를 들어, '곡도 같이 된 빈 몸', 나는 이런 말도 언해불전에서 처음 봤다. '곡도'라는 말도 처음 들었다. 환화공신(幻化空身), 나도 이런 말투에 젖어 있었다. '곡도 같이 된 빈 몸', 이런 말투로 바꾸어 쓸 수 있다는 게 참 신기했다. 어차피 모르던 말 들, 말을 하나 새로 배우는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얼굴 없는 부처', 이런 말은 더 헷갈렸다. '얼굴'도, '없는'도, '부처'도 뻔히 알고 무심히 쓰던 말이다. 무심히 읽던 말, 부처의 눈과 이, 이 것도 부처의 얼굴이다. 그런데 이 노래, 찬찬히 보면 말투가 다르다. 안(顔)이란 글자, 요즘엔 '얼굴 안'이라고 읽는다. 이 글자는 '낯'이라고 새긴다. 면목(面目)이란 말도 자주 나온다. 이건 '낯과 눈'이다. 15세기의 우리말투, '부처의 얼굴', 이건 부처의 '낯'이 아니다.

언해불전은 한문을 우리말로 번역한 책이다. 한문과 우리말 번역을 나란히 편집했다. 요즘에는 대역(對譯)이란 말을 쓴다. 이건 그래도 쉽다. 한자말과 우리말을 나란히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말을 모르면 한자말로 읽으면 된다. 한자말이 헷갈리면 우리말에 맞춰 보면 된다. 우리말도 새로 배우고, 한자말도 새삼 익히는 셈이다. 이게 은근 재미도 있다. 그런데 낯설고 까다로운 곳에서는 우리말로 풀이를 해 주기도 한다. '얼굴 없는 부처'와 '얼굴 있는 부처', 이 것도 언해불전의 풀이이다. 여기에는 한자말이 없다. 얼굴에 견주어 볼 한자말이 없다. 그래서 헷갈리기도 하지만 막막할 때도 있다.

이것은 『금강경삼가해』의 본문과 번역과 풀이이다. 이 책도 세종과 두 아들이 '국어로 번역'했다는 책이다. 『증도가』는 세종께서 돌아가시는 바람에 중단되었다고 하지만, 『금강경삼가해』는 번역을 끝냈다고 했다. 다섯 권이나 되는 제법 긴 책이다. 저 그림만 보아도 세종과 두 아들, 말을 다루는 솜씨가 여간이 아니다. 우리말 솜씨도 솜씨지만, 한자말을 다루는 솜씨도 볼만하다. 이 책은 함허(涵虛 1376-1433)가 짓고 엮은 책이다. '함허'라는 이름도 언해불전을 읽는 또 하나의 열쇠말이다. 열쇠의 사람이다. 아무튼 이 책에서 『증도가』의 저 구절을 인용하고 있다. 『금강경』의 불(佛)이란 글자, 부처라는 말을 읽는 장면이다.

부처의 면목(面目)은 '낯과 눈'이라고 새긴다. 이걸 다시 '부처의 몸'이라고 부른다. 부처의 몸은 연꽃 같고 구슬같다. 그래서 '상호(相好)로 장엄한 몸'이라고 한다. 흔히 설흔 두가지의 상(相)과 여든 가지의 호(好)를 나누어 칭찬한다. 그만큼 씩씩하고 잘 생긴 몸이라는 뜻이다. 부처에게 낯과 눈이 있듯, 대중에게도 낯과 눈이 있다. 부처의 몸이 대중의 눈에 비친다. 잘 생긴 부처의 몸, 이 몸은 얼굴을 가진 몸이다. 그러다 문득 본성(本性)이란 말을 툭 던진다. 부처의 본성, 낯과 눈도 없다고 한다. 그래도 '옳고 그름을 이르는 사람'이라고 한다. 몸도 없이 이르는 사람, 그런 사람이 부처라고 한다. 몸도 없고 얼굴도 없다고 한다.

본원천진(本源天眞)이 시(是)아? 상호엄신(相好嚴身)이 시(是)아? 

일신(一身)에 분작양향심(分作兩鄕心)이로다.


본래의 근원 천진이 이아(이 것인가)? 상호로 장엄한 몸이 이아? 

한 몸에 두 가지 마음을 나누어 짓도다.


무형(無形)호되 환유상(還有像)하시니, 

봉인(逢人)하야 설시비(說是非)하시나니라.


얼굴 없으되 도리어 얼굴 겨시니, 

사람 만나서는 시비(是非)를 이르시나니라.


함허는 『금강경삼가해』를 한문으로 썼다. 그래서 여기에는 한자말이 있다. 한자말과 우리말, 대역이 가능해진다. 무형(無形)을 '얼굴없는'이라고 새긴다. 유형(有像)은 '얼굴 겨시니'라고 새긴다. 형(形)과 상(像)의 대구이다. 두 글자를 다 '얼굴'이라고 새긴다. 『증도가』의 풀이도 똑 같다. 이걸 보고 엄청 놀랐다. 15세기 언해불전의 '얼굴'이란 말, 그 말의 쓰임새, 한자말을 읽는 방식도 다르고, 우리말로 새기는 방식도 다르다. 이게 쉽지 못하다. 처음에는 오자나 오류가 아닐까, 의심도 했다. 아무튼 '얼굴 없는 부처'와 '얼굴 있는 부처'는 함허의 말투였다. 그리고 이 말투는 요즘의 말투와는 아주 다르다. 우선 이 두가지 사실은 분명했다. 이걸 전제로 두고, '얼굴'이란 말에 걸린 한자말과 우리말을 처음부터 다시 살피기로 했다. 나름의 '투'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말투'라는 말이 떠올랐다. 이건 그냥 '글자와 글자에 담긴 뜻'의 차이가 아니었다. 글자를 다루는 방식의 차이였다. 한자말로 소통하던 방식, 이걸 다시 우리말로 읽으며 우리말로 소통하는 '방식의 차이'였다. 말투의 차이, 15세기의 말투는 지금의 말투와는 아주 달랐다.

영가의 말투, '밝음 없는 실(實)한 성(性)'과 '불성(佛性)'을 마주 세운다. 함허는 『금강경』을 읽으며, 이 짝을 '본성(本性)과 상호(相好)'의 짝으로 읽는다. 성상(性相)의 짝이다. 이 짝에 걸린 말은 일물(一物)이다. '하나의 물건'이다. 언해는 이 말을 '한 것'이라고 새긴다. 이런 것도 말투의 차이이다. 물건, 예를 들어 돌멩이도 물건이다. 돌멩이에도 성(性)과 상(相)이 있다. 본성이 있고 상호가 있다. 부처의 몸도 물건이다. 본성이 있고 상호가 있다. 함허는 체용(體用)이란 말도 쓴다. 이런 말이 '얼굴'이란 말을 싸고 돈다. 언해불전의 '얼굴', 이 말을 알아 들으려면, 이전에 알았던 '말과 뜻', 잠시 묻어 두어야 한다. 말투가 다르기 때문이다.

이전에 알았던 뜻, 또는 안다고 믿었던 것들, 선입견이다. 선입견이 들어서면 '얼굴'도 꼬인다. 말이 이어지지 않는다. '한 몸에 두가지 마음', 이 노래도 이제 시작이다. 영가의 말투, 함허의 말투, 그리고 세종과 두 아들의 말투, 그 말투를 따라 가려면, 선입견은 잠시 묻어 두길 바란다. 따지고 가리고 싶다면, 뒤에 가려도 늦지 않다. 가리고 말고, 우선은 말이 통해야 한다.

증도가, 그대의 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