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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인천강, 평등과 자유의 열쇠/월인천강 사용법

7.2 세종이 옳았다


함께 노는 재주꾼, 낯이 그리 두꺼운가

죽지 않은 아첨꾼, 하마 뼈가 차가워라


세종실록에 실린 노래 구절이다. 두꺼운 낯, 차가운 뼈, 섬찟하다. 이 노래에도 물론 사연이 있다. 11세기 중반 중국 송나라에서 벌어졌던 탄핵의 사연이다. 어사 당개(唐介 1010-1069)는 황제에게 상소문을 올리고 어전에서 대놓고 재상 문언박(文彦博 1006-1097)을 탄핵했다. 문언박이 황제가 총애하던 장귀비에 붙어 국정을 농단한다고 했다. 당개는 그의 정치를 ‘부인노선(夫人路線)’이라고 불렀다. 말이 좀 웃기긴 한데 기분은 고약하다. 말하자면 비선실세랄까, 하여간 우리에게도 익숙한 일들이다. 세월은 흐르고 사람도 바뀐다지만 영 바뀌지 않는 것도 많다.

장귀비, 황제의 집안일, 재상을 탄핵한다지만, 당개의 화살은 황제를 바로 겨누고 있었다. 황제도 화가 났다. 당개는 황제에 맞서 ‘솥에 삶아 죽이더라도 피하지 않겠다’고 소리쳤다. 문언박과 당개는 똑 같이 곤장과 유배의 형을 받았다. 감동한 사대부들은 당개를 ‘진짜 어사’라고 불렀다. 저 노래는 ‘유배지로 떠나는 당개를 보내며’라는 노래의 한 부분이다. 아름다운 사람, 아름다운 역사, 이 노래는 ‘진짜 어사’만큼이나 사대부들을 감동시켰던 유행가가 되었다.

이 노래가 세종실록에 실린 데에도 사연이 있다. 세종 28년(1446) 집현전 직제학 이계전(李季甸 1404-1459) 등이 상소문을 올렸다. 몇 년 사이에 홍수와 가뭄이 겹쳐 백성들은 굶주리고 있었다. 그런 사이에도 성을 쌓고, 백성들을 이주시키고, 공법(貢法)을 시행하는 등, 나라의 정책들이 굶주린 백성들을 더욱 힘겹게 만들고 있었다. 상소문은 무리한 정책들을 나열하며, 임금과 나라의 언로(言路)가 막혔기 때문이라고 비판한다. 말은 길고 간절하다. 임금도 “사람의 일에 미진함이 있을까 두렵다” 고 인정한다. 이 또한 우리의 아름다운 사람들, 아름다운 역사이다.

집의 정창손(鄭昌孫)이 이계전으로부터 상소문의 초고를 빌려 보고, 그 뒷면에 옛 사람의 시를 적었다.

함께 노는 아첨꾼은 김문(金汶)을 가리킨다고들 했다. 김문이 처음에는 상소(上疏)를 의논할 때 함께 참여하였다가, 마침내는 배반하였다. 죽지 않은 아첨꾼은 당시 새로운 일을 꾸미던 대신(大臣)을 가리킨다고들 했다.


이 구절은 이계전의 상소문 밑에 사족처럼 달려 있다. 사관이 슬쩍 끼워 넣었다. 따지고 보면 상소문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다. 그냥 뜬금없는 스캔들이다. 조선왕조실록, 임금도 볼 수 없고, 오직 사관만 본다. 그래서 공평하고 정의롭다. 그런가? 뜬금없는 말들, 읽는 재미는 있다.

정창손은 이계전을 당개에 비긴다. 임금의 정책을 당당하게 탄핵하는 진짜 어사, 이계전을 대놓고 대놓고 칭찬하는 듯도 싶지만, 정창손의 목표는 김문이다. 그 뒤에 있는 대신이고, 임금이다. ‘함께 노는 재주꾼’, 이계전과 김문은 세종의 신임아래 오랜 동안 사이 좋게 지내오던 벗이었다. 일을 하면서도 밀어 주고 끌어준다. 실록에도 그런 이야기들이 여럿 남아 있다. 말하자면 이건 이간질이다. 사관은 여론을 빌어 김문을 배반자라고 부른다. 진짜 어사 이계전과 배반자 김문, 구태여 이름을 부른다면, 이름이 얼굴이 된다. 현실이 되고 진실이 된다. 정창손이 주동하고 여론이 호응하고 사관은 실록에 기록했다.

실록의 기록은 이것만이 아니다. 실록의 사관, 김문에 대한 평가는 차갑다. 예를 들어 김문이 죽은 날, 사관은 시시콜콜 옛 일을 들어 김문을 조롱한다. 예를 들어 김문의 어머니가 나라가 운영하는 사당에 속한 무당이었다고 한다. 출신도 천한데 아집에다 권모술수에다, 욕심 많고 아첨하고…… 야한 말들이 이어진다. 결론은 한결같다. 김문은 천한 배반자였다. 이간질이 패거리를 이루면 왕따가 된다. 괴롭힘이 되고 폭력이 된다. 세종의 집현전 안에서도 이런 일이 있었다.

세종 26년(1444) 2월 20일 경자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 등이 언문 제작의 부당함을 아뢰다


조선왕조실록의 번역본에 실린 기사의 제목이다. 말하자면 이런 것이 국민의 상식이다. 최만리는 세종에 맞서 언문제작의 부당함을 주장했다. 그런데 실록의 원문에 이런 제목은 없다. 번역자나 편집자가 뒤에 붙여 넣은 제목이란 뜻이다. 이걸 굳이 틀렸다고 하긴 어렵지만, 아무튼 희한한 제목이다. 그런데 희한한 것은 제목만이 아니다. 이 날의 이 기사 자체가 희한하다. 우선 아주 길다. 한 마디로 줄이기에는 너무도 복잡한 사건들이 뒤섞여 있다. 동떨어진 이야기들이 띄엄띄엄 이어져 두서도 논리도 없다. 따라 읽기도 귀찮고 따분하다. 어쨌거나 이날 큰 사단이 벌어졌던 것은 틀림이 없다. 왕실과 사대부, 나라와 백성의 운명이 걸린 사단.

세종 25년 12월 30일: 임금이 친히 언문 스물 여덟 자를 만들었다.

세종 26년 2월 16일: 집현전 교리 최항(崔恒) 등에게 명하여 언문으로 『운회(韻會)』를 번역하게 하였다.

세종 26년 2월 20일: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 등이 상소하기를……


일과 글에는 앞 뒤의 맥락이 있다. 맥락이 이어져야 이 날 이 사단의 심각함을 이해할 수 있다. 최만리 등이 올린 상소문, 세종이 글자를 만든지 두달 남짓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이 상소문이 ‘언문 제작의 부당함’을 바로 겨냥하고 있다는 제목이 달린 것 같다. 그런데 바로 나흘 전 또 하나의 사단이 있었다.

이제 널리 의견을 구하지 않고 갑자기 구실아치 십여 명에게 익히도록 하고, 또 옛 사람이 만든 운서(韻書)를 가볍게 고쳐, 뜬금없는 언문을 억지로 붙여, 기술자 수십 명을 모아 새기도록 하여 서둘러 널리 펴도록 하시니……


최만리 등이 올렸다는 상소문의 한 구절이다. 황당무계, 견강부회, 갑자기, 가볍게, 억지로, 서둘러…… 말도 거칠고 느낌도 거츨다. 집현전의 엘리트들이 임금에게 대놓고 이런 말을 쓴다. 하여간 대단하다. 아무튼 이 날의 상소문은 언문제작을 바로 따지는 게 아니다. 이 상소문의 목적은 나흘 전에 있었던, 또 다른 사단, ‘옛 사람이 만든 운서’를 번역하는 일을 따지자는 것이었다. 물론 이게 다 언문 탓이기는 하다. 그렇다 해도 언문의 제작과 운서의 번역은 분명 다른 일이다.

내가 너희들을 부른 것은 처음부터 죄를 물으려는 것이 아니었다. 다만 상소문 안의 한 두 마디를 물어 보려는 것이었을 뿐이다. 너희들이 사리를 따지지도 않고 말을 바꾸어 대답하니 죄를 벗기 어렵다.


임금도 화가 많이 났다. 그 자리에서 최만리를 비롯하여 상소문에 이름을 올린 신석조, 김문, 정창손, 하위지, 송처검, 조근 등을 의금부에 하옥시켰다. 분을 삭인 임금은 이튿날 두 사람을 빼고 모두 풀어 주도록 했다. 정창손은 파직시키도록 했고, 김문에 대하여는 국문을 계속하도록 했다.

이전에 김문이 “언문을 만드는 일이야 안될 것도 없습니다” 라고 하더니, 이제는 도리어 “안된다”고 한다. 


또 정창손은 “삼강행실(三綱行實)을 반포한 뒤에도 충신 효자 열녀가 무리를 지어 나오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사람이 실천하는 것은 다만 사람의 자질이 어떠하냐에 달린 것입니다. 하필 언문으로 번역한 뒤에야 사람들이 다 본 받겠습니까?”라고 했다. 


이런 말이 어찌 유자(儒者)가 이치를 아는 말이라 하겠느냐? 참으로 쓸데 없는 속된 유자들이로구나


화가 난 임금, 이날 이 사단의 직접적인 원인은 김문과 정창손, 두 사람의 말과 태도였다. 그런데 이들의 죄목은 양 끝으로 갈렸다. 정창손의 죄목은 사리를 따지지도 않고 시종일관 고집을 부린다는 것이었다. 이에 비해 김문의 죄목은 말을 바꾸고 태도를 바꾸었다는 것이었다. 세종은 무엇보다 김문의 이름이 저 상소문에 걸려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세종은 애초부터 최만리 등이 올린 장황한 상소문에는 관심도 없었다.

이 날의 사단을 불러 일으켰던 『운회(韻會)』라는 책, 요즘 말로 치자면 사전이다. 사전은 언어를 다룬다. 예를 들어 고려대장경에는 『음의(音義)』라는 범주의 사전들이 포함되어 있다. 불교 책을 읽기 위한 사전이다. 이 사전을 음의(音義)라고 부르는 까닭은 ‘소리와 뜻’을 다루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역사책을 보면 쉽게 사관(史觀)이란 말을 연상한다. 사관을 가져야 역사를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언어를 다루는 사전을 보면서 언어관을 연상하는 사람은 별로 없어 보인다. 하지만 언어관을 가져야 사전을 말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불교의 언어관은 “소리에 뜻을 담아 주고 받는다”는 관점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런데 소리는 물질에 속하지만, 뜻은 정신에 속한다. 머리 속에 담긴 것을 소리에 담아 주고 받는 일, 이런 일이 언어이다. 소통, 세종은 훈민정은 서문에서 유통(流通)이라고 불렀다. ‘사맛다’라고 새겼다. 제대로 주고 받고, 제대로 사맛기 위해서는 규칙과 기술이 필요하다. 사전에는 그런 규칙과 기술이 담긴다.

한자문화권에는 운서(韻書)라는 무리의 책이 있다. 운(韻)이라는 말은 음운을 가리킨다. 특정한 형태의 소리이다. 운서 또한 언어관을 담는다. 그리고 그 읏듬 또한 소리와 뜻이다. 소리와 뜻을 연결하여 소통하는 방식이다. 그래서 세종은 일찍부터 운서에 뜻을 두었다.

너희들이 운서를 아느냐? 네 가지 성(聲)과 일곱 가지 음(音)에 자음과 모음이 몇 개나 되느냐? 내가 운서를 정하지 않는다면 누가 정하겠느냐?


세종은 최만리 등에게 이렇게 물었다. 하지만 최만리 등의 신하들은 세종의 언어관에 대답하지 않는다. 그저 “신기(新奇), 새롭고 기이한 기술”이라고 부른다. 임금과 동궁이 쓸데 없는 일에 시간과 노력을 쓰는 거라며 고집을 꺾지 않는다. 임금과 신하들, 말이 통하지 않는다. 세종은 그저 말문이 막히고 억장이 무너진다.

『운회』는 운서이다. 세종실록에는 『운회』라는 말이 유난히 여러 차례 등장한다. 법률이나 제도를 만들거나 고칠 때, 운회를 참고하고 인용한다. 글자가 가진 소리와 뜻의 흔적을 추적한다. 세종의 시대, 『운회』는 공무원이나 학자들이 사용하던 표준 사전이었다는 생각도 든다. 『운회』운회의 본 이름은 『고금운회(古今韻會)』이다. 사전 중에서도 백과사전에 가까울 정도의 방대한 사전이다. 중국 원나라 때(1292) 황공소라는 사람이 편집했다. 이 사전이 너무나 자세하고 복잡했기 때문에 뒤에 이를 대폭 정리하여 『고금운회거요』라는 사전을 만들었다. 말하자면 축약본이다. 줄이고 줄인 것이 30권이었다.

집현전 교리 최항(崔恒) 부교리 박팽년(朴彭年), 부수찬 신숙주(申叔舟), 이선로(李善老), 이개(李塏), 돈녕부 주부 강희안(姜希顔) 등에게 명하여 의사청(議事廳)에서 『운회』를 언문으로 번역하도록 했다. 


동궁(문종)과 진양대군 이유(수양대군), 안평대군 이용에게 그 일을 감독하도록 하여 모두 성상의 결재를 받도록 하였다. 거듭 상을 내리고 예산을 넉넉히 쓰도록 했다.


세종은 훈민정음을 만들자 마자 『운회』의 언문번역을 시작했다. 그냥 지나가는 말이 아니다. 방대한 백과사전의 언문 번역, 일의 크기도 문제지만, 일의 어려움도 만만치 않다. 새로 만든 글자로 처음으로 하는 일, 일도 일이지만 일을 해 낼 수 있는 사람도 문제였다. 세종은 먼저 사람을 모아 조직을 만들었다. 예산을 정하고 일머리를 정했다. 이 일에도 집현전의 엘리트들이 포함되었다. 강희안은 세종의 외조카였다. 세종의 속 뜻을 오랜 동안 함께 해온 충실한 세 아들이 이 일을 이끌었다. 임금이 결정하고, 나라와 왕실이 이끌고, 집현전의 학자들이 붓을 들었다. 뭐 하나 빠질 게 없는 완벽한 계획이었고 사업이었다.

상소문은 이런 일을 신기한 일, 쓸데 없는 일이라고 부른다. 상소문 속의 수식어들은 화려하다. 앞뒤를 떼고 읽자면 아래 사람 꾸짖는 소리로 들릴 정도이다. 임금이 신하들과 의논도 없이 독단으로 강행한다고 했다. 언해불전의 말투를 따르자면 ‘구태여 짓는 속절없는 짓’이다. 그날의 일, 사관의 기록도 헷갈린다. 앞뒤의 일이 뒤섞여 있다. 그래서 다툼의 중심이 헷갈린다. 대체 저 임금님은 왜 저러시는 걸까? 쓸데없이, 속절없이, 요즘말로 다시 읽자면 망령(妄靈)이다. 조선왕조의 언로(言路), 과연 대단하다.

옛 사람이 만든 운서(韻書)를 가볍게 고쳐, 뜬금없는 언문을 억지로 붙여, 기술자 수십 명을 모아 새기도록 하여 서둘러 널리 펴도록 하시니


그런데 이런 일, 임금이 독단으로 치룰 수 있는 일이었을까? 세종실록의 상소문들만 보더라도 뻔하다. 함께 노는 재주꾼들, 집현전의 동료들이 함께 하던 일, 다들 정말로 몰랐을까? 그래도 임금은 운서의 뜻을 이야기한다. 꼭 해야 할 일이라고 설득한다. 임금의 말, 신하들은 듣지 않는다. ‘아니 되옵니다!’ 그냥 무시하고 묵살한다. 나중에는 다시 독단이라고 탓을 한다.

세종 30년(1448) 3월 28일

역마를 내어 상주목사 김구(金鉤)를 불렀다. 김구는 목사가 된지 반년도 못되었는데, 이 때 집현전에서 어명을 받아 『사서(四書)』를 언문으로 번역하게 하였다. 직제학 김문(金汶)이 맡아 했었으나 김문이 죽었기에 집현전에서 김구를 추천한 것이었다.


함께 놀던 재주꾼, 바로 그 배반자 김문이 죽었다. 실록에서는 “중풍으로 폭사(暴死)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 때 그가 맡아서 하던 일이 『사서』를 언문으로 번역하는 일이었다. 앞에 인용한 『운회』의 경우를 연상하면 된다. 세종은 유교의 경전을 번역하는 조직과 불교의 경전을 번역하는 조직을 함께 운영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훈민정음해례』도 그랬고, 『용비어천가』도 그랬다. 『석보상절』이나 『월인석보』도 그랬다. 담당자가 있었고, 전문가들이 있었다. 조직이 있었고 예산이 있었다. 그런 게 세종의 일머리였다. 세종실록은 ‘말년의 숭불(崇佛)’을 부끄러운 일로 비판하고 있다. 했다. 저 무렵 세종은 물론 불경을 번역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유교의 경전도 함께 번역하고 있었다. 『삼강행실』도 번역하고 『사서』도 번역했다. 숭불이란 말은 그 자체가 모욕이다. 불교에게도 욕이지만 세종에게는 더 큰 욕이다.

세종은 정말 희한한 사람이다. 글자를 새로 만들자말자 내놓고『운회』를 언문으로 번역하기 시작했다. 『운회』의 언문번역, 나는 이 일이 스물 여덟자 언문제작 보다도 훨씬 더 위대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아니 세종이 했던 숱한 일들, 그 어떤 일보다도 훨씬 더 야심만만한 프로젝트였다고 여긴다. 저 임금의 머리 속에는 저런 일, 저런 계획이 이미 올올이 짜여 있었다. 훈민정음은 그냥 글자 스물 여덟 자가 아니었다. 세종은 글자를 만들면서 이런 저런 일을 함께 계획했다. 순서를 정하고 하나하나 실천했다.

중종 32년(1537) 12월 15일

우리나라에 『운회』는 있지만 『옥편(玉篇)』은 없어서 살펴 보기가 어렵습니다. 이에 신이 글자의 종류를 모아 『운회옥편』을 지어 바치게 되었습니다. 간행하도록 하신다면 글자를 살피는데 보탬이 될까 합니다.


그런데 『운회』의 언문번역, 실록도 저토록 분명하게 기록했던 일, 이 일은 이걸로 끝이다. 실록이고 어디고 남은 단서조차 없다. 돈도 사람도 명분도 넉넉히 썼다는 일, 이 일은 도대체 어디로 갔을까? 세월이 흘러 『운회옥편』이라는 단출한 책 하나만이 세종의 흔적처럼 남았다. 『운회』의 번역이 그랬듯, 『사서』의 번역도 끝이다. 남은 게 하나도 없다. 정변으로 권력을 잡은 세조는 뒤에 간경도감을 설치하고 불경을 번역했다. 세조는 그 일이 세종의 유업이었다고 증언한다. 세조도 미처 완성하지 못했던 유업, 세종이 두 아들과 직접 번역했다는 『금강경삼가해』나 『증도가남명계송』의 언해는 대를 물려 성종 13년(1482)에야 완성할 수 있었다. 세조의 정변이 아니었다면 언해불전도 없었을 것이다. 『운회』나 『사서』의 번역, 임금의 일, 나라의 일이었다. 사람도 있었고 일도 있었다. 돈도 썼고 애도 썼다. 마무리는 하지 못했더라도, 뭐라도 결과는 있었을 것이다. 그런 것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실록은 왜 이런 일들에 침묵했을까?

내가 만일 『삼강행실』을 언문으로 번역하여 민간에 널리 편다면, 어린 남녀가 모두 쉽게 알아 충신 효자 열녀가 떼로 나올 것이다.


사형판결문을 이두와 한문으로 쓴다면 문리를 모르는 어린 백성은 한 글자의 차이로도 억울함을 당할 수 있다. 이제 그 말을 언문으로 써서 바로 읽어 듣게 해 준다면 아주 어린 사람이라도 모두 쉽게 알아 억울함을 품는 이가 없을 것이다.


최만리 등이 상소를 올리고 난리가 나는 사이, 세종과 정창손은 두 가지 일을 두고 언쟁을 벌였다. 실록의 기록이 그렇다. 하나는 『삼강행실도』와 같은 윤리에 관한 일이었고, 다른 하나는 법률에 관한 일이었다. 세종은 훈민정음 서문에서 사람을 편안하게 해 주려고 글자를 만들었다고 했다. 하지만 스물 여덟 자의 글자가 사람을 편안하게 해 주지는 않는다. 세종은 윤리에 관한 글을 쉽게 번역하여 보급하면 사람들이 윤리를 알게 될 것이라고 했다. 윤리는 여럿이 함께 한데 살아가는 이치이다. 방식이고 약속이다. 윤리는 법률로 이어진다. 법률에 관한 글을 쉽게 번역하여 보급하면 억울한 사람들이 없는 편안한 나라가 될 것이라고 믿었다.

『구급방언해』라는 책도 있다. 요즘으로 치자면 훠스트에이드(First-aid), 구급상자와도 같다. 세조는 간경도감을 설치하고 언해불전을 번역하면서 이런 책을 만들어 팔도에 나누어 주기도 했다. 목에 가시가 걸렸을 때, 독한 벌레에게 물렸을 때, 갑자기 상처가 났을 때...... 이런 건 그냥 눈물겹다. 아이는 아픈데 의사도 없고 약도 없다면 기가 막힌 현실이 된다. 아픈 것은 둘째치고 작은 상처에도 목숨을 잃을 수 있다. 이런 일은 억울함하고는 또 다르다. 평등이니 자유니 따질 겨를도 없다.

네 백성은 그위실 할 이와 여름 지을 이와 셩냥바지와 흥정바지왜라


사농공상(士農工商)의 네 백성, 언해불전은 저렇게 새긴다. ‘그위’는 나라의 관(官)이다. 그위실은 벼슬살이다. 선비는 벼슬하는 사람이다. 요즘말로 공무원이다. 종교와 사상, 윤리와 법률, 의학과 기술, 모두가 극소수의 작은 무리의 선비들이 독점하고 세습하던 일이었다. 똑똑한 사람들이 똑똑한 일을 하는 거야 그러려니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한문을 배우는 일,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시간이 걸리고 돈과 힘이 드는 일이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돈과 힘을 독점하고 세습하는 계급이 말과 교육도 독점하고 세습했다. 예나 지금이나 이런 것도 현실이다.

가르침과 배움, 그위실 뿐만이 아니다. 여름 짓는 일도, 성냥이나 흥정의 일도 가르치고 배워야 한다. 밥 먹고 사는 일이야 그렇다지만, 그런 사이에 아프기도 하고 시비가 생기기도 한다. 생노병사에 꼭 치러야 할 사람의 도리란 것도 있다. 이런 일들은 그위실 할 이들이 독점하고 세습했다. 그위실을 빼 놓고는 이런 일들은 가르치지도 않았고, 배울 수도 없었다. 오로지 그위실의 계급이 판단하고 결정했다. 가르침과 배움에도 차이가 있었고, 차별이 있었다. 나머지 어린 백성은 그냥 따르면 그만이었다. 현실이 기가 막히고 억울하다 한들, 어디 따질 데도 따질 수도 없었다.

정창손은 세종의 꿈과 일에 내놓고 대들었다. 그는 나라와 임금의 언로(言路)를 명분으로 내세운다. 이단을 명분으로 세우기도 한다. 그는 당개처럼 진짜 어사가 되고 싶었을까? 그는 정말로 세종과 세종의 일을 부인노선과 같은 추한 스캔들, 탄핵의 대상으로 여겼던 것일까? 분명한 사실은 정창손은 이 일을 집단의 일로 여겼다는 것이다. 낯 두꺼운 재주꾼, 죽지 않은 아첨꾼, 편을 갈랐다. 내 편이 아니라면 배반자로 몰았고, 집단으로 왕따를 주었다. 그러는 사이에 해야 할 일도, 하던 일도 사라져 버렸다.

구실아치들에게 언문을 가르치고, 『운회』를 언문으로 번역하고


끊어지고 사라진 일이 한두가지일까? 그래도 이건 너무 아깝다. 세종의 뜻대로 이런 일이 잘마무리가 되었다면 어땠을까? 오백년의 세월, 법과 제도를 만들고 고치는 일, 우리말 사전을 끼고 우리말로 할 수 있었다면 어찌 되었을까? 조선의 언로(言路), 말씀의 길은 조금 더 넓어지고 편해지지 않았을까? 임금과 그위실 사이의 길만이 아니라, 여름짓고 성냥하고 흥정하던 백성으로 통하는 길도 번득해지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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