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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인천강, 평등과 자유의 열쇠/월인천강 사용법

7.5 잡꽃의 위엄


뫼햇 꽃이 비단같고, 물은 쪽 같아


섞어 녹아 차별 없으며, 훤하여 다 머금어 기튬없도다


불교에 『화엄경(華嚴經)』이란 경전이 있다. 화엄(華嚴)은 꽃의 위엄, 또는 장엄이란 말이다. 『화엄경』을 『잡화경(雜華經)』이라 부르기도 한다. 잡꽃의 위엄, 잡꽃의 장엄이다.

싁싁하다[옛말]

엄숙하다. 장엄하다.


잡(雜)이란 글자는 ‘섞다’는 뜻이다. 잡꽃은 섞인 꽃이다. 장엄은 ‘싁싁하다’라고 새긴다. 이에 비해 위엄(威嚴)은 ‘저프고 싁싁하다’라고 새긴다. 저픔은 두려움이다. 싁싁한 것을 보면 마음 한쪽에 저픔이 인다. 상상을 해 보자. 이제 곧 봄이다. 높은 산을 올랐다고 하자. 나무 숲이 미치지 못할 만큼 높은 산, 등성을 따라 온통 꽃이 활짝 피었다. 그런 게 잡꽃이다. 그 사이로 쪽빛 물이 흐른다. 그럴 때의 느낌이 위엄(威嚴)이다. 저프고 싁싁하다. 잡꽃의 저프고 싁싁함이다.

혼융(混融)을 ‘섞어 녹아’라고 새겼다. 크고 작은 잡꽃이 섞어 녹았다. 하나의 모습으로 내 눈을 가득 채운다. 잡꽃이 섞어 녹아 내 눈을 채운다. 섞어 녹으니 차별이 없다. 그대로 훤하다. 유(遺)를 ‘기티다’라고 새겼다. ‘끼치다’의 옛말이다. 뭔가를 남겨두고 남겨주는 일이다. 한가지로 섞어 녹으니 단 하나도 기튬이 없다. 빠뜨림도 없고 남김도 없다. 내 눈에 가득히 섞어 녹은 모습을 저렇게 노래했다. 저프고 싁싁하다.

닐온 밧 평등(平等)은 어찌 이 뫼를 평평하게 하고 못을 메우는 것이랴. 

학을 베어 오리를 이은 뒤에야 그러 하리오? 

알온 것이란 그 알옴을 므던히 여기고, 뎌른 것이란 그 뎔옴을 므던히 여기고, 

높은 땅이란 높음을 므던히 여기고, 낫가온 땅이란 낫가옴을 므던히 여길지니라.


‘알오다’는 ‘길다’, '뎌르다'는 '짧다'의 옛말이다. 학과 오리, 『장자(莊子)』의 이야기에서 따온 말이다. 절학속부(截鶴續鳬), 이 것도 이른바 사자성어이다. 이걸 그대로 ‘학을 베어 오리를 잇다’라고 새겼다. 학은 길다. 오리는 짧다. 긴 것을 베어, 짧은 것에 잇는다. '그래야 평등하다'고 여기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고 한다. 학은 학대로 오리는 오리대로 섞고 녹는다. 서로 붙는다. 서로 간섭한다. 길면 긴 대로 짧으면 짧은 대로 무던히 여기란다. 이런 것이 이 세계의 평등이란다. 잡꽃의 세계, 잡꽃의 평등이다. 학은 학대로 오리는 오리대로 제 스스로 두렷하다. 긴 건 긴 대로, 짧은 것은 짧은 대로 원만(圓滿)하고 완전(完全)하다. 스스로 자유롭고 스스로 평등하다. 잡꽃 하나하나가 님자이다. 님자로 세계에 간섭하고, 손님으로 님자들의 세계에 들어 간다. 하나하나 두렷한 님자와 두렷한 손님으로 붙어 산다. 하나하나가 한가지로 저프고 싁싁하다. 누구라도 베고자 하고 잇고자 한다면 카냥이 된다. 그러다 잡꽃을 앗아가고 망쳐버린다. 카냥이 도적의 꾀가 되고 도적이 된다. 자연의 일, 무던히 여기란다. 구태여 끼어들지 말라는 말이다. 사람의 일, 까딱하면 카냥과 도적이 된다. 남의 평등과 자유를 앗아간다. 그래서 부르는 노래이다.

남한산성이란 영화가 대박을 쳤단다. 내로라 하는 지도자들이 그 영화를 봤단다. 조선 정치인들의 이름도 떠돌았다. 대한민국의 지도자들이 조선의 지도자들을 가리고 따졌다. 이런 저런 소식을 들으며 편하질 않았다. 남한산성은 유네스코가 정한 세계유산이다. 유산을 지정하는 유네스코의 위원회는 남한산성을 하나의 도시로 다룬다. 승군이 짓고 살았다고 한다. 성 안에 다양한 형태의 군사, 민간, 종교, 건축의 증거들이 남아 있다고도 한다. 그리고 남한산성은 그대로 ‘한국 주권의 상징이 되었다’고 한다. 어찌 보면 우리 역사에서 가장 슬프고 아팠던 공간과 시간, 그들은 그 자리에서 이 나라의 주권을 보았다. 천 쪽이나 되는 그들의 보고서를 읽으며 오히려 유네스코의 가치를 읽었다. 고마웠다.

병자년(인조 14년, 1636), 지리산에 계실 적에 임금의 행차가 남한산성으로 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곧 북을 쳐 대중을 불러 눈물로 호소했다. 

‘우리도 임금의 백성이다. 우리는 백성을 고루 구제하는 일을 읏듬으로 삼는다. 나라의 일이 급하게 되었으니, 어찌 차마 앉아서 볼 수 있겠는가?'


곧 군복을 갈아 입고 남쪽의 중들을 불러 모으니, 수천 명이 달려 왔다. 서로 이끌어 북으로 가는 길에 적이 물러 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통곡하며 남으로 돌아왔다.


지리산 화엄사 벽암(碧巖 1575-1660)의 비문에 적힌 글이다. 승군을 이끌고 남한산성을 3년 만에 완성했다는 스님이다. 남한산성에 살다가 유생들의 반대로 지리산으로 내려가 적상산성을 쌓고 지켰다고 한다. 그는 한국 선불교를 대표하는 선승의 한 분이지만, 임진왜란 이후로 승군과 산성의 상징이 되었다.

사불망(思不妄) 사랑에 거츨지 않고

면불괴(面不愧) 낯에 부끄럽지 않고

요불굴(腰不屈) 허리를 굽히지 않는다


저 비문에 이 아홉 글자가 새겨져 있다. 이 아홉 글자가 승군을 이끌던 군기(軍紀)였다고 한다. 거츤 사랑은 거짓 사랑이다. 저 자신을 속이지 말라는 뜻이다. 군기치고는 희한한 군기겠다. 이런 승군 수백 수천이 남한산성에 살았다고 한다. 수백의 승군이 살았다는 절에 가보면 딸랑 몇 십 평, 집 한채뿐이다. 저런 곳에서 어찌 살았을까? 상상이 가질 않는다. 남한산성은 과연 슬픈 공간이다. 상상하기도 힘든 기이하고 괴이한 공간이다. 승군이라지만, 전쟁이 아니었다면 이들은 군인도 될 수 없었던 사람들이었다. 조선에서 가장 낮고 가장 천한 사람들이었다. 사람은커녕, 백성은커녕, 말 그대로 개돼지였다. 말 그대로 ‘한 입도 많다 애태우던’ 이들이었다. 그들이 그런 곳에서 성을 쌓고 지켰다. 난리가 잦아들자 조선의 지도자들은 그 곳에서도 그들을 내쫓았다. 개돼지들이 나라를 지키는 것도 싫었고, 밥을 주는 것도 아까웠다. 그리고는 아예 잊어 버렸다. 이건 상상이 아니다. 이런 걸 역사라고 부른다. 다들 잊었어도 역사는 역사다.

나는 저 아홉 글자에 감동했다. 말하자면 잡꽃의 위엄, 저픔과 싁싁함이겠다. 이것도 기이하달까, 슬프고 부끄러웠다. 미안했다. 이 나라에서 잡꽃으로 산다는 게 이런 것인가? ‘중도 사람이다.’ 세종이 한신 말씀, 그들도 사람이고 백성이었다. 그들은 누군가 북을 치면 달려 왔다. 그들의 사랑, 그들의 낯, 그들의 허리를 다시 나라에 바쳤다. 유네스코의 사람들은 그들의 속을 알았을까? 그래서 남한산성에서 대한민국의 주권을 본 것일까? 그 주권은 제 나라를 지키려 했던 개돼지들의 주권이었을까? 오만 생각이 들었다. 이런 게 잡꽃의 저픔이고 싁싁함이라면, 누군가 짓밟은 저픔이다. 누군가 져버린 싁싁함이다. 짓밟히고 배반당한 잡꽃, 그런 것도 저프고 싁싁할까?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이게 나라냐? 누가 북을 치지도 않았다. 그래도 사람들이 다시 광장에 모이기 시작했다. 촛불 사이로 저 노래도 들렸다. 거기에도 잡꽃의 위엄이 있었다. 저픔과 싁싁함이 있었다. 아홉 글자도 다시 떠올랐다. 민주공화국, 개돼지도, 학이나 오리도, 길면 긴 대로 짧으면 짧은 대로 ‘누구나 한 표’, 참 다행이란 생각도 들었다. 그래도 짓밟고 배반하는 도적은 있다. 하염없이 도적의 꾀를 쓴다. 길면 베고, 짧으면 이으려고 든다. 높은 데는 까부수고, 낮은 데는 메우려 든다. 꾀를 부려 카냥한다. 그리고는 천 개의 입, 억만 개의 입을 독점하고 세습하려 한다. 거듭 잡꽃을 져버리고 밟으려 든다. 독점도 농단도 쥬변이다. 잡꽃의 제쥬변을 빼앗아 자기만의 쥬변으로 삼는다. 저 노래로, 또는 고작 저 아홉 글자로 도적의 꾀를 당할 수 있을까? 달그르메의 노래는 또 어떨까? 그래서 그냥 미안했다. 불편했다.

섞어 녹아 차별 없으며, 훤하여 다 머금어 기튬없도다


나는 그 때도 언해불전의 옛말을 헤집고 있었다. 이토록 쉬운 말도 있었는데 뭐 하러 어렵게 헤매고 다녔을까? 언해불전에 담긴 옛말들, 세종대왕이 기틴 우리말이고 우리 글이다. 말겿 하나, 입겿 하나도 비단같고 쪽같다. 한가지로 빛나는 잡꽃이다. 영어도 배우고 중국어도 배우고, 스펙을 갖춰야 취직도 하고 출세도 한다. 어진이는 쉽고, 어린이는 어렵다. 어진이가 쉽게 입을 늘려 가는 만큼, 어린이는 입 하나 채울 길도 점점 막막해진다. 우리가 사는 세계가 이렇다.

싁싁한 우리말, 우리 글, 이거야 돈이 들 것도 없다. 태어나면서부터 누구나 배우고 익히는 우리말, 이거야 말로 자유와 평등의 바탕이 아닐까? 누구나 쉬운 우리말로 사랑하고 소통할 수 있다면, 누구나 그만큼 싸고 쉽게 자유롭고 평등할 수 있지 않을까? '어린 백성을 편안하게 하겠다', 세종이 기틴 말, 그가 기틴 우리 글자, 말 한마디, 글 한 조각, 하나하나가 저프고 싁싁하다. 어린 잡꽃을 섞어 녹아 저프고 싁싁하게 한다. 그래도 세종조차 배반당했다. 기이한 세계, 나의 싁싁함, 우리의 저픔, 어찌 지킬까?

잡꽃들의 한가지 제쥬변, 그래도 이게 빛이다. 이건 내 깜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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