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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과 함께 읽는/道를 證한 노래는

003_01 한자말을 다루는 기술

증도가 현각의 노래

종이위지주석자(從而爲之註釋者)

또 붙어 주(註)하여 사긴 사람은,


또 알지 못하리로다, 그 얼마나 될까?

그러나 진실로 영가의 뜻을 얻은 사람이 어려우니라.


영가현각과 남명법천의 노래, 그 노래의 실끝, '붙어 사긴 사람'도 많다. 『남명천화상송증도가사실(南明泉和尚頌證道歌事實)』도 그런 사람, 그런 책 가운데 하나이다. 고려 사람이 엮었고, 대장경에 넣은 책이다. 그만큼 널리 읽히던 책이다. 그만큼 쓸모가 증명된 책이다. 그런데 세종과 두 아들, 이 책을 거의 무시한다. 이런 것도 이 노래를 읽는 재미가 된다. 이 책은 송나라 언기(彥琪)가 지은 『증도가주(證道歌註)』라는 책을 중심으로 엮였다. 세종과 두 아들은 이런 주석, 이런 '사김'을 무시했다. '진실로 영가의 뜻을 얻은' 사김이 아니었다는 뜻이다.

절학무위한도인(絕學無爲閑道人)


절학(絶學)은 세간(世間)의 학(學)을 그치고 무위(無爲)의 학(學)을 배우는 것이다. 세간(世間)의 학(學)은 출리(出離)가 아니기 때문이다.


무위(無爲)의 학은 소승(小乘)의 유위(有爲)를 부정하고 대승(大乘)의 무위(無爲)로 들어 가는 것이다. 소승(小乘)의 유위(有爲)는 구경(究竟)이 아니다.


반야(般若)를 배우는 보살(菩薩)은 법에 맞아, 일체(一切)의 법(法)에 반드시 머무는 곳이 없고, 마음에 걸림이 없어 대자재(大自在)를 얻는다. 그래서 작(作)해도 작이 없고, 위(爲)해도 위가 없다......


이 것은 『증도가사실(證道歌事實)』에 실린 언기(彥琪)의 사김이다. 절학(絶學)과 무위(無爲)는 노자(老子)와 장자(莊子)가 쓰던 말이다. 언기(彥琪)는 이 말을 다시 불교식으로 읽는다. 절학도 무위도 명사로 읽는다. 그의 머리 속에는 노자와 장자의 말, 소승과 대승의 말이 가득하다. 그런 말이 툭툭 튀어 나온다. 언기의 주석을 읽으려면 그런 사연을 따라 가야 한다. 절학이 뭐지? 무위는 또 뭐지? 절학은 말 그대로 학(學)을 그치고 끊는 것이다. 그런데 언기는 '무위의 학을 학하다'라고 읽는다. 그쳤다는 말을 '그치지 않았다'고 새긴다. 이런 말, 이런 사김, 사람 잡는다. '그 대는 아니 보난다', 누구는 뭘 보고, 누구는 뭘 보지 않는다는 걸까? 언기식으로 읽다 보면 첫구절, 첫 마디부터 헤매야 한다. 노자 장자의 말이 온통 앞을 가린다. 소승의 무위는 뭐고, 대승의 무위는 또 뭘까? 그러다가 문득, 반야의 보살, 『금강경』의 구절을 인용한다.

여겨 따지고 사량(思量)하면, 어지러운 뫼에 가리리


뭘 주석한다는 일이 대개는 이렇다. 한자말의 주석, 이천년, 삼천년, 한문의 역사가 온통 뒤섞인다. 그걸 모르는 사람은 첫 글자도 떼기 어렵다. '어지러운 뫼', 말씀의 난산(亂山)이다. '그대는 아니 보난다', 영가는 묻지만, 말씀과 글자의 어지러운 뫼가 앞을 가리고 눈을 가린다. 세종과 두 아들이 시작한 『증도가남명계송언해』, 이런 읽기, 이런 사김을 아낌없이 버린다. 이게 참 굉장하다. 말 그대로 '어위 크고, 어위 멀다'. 육백년 가까이 세월이 흘렀다지만, 한글 전용의 시대가 왔다지만, 요즘에도 이런 버림, 보기 힘들다. 세종의 읽기, 정말 용감하다. 용감한 선택이고, 용감한 실험이다.

배움 그쳐 하염없은 겨르로운 도인은


320구절의 긴 노래, 서두를 것 없다. 아까운 구절들, 두고 두고 즐기는 게 좋다. 긴 노래, 마디가 있다. 소리를 지른다면 다시 숨을 들이 쉬어야 한다. 그래야 다시 질러 댈 수 있다. 긴 노래 읽으려면 마디를 챙겨야 한다. 저 위의 말 덩어리, 말하자면 저게 첫 마디이다. 긴 노래 한번에 지를 수도 없지만, 한 눈에 읽을 수도 없다. 지르는 데에도 마디가 있고, 보고 읽는 데에도 마디가 있다.

저 마디, 영가의 마디이다. 남명은 이 마디를 따라 사이 사이에 제 노래를 섞었다. 영가에게 마디가 있다면, 남명에게도 마디가 있다. 마찬가지로 세종과 두 아들은 그 마디 사이에 다시 제 노래를 섞어 새겼다. 섞인 노래, 섞어 읽으면 헷갈린다.

영가의 마디, 세종의 번역, 언뜻 보아도 한자말이 섞였다. 어차피 벗어날 수 없는 한자말, 그래서 별 차이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잘 보면 다름이 보인다. 절학이니 무위니 그런 말이 아예 없다. 세종은 이런 말을 동사로 읽는다. 용언으로 새긴다. 말 뜻을 설명하려 들지도 않는다. '하염없은', 이건 과거이고 완료이다. 저 도인은 이미 배움을 그쳤다. 이런 게 우리말이다. 언기의 주석처럼 그침의 배움을 이어 가는 게 아니다. 겨르로운 도인은 그런 거, 저런 거, 다 '하염없은'이다.

그런 사이에 한자말이 섞였다. 망(妄)과 진(眞), 실성(實性)과 불성(佛性), 오음(五陰)과 삼독(三毒), 피할 수 없는 열쇠말이다. 이런 말을 모르면 이 노래를 따라갈 수 없다. 이런 말은 명사로 읽을 수 밖에 없다. 법상(法相) 또는 명상(名相)이라고 부른다. 어쩔 수 없이 설명을 끼어야 한다. 피할 수 없는 불교의 한자말투, 그래도 몇개 되지 않는다. 불교에서는 굳어진 말, 우리말로 고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이런 것도 언해불전의 말투이다. 저 말을 저렇게 새긴 사람들, 그 사람들도 선택을 한다. 새겨야 할지 말아야 할지, 설명을 해줘야 할지 말아야 할지, 머리를 맞대고 고르고 따진다. '국어로 번역'하는 일, '맛첫'의 일, 그래서 나는 도전과 실험이라고 부른다. 읽다 보면 다름을 느낄 수 있다. 15세기에 글자를 새로 만들고, 더불어 저런 일을 했다는 게 볼수록 신기하다.

증도가, 그대의 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