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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과 함께 읽는/道를 證한 노래는

028_01 알고자 할진댄 돌아보라

증도가 현각의 노래

하다가 실(實)로 무생(無生)인댄, 불생(不生)도 없으니


생(生)과 생(生)이 어찌, 무생(無生)과 다르리오

불생(不生) 없는 끠, 한 것도 없으니

무생(無生)을 알고저 할진대, 만법(萬法)이 이라


'모로매 타 가리리니', 영가의 약속이다. 그런데 대뜸 조계의 구절, 무생(無生)을 뒤집는다. 실(實)이란 글자는 허(虛)나 공(空)의 짝으로 쓴다. 속이 꽉찬 열매, 알차고 옹근 것을 가리킨다. 영가는 그런 글자까지 들이댄다. 무생(無生)이란 말대가리, 꽉찬 얼굴을 가졌다면, 불생(不生)도 없다고 한다. 무생(無生)이 '남 없음'이라면, 불생(不生)은 '나지 않음'이다. '없음과 않음'의 짝, 이건 또 뭐가 다를까? '실로 남이 없다면, 나지 않음도 없으니', 이 구절은 생(生)과 불생(不生), '남과 나지 않음'의 짝이다. '남'을 부정한다면, '나지 않음'도 부정된다. 무(無)와 무불(無不), 요즘엔 '이중부정'이라고 부른다. 풀어 봐도 헷갈리는 말투, 모순의 말투이다. 그런데 영가는 이 구절을 '염(念)'의 짝으로 노래한다. '염(念)의 남과, 염(念)의 나지 않음'의 짝이다.

유정(有情)이 씨 뿌리니,

씨 뿌린 땅에 여름으로 돋아나네,


무정(無情)은 씨도 없으니,

성(性)도 없고, 생(生)도 없으리,


『육조단경』에 실린 노래, 육조혜능은 이 노래를 스승으로부터 받았다. 말하자면 이 노래가 영가의 뿌리이다. 무념과 무생의 뿌리이다. 유정(有情)은 중생의 다른 이름이다. 사트바(Sattva)란 말을, 중생이라고도 새기고, 유정이라고도 새긴다. 살아 있는 것과 정(情)을 가진 것, 같은 말로 다룬다. 육조는 정(情)을 씨앗으로 읽는다. 영가는 정(情)을 염(念)으로 읽는다. 육조와 영가의 말투, 성(性)과 생(生)의 말투도 유정(有情)에 걸렸다. 말하자면 기관목인의 가잘빔은 무정의 가잘빔이다. 다시 말해, 육조와 영가의 무생은 유정의 씨앗이다. 무념도 무생도 유정의 염(念)이다. 유정을 알게코자 하는, '유정을 향한' 말대가리이다. '정(情)을 가진 것', 정(情)의 성(性)과 정(情)의 생(生)을 타고 가리는 말투이다. 그 씨앗의 성(性)은 비었고, 그래서 생(生)도 없다. 이건 '브터니닷'과 '브터나닷'의 말투이다. '붙어 인 것'은 '빈 것'이다. '붙어 난 것'의 남은 '남 없음'이다.

둘째 구(句)는 생(生)이 곧 무생(無生)이라.

한 것도 없다 함은 무생(無生)도 또 없을시니,

생(生)과 무생(無生)이 다르지 않은 뜻이라.


없음과 않음'의 짝, 말을 걸긴 했지만, 더 헷갈릴 것도 같다. 그래서 그런지 남명은 생생(生生)과 무생(無生)의 짝으로 노래한다. 언해불전의 풀이는 짧다. 바로 '생(生)이 곧 무생(無生)'이라고 한다. 이게 말이 되나? 그래도 헷갈릴까, '생(生)과 무생(無生)이 다르지 않은 뜻', 한 마디 덧붙인다. 이건 더 헷갈린다. 이런 게 모순의 말투이다. 짝의 양 끝, 창과 방패의 양 끝, 끝을 반성하게 하는, 그래서 알게코자 하는 말투이다. 짧지만 번득한 언해의 말투, 나는 '툭 던지는 말투'라고 부른다. 남명의 노래, 영가의 노래를 풀어 부른다지만, 말을 비비고 버믄다. 툭 던지는 말투는 남명의 노래를 겨냥한다. 구태여 비비고 버믈 것 없잖아?

굴러 횟도는 죽살이의 바랄에서, 나고자 할진대는

모로매 북두(北斗)를 좇아 남성(南星)을 바랄지어다


불생(不生) 없는 끠, 한 것도 없으니

무생(無生)을 알고저 할진대, 만법(萬法)이 이라


'할진대', 남명의 말투이다. 남명의 조건이다. 남명은 무생과 만법의 짝으로 노래한다. 육조의 생(生)이 유정의 씨앗이었다면, 남명의 생(生)은 법의 씨앗이다. 물론 이 법은 유정이 지어낸 유정의 씨앗이고 유정의 여름이다. 죽살이가 있기 때문에 벗어남도 있다. 만법이 있기 때문에 무생도 있다. 만법은 무생의 조건이다. 작대의 말투이다. 나고자 할진대, 죽살이의 짝에서 벗어남을 바라본다. 죽살이가 괴롭기 때문이다. 무생을 알고자 할진대, 만법의 짝에서 무생을 바라본다. 짝의 조건에서 나온 말이다. 죽살이와 만법의 반대편에 열반과 무생이 있다.

욕지단적의(欲知端的意)인댄,

북두(北斗)를 면남간(面南看)하라.


단적한 뜻을 알고자 할진댄,

북두를, 남녘 돌아 보라.

『금강경삼가해』 야보의 노래이다. 여기에도 '할진댄'이 있다. 이 것도 유정의 염(念)이다. '할진댄'이 조건이다. 단단적적(端端的的), 선사들이 즐겨 쓰는 말이다. 언해도 구태여 새기지 않는다. '바르고 옹근 진실'을 가리키는 말이다. 번득하고 훤한 진실의 모습이다. 번득하고 훤하게 알고자 한다면, 남명은 종(從)이란 글자를 쓴다. 언해는 '좇아 바랄지어다'고 새긴다. 야보는 면(面)이란 글자를 쓴다. 언해는 '돌아 보라'라고 새긴다. '좇아'와 '돌아', 느낌은 다르다. 아무튼 그러고자 할진댄, 짝의 말투, 반대편의 짝을 돌아 보라고 한다. 모순의 말투, 창을 보려면 방패를 보라고 한다. 방패를 보려면 창을 보아야 한다. 대(對)가 되고 대(對)를 긋고, 작대(作對)와 절대(絶對)의 말투이다. '돌아 보라', 보는 방향을 바꿔야 한다.

손이 오거든 모로매 보리니,

놓아 보내지 마라.

뒤를 좇아 곧 칠지니라.


하다가 한갓 집에 앉아 있으면,

곧 길 가운데 일을 궐(闕)하고,


한갓 길 가운데 여 있으면,

곧 집 속의 일이 허소(虛疏)하리니,


모로매 집에 있어,

길 가운데 일을 잊어 버리지 아니하며,


길 가운데 있어,

집 속의 일을 어즐하지 아니하야사 옳으리니,


집 속의 일과, 길 가운데 일을,

한 길에 함께 행할지니,


상녜 길 가운데 있어,

집 속의 일을 어즐함이 가련토다.


『금강경삼가해』, 맨 위의 구절은 야보의 말투이다. 그 아래에 함허가 토를 달았다. 참 친절하기도 하다. 친절한 풀이가 길게 이어진다. 늙은 할매의 심정이려니, 그래도 이런 풀이, 쉽지 못한 말투이다. 야보는 주객(主客), 님자와 손의 짝으로 이른다. 손이 오면 손을 보라고 한다. 뒤를 좇아 뒤통수를 치라고 한다. 웃기는 말투, 함허는 '길 가운데 일'과 '집 속의 일'로 나누어 풀이한다. 도중사(途中事)와 가리사(家裏事), 이것도 선사들이 즐겨 쓰는 짝이다. 일향(一向)이란 말, 언해는 '한갓'이라고 새긴다. 때로는 '한결같이'라고 새기기도 한다. 두 짝의 한 방향이다. 하나의 짝만을 바라보는 일이다. 나란히 가는 짝, 한 짝만을 한갓 바라보면 가련하다. 그래서 돌아 보라고 한다. 방향을 바꾸라고 한다. 짝의 말투, 모순의 말투는 바라 보는 방향에 달렸다. 돌아 보라, 뒤통수를 쳐라, 나는 이런 말투를 '향대(向對)의 말투'라고 부른다.

언해의 툭 던지는 말투, 거기에도 뿌리가 있다. 뜻이 있다. 훤하고 번득한 일, 속절없이 비비고 버믈지 마라. 나는 툭 던지는 말투가 좋다. 좋다는 걸 나토다 보니, 이렇게 또 말이 늘어졌다. 툭 던지는 말투에도 긴 이야기가 깔려 있기 때문이다. 작대의 말투, 향대의 말투, 그리고 절대의 말투, 말의 짝을 다루는 요령이다. 툭 던지는 까닭, 말투를 알면 훤하고 번득하다. 손님이 오면 손님을 봐야 한다. 주인도 길을 나서면 손님이 된다. 손님이 손님 좇아 손님을 쳐라. 뒤통수를 때려라. 손님도 집으로 돌아가면 주인이다. 주인과 손님의 말대가리, 한갓 보지 말고 돌아 보라, 향대의 말투이다. 주인 아닌 손님이 없고, 손님 아닌 주인도 없다. '한 길에 함께 행할지니', 가련함을 벗어나는 요령이다.

증도가, 그대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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