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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과 함께 읽는/道를 證한 노래는

006_03 개돼지의 아롬

증도가 현각의 노래

개구니저각공지(疥狗泥猪却共知),

삼세여래증불회(三世如來曾不會)


도랑먹은 가히와 흙 묻은 돝은, 도리어 다 알어늘,

삼세여래(三世如來)는 곧, 아지 못하시니라


이것은 남명법천의 노래이다. 도랑먹은 개와 흙 묻은 돼지, 도랑이는 옴벌레이다. 도랑이가 살을 먹어 들면 살이 문드러진다. 땀구멍이 부족한 돼지는 진흙에 뒹굴러 더위를 식힌다. 고름과 진흙으로 떡이 된 개돼지, '사오나운 양자’라는 설명이 달려 있다. 사오납다, 뭔가 모자라 더럽고, 어리석고, 낮고, 그런 게 다 '사오나운 양자'이다. 그런 모습, 요즘에 '꼴사납다'고 한다. 언해불전엔 '골업다'고 한다. '예쁘다-밉다'의 짝, 언해불전은 '읻다-골업다’란 말을 쓴다. 사오납고 골없는 개돼지, 문득 '삼세의 여래'를 마주 세운다. 한술 더 떠서 개돼지는 다 알어늘, 삼세의 여래는 도리어 알지 못한다고 한다. 이것도 아주 오래된 노래, 평창(評唱)의 전통이다.

◎『선문염송』, 남전보원(南泉普願, 748-835)


삼세제불부지유(三世諸佛不知有),

이노백고각지유(狸奴白牯却知有)


삼세의 부처는, 유(有)를 모르시거늘

괭이와 힌 소는, 도리어 유(有)를 아네


◎『증도가사실』, 대혜종고(大慧 宗杲, 1089-1163)


삼세여래부지유(三世如來不知有)

노노대대외변주(老老大大外邊走)

이노백고각지유(狸奴白牯卻知有)

파파설설능자수(跛跛挈挈能自守)


삼세의 여래는, 유(有)를 알지 못하시니

왕 늙은이는, 밖으로 달리누나

괭이와 힌 암소는, 도리어 유(有)를 알아

절룩절룩 허겁지겁, 자기를 지키네


◎『 굉지선사광록(宏智禪師廣錄)』, 천동굉지(天童宏智, 1091-1157)


삼세제불부지유(三世諸佛不知有)

도도달달양가추(忉忉怛怛揚家醜)

이노백고각지유(狸奴白牯却知有)

파파설설능자수(跛跛挈挈能自守)


삼세의 여래는, 유(有)를 알지 못하여

시름하여 브즐우즐, 집안의 더러움을 들날리는데

괭이와 힌 암소는, 도리어 유(有)를 알아

절룩절룩 허겁지겁, 자기를 지키네


이 노래의 시작은 남전보원(南泉普願)의 노래이다. 부처는 모르고, 고양이와 소는 안다고 한다. 이로부터 그지없는 평창이 이어진다. 언뜻 보면 비슷한 노래들, 세종의 언해는 천동굉지(天童宏智)의 노래를 고르고 가렸다. 이것도 뜻 밖이다. 『증도가사실』에 실린 대혜종고(大慧 宗杲)의 노래, 여느 편집자였다면 그걸 그대로 따라 새겼을 것이다. 세종이 고른 것은 '도도달달양가추(忉忉怛怛揚家醜)'란 구절이었다. 언해불전은 '선택'을 '가리다'라고 새긴다. 평창(評唱)이란 말, 따지고 보면 '가려 부름'이다. 스승의 노래를 제 투로 가려 부른다. 가려 부르면 제 노래가 된다. 그 노래에 이름을 끼워 준다. 세종의 가림, 그래서 나는 세종의 언해를 '세종의 노래'라고 부른다. 세종의 가려 부름, 세종의 뜻이 담겼다.

개돼지는 알고, 부처는 모르고, '알다', 말하자면 '아롬'의 뒤집기이다. 부처는 '아는 이'이다. 이 노래만 보더라도 지(知), 요(了), 회(會), 모두 '알다'로 새긴다. 언해불전은 부처의 불(佛)이나 각(覺)도 '알다'로 새긴다. 이 노래는 '아롬의 노래'이다. 그런데, '부처는 알지 못한다'고 한다. 평창이 이어지면서, 고양이와 암소는 개돼지로 변주된다. 도랑먹고 흙 묻고, 사오나온 양자도 과장이 심해진다. '알고-모르고'의 짝을 분명하게 드러내고 싶기 때문이다. '부처는 알고, 개돼지는 모르고', 뻔한 상식을 확 뒤집고 싶기 때문이다.

곡도로 된 몸과 법으로 된 몸, 안과 밖이 없다고 한다. 언해는 '아롬'을 지(智)와 경(境)의 짝으로 읽는다. 지(智)는 내 몸 안의 일이다. 경(境)은 내 몸 밖의 일이다. 곡도의 몸으로도 경(境)을 대하고, 경(境)을 안다. 개돼지의 몸으로도 알아서 제 몸을 지킨다. 언해는 '지(智)가 경(境)에 어울어 법이 다 몸이 된다'고 한다. '지(智)가 경(境)에 어울어', 이게 바로 '알다'이다. '알다'라는 동사가 '몸이 된' 것이 법신이다. 요즘의 말로는 '아롬이 체화, 또는 육화'한 것이다. 언해의 말투를 따르자면 '아롬이 몸이 된' 것이다. 곡도로 된 몸의 아롬과, 법으로 된 몸의 아롬, 그 차이는 뭘까? 이 노래는 이런 걸 묻는다. 곡도의 몸도 법의 몸도 '된 몸'이다. '된 몸'의 차이이다. '된 몸'은 '새로 인 몸'이다. 그래서 본래의 낯과 눈, 본래의 몸을 보라고 한다. 안과 밖이 없다는 말은, 문이 열려 안과 밖이 통했다는 말이다. 안과 밖의 다름이 없다는 말이다. 개돼지의 몸도, 부처의 몸도 '된 몸'이다. '된 몸'을 잊으라고 한다. 그 노래를 그지없이 이어 부른다.

'안과 밖이 없음을 마게옴이라', '마게오다'는 또 다른 증(證)이다. 맞추어 확인하고 증명한다는 말이다. '된 몸'과 '본래의 몸'을 증명한다. 곡도로 된 몸과 법으로 된 몸에 안과 밖이 없다는 것을 마게온다. 문이 열리면 곡도로 된 몸이 법으로 된 몸이 된다. 다름이 없다. 개돼지도 알 수 있고, 고양이와 암소도 알 수 있다. 그 일을 거듭 맞추어 확인하고 증명한다. 그걸 보라고 한다.

증도가, 그대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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