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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인천강, 평등과 자유의 열쇠/월인천강 사용법

7.3 월인천강 사용법




이는 목숨을 그칠 칼이며 차별의 지혜를 열 열쇠라

약(鑰)은 엸쇠라

건(鍵)은

열쇠와 자물쇠, 이 또한 오래된 말이다. 관건(關鍵)이란 말이 있다. 관(關)은 문이다. 건(鍵)은 문에 걸린 자물쇠이고, 약(鑰)은 열쇠이다. 문의 비유, 가잘빔이다. 열쇠와 자물쇠의 가잘빔도 오래 됐다. 요즘에는 키워드(keyword)란 말을 쓴다. ‘열쇠말’이라고 풀어쓴다. 언해불전의 말투도 비슷하다. '월인천강', 또는 '달그르메', 이 말도 열쇠이다. 열쇠말이다. 자물쇠를 풀고 문을 열어 준다. 군대에 가면 '암구호'란 말을 쓴다. '패스워드'란 말도 있다. 어린 백성을 편안하게 하기 위해 글자를 만들었다는 세종, 왜 그랬을까? 이게 늘 궁금했다. 월인천강, 내게 이 말은 언제나 ‘달그르메’였다. 궁금함으로 돌아가는 패스워드였다.

성스러운 덕이 높고 커, 뭐라 부를 말이 없었다. 다들 해동의 요순(堯舜)이라 높여 불렀다. 늦은 나이에 비록 부처의 일을 들어 말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한 자루 향으로도 부처에게 예를 올린 적은 없었다. 마침과 처음이 늘 발랐다.


세종의 마침, 세종실록의 마침은 이러했다. 불사(佛事), 부처의 일을 탓하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한다. 월인천강, 달그르메, 이런 말도 다 부처의 일이다. 세종에게 부처의 일은 어떤 뜻이었을까? 실록에는 예불(禮佛)이란 말을 쓴다. 부처에게 예를 올리는 일이다. 이런 말은 세종의 평가(平價)하는 말이다. 세종에게 값을 매기는 일이다. ‘범의 갓과 양의 얼굴, 얼마나 하뇨’, 세종의 얼굴대가리는 얼마나 갈까? 임금의 불사, 조선에서 이런 일은 흠(欠)이다. 부족한 일이고, 모자란 점이다. 만년(晩年), 늦은 나이의 흠을 탓하기도 했단다. 하지만 아니란다. 사관의 눈이 그랬다. 세종의 처음과 마침, 바를 정(正), 이건 무슨 뜻일까? 사관이 내린 값은 얼마였을까? 아직도 궁금하다.

이런 일에도 패스워드가 필요하다. 예불은 부처를 향하는 일이다. 홉스의 작은 사람들은 리바이어던을 향한다. 그 낯을 바라본다. 하지만 월인천강, 달그르메의 노래는, 기이할셔, 중생을 향한다. 어린 백성의 한가지 제쥬변을 바라본다. 어린 백성에게도 ‘너도 할 수 있어’, 제쥬변을 바라보라고 한다. 세종도 어린 백성을 바라본다. 예불과는 보는 방향이 다르다.

해동 육룡이 나라샤

일마다 천복(天福)이시니

고성(古聖)이 동부(同符)하시니


‘용비어천(龍飛御天)’은 『주역』에서 따온 말이다. 『조선왕조실록』은 혁명이란 말에서부터 시작한다. 조선의 혁명이다. 저 노래는 혁명의 노래이다. 혁명을 변혁(變革)이라 풀어 주기도 한다. 조선혁명은 하늘의 복이고 성인의 뜻이다. 세종은 조선이란 나라, 나라를 세운 아비와 할아비를 혁명의 눈으로 값을 매긴다. 하늘과 성인을 바라본다. 월인천강은 『금강경』의 주석서에서 따온 말이다. 어린 백성을 바라본다.

지극한 이치의 한 말이 범(凡)을 고쳐 성(聖)을 이루리라


이건 월인천강으로부터 이어지는 말이다. 혁(革)을 ‘고치다’라고 새긴다. 혁명은 하늘의 명령을 고치는 일이다. ‘고치다’, 나는 이런 말이 좋다. 혁명이란 말도 너무 무겁다. 무거운 말에는 갖가지 뜻과 풀이, 이야기들이 달려 다닌다. ‘고치다’는 가볍다. 번득하다. 달려 다닐 게 별로 없다. 까탈스럽게 따질 일도 없다. 이런 말을 쓰면 그래서 편하다. 범(凡)을 고쳐 성(聖)을 이룬다. 중생을 고쳐 부처가 된다. 어린이를 고쳐 어진이로 세운다. 이것도 혁명이다. 나라도 고치고 백성도 고친다. 나라도 세우고 백성도 세운다. 이래야 짝이 맞는다. 『용비어천가』가 혁명의 노래라면 『월인천강지곡』도 혁명의 노래다. 나라를 고치는 일이 처음이라면, 백성을 고치는 일은 마침이 된다. 이게 참 묘하다.

어차피 다 평등할 수는 없기 때문에, 현실을 인정해야 한다.


이런 말을 들으면 나는 얼른 ‘달그르메’, 세종의 열쇠말, 나의 패스워드를 중얼거린다. 내가 사는 세계가 헷갈리기 때문이다. 이게 꿈이라면 얼른 깨야지. 말하자면 잠을 깨워주는 패스워드이다. 홀리는 주문이 아니라, 깨우는 주문이다. 세종의 월인천강이 나온지도 근 육백년이 흘렀다. 세종은 고치자고 했다. 고치려고 했다. 고치는 일, 육백년 세월에 온갖 일이 있었다. 혁명도 있었고 전쟁도 있었다. 그 결과가 현실의 민주주의이다. 현실의 모든 물건, 세월이 흐르면 낡게 마련이다. 집도 낡고, 옷도 낡고, 몸도 낡는다. 낡는 물건 고쳐 가며 써야 한다. 자본주의 세계, 고쳐 쓰기 어렵다면 버리고 새로 살 수도 있다. 이것도 고침이다. 혁명도 낡고 민주주의도 낡는다. 자유도 낡고 평등도 낡는다. 돈도 낡고 자본도 낡는다. 고침도 현실이다. 뭘 인정하란 것일까?

월인천강은 본래 뒷논 한가지 제쥬변을 가리킨다. 본래평등, 본래자유를 바라 보라고 한다. 그 쪽을 향해 나아 걸으라고 한다. 손잡고 함께 가자고 한다. 우리가 함께 사는 세계, 그냥 웃으며 고쳐 가자고 한다. 나의 세계, 뭔가 낡았다고 느꼈다면, 뭔가 고쳐야 한다고 느낀다면, 그래서 불편하다면 그 때가 바로 월인천강, 달그르메의 패스워드가 필요한 때이다. 달그르메는 한가지 제쥬변을 가리킨다. 어린 백성은 불편하다. 세종은 그렇게 느꼈다. 세종은 그냥 인정하지 않았다. 고쳐야 한다고 했다. 고치기 위해 애를 썼다. 고치지 말자는 사람들도 많았다. 타이르기도 하고 다투기도 했다. 화도 내고 으르기도 했다. 나중에는 그냥 모른척 했다. 그냥 알게 모르게 할 일을 했다. 그런 사이에 훈민정음도 나왔다. 사전도 번역하고 유교 불교의 책도 번역했다. 그런 사이에 예불이란 값도 매겨졌다. 끝내 난리가 났다. 피바람이 불었다. 궁금하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다. 달그르메는 미안함으로 가는 패스워드이기도 하다. 이건 세종의 고침으로 가는 열쇠이다.

편안하게 하고저 할 뿐이다


월인천강은 훈민정음도 가리킨다. 세종의 고침, 그는 말과 글을 골랐다. 말과 글을 고치고자 했다. 먼저 글자를 만들었다. 그사이 사전도 번역하고 경전도 번역했다. 법률과 의술, 어린 백성에게 당장 필요한 것들부터 고쳐 나가고자 했다. 그가 고친 일, 어디 말과 글뿐일까? 그래도 세종이 세종인 까닭, 과연 훈민정음이다. 고친 글자로 고치려고 했던 일들, 이런 일은 정말 희유하다. 쉽지 못하다. 15세기는 인류의 역사에서도 희유한 때이다. 서양에서는 이 때로부터 르네상스를 비롯하여 종교개혁 산업혁명, 온갖 고침의 일들이 들불처럼 퍼졌다. 15세기의 세종, 만일 그가 제 일, 제 생각을 스스로 적어서 남겨 놓았다면 한 민족의, 한 나라의 위대한 임금을 넘어, 위대한 사상가, 위대한 혁명가로 값이 매겨지지 않았을까? 부질없고 속절없다. 21세기에도 고쳐야 할 일은 있다. 내게 월인천강은 세종을 가리키는 열쇠이고 패스워드이다. 세종이 가리킨 한가지 제쥬변, 거기서 시작하면 길이 보인다.

어차피 평등할 수 없다는 말, 언해불전의 말투를 따르자면, 이런 소리는 도적의 말이다. 도적의 꾀이다. 거짓의 꾀를 짜 사람을 속인다. 나의 세계를 간섭하고 착취한다. 월인천강은 도적의 꾀를 가려내는 열쇠이다. 도적과 도적의 꾀를 열어 드러내 준다. 도적의 꾀가 드러나면 월인천강은 도적을 막는 문이 된다. 자물쇠가 된다. 거짓의 세계를 풀어 준다. 월인천강은 말하자면 도적 감별법이다. 도적의 꾀는 언제나 어디에나 있다. 우리의 세계이다. 나의 갖나맟, 나의 대가리 속에도 도적의 꾀로 가득하다. 내 대가리 안에 심어 둔 도적의 꾀이다. 도적의 꾀가 끈이 되고 사슬이 된다. 누군가 내 몸을 쥐고 놓는다. 나의 쥬변은 그의 쥬변이 된다. 도적의 꾀, 도적의 말이 나를 조종한다. 뭔가 의심스럽다면 월인천강, 또는 달그르메, 세종의 말을 떠올리면 된다. 여기서부터 다시 시작하면 된다.

다섯이 문이 되고 하나가 중매되어


도적이 드나드는 문, 여기에 세 개의 겹이 있다. 첫째 겹은 얼굴과 그르메의 겹이다. 얼굴을 가진 달이 몸의 뿌리에 그르메로 어린다. 우리의 세계, 우리 모두는 뿌리를 갖고 있다. 우리 몸에 본래 갖춘 것, 내 몸의 뿌리가 나의 자유와 평등의 닷이고 까닭이다. 나의 몸, 내 몸의 뿌리 밖에는 나외야 아무 것도 없다. 나의 뿌리에 어리는 그르메, 얼굴과 그르메 사이에 도적의 꾀가 끼어 든다. 그사이에 한가지 제쥬변을 앗아간다.

안의 드틀을 들이켜 가져, 보며 드롬이 류(流)가 못미칠 땅에 역류(逆流)함을 일러 아는 성(性)이라한다.

법(法)을 안의 드틀이라 이른다. 곧 과거 제법(諸法)의 그르메 상(像)이 이것이다.


브즐우즐하여 명상(名相)에 다니며, 지말(枝末)에 다니면 큰 도(道)의 오아롬을 알지 못하릴새


둘째 겹은 법과 이름의 겹이다. 의근(意根)이 안의 드틀을 가지고 도적의 꾀를 쓴다. 뜻의 뿌리는 밖의 드틀을 벗어나 안의 드틀을 향한다. 안의 드틀에 버믄다. 안의 드틀에 구태여 붙고, 구태여 이름을 낀다. 뿌리가 거꾸로 흐른다. 사랑할 수 없는 것을 사랑하고, 이름할 수 없는 것을 이름한다. 속절없고 부질없다. 이것은 곡도의 도적이다. 제가 지어낸 것에 제가 놀란다. 이름은 말의 시작이다. 내가 지어내기도 하지만, 세계로부터 배우기도 한다. 말은 거짓을 함께 짜 세계로 들어가는 길이다. 거짓의 세계를 내 몸으로 옮아 흘리는 길이다. 뿌리가 거꾸로 흐르면 말이 드틀이 되고 말이 도적이 된다. 내 몸을 얽어 매고, 내 세계를 얽어 맨다. 말의 세계 안에서 괴뢰가 된다. 곡도가 된다. 님자도 없는 말이 몸과 목숨을 잡고 놓는다.

물(物)의 목숨을 헐어 버려, 남에게 죽음을 받게 하고, 제 몸을 도와 족하게 하되 한갓 주리며 추움을 저코 죽는 괴로움을 보지 않으니, 남 죽여 제 몸 살림이 가장 서럽다.


주리며 추움을 나누어 가려 옷과 음식을 가장 구하되, 부끄럼이 없어 중생을 헐어버림이 슬퍼라. 부끄럼이 없는 이는 금수와 다름이 없다.


셋째 겹은 제 몸을 도우려고 남의 몸을 이용하고 착취한다. 남의 몸을 쥐어 짠다. 짜다 못해 목숨을 헐어 버린다. 남의 세계를 쥐어짜고 앗아버리는 세계의 도적이다. 이 도적은 제 몸의 두려움에서 시작한다. 주림과 추움이 두렵다. 도적질은 밥 한끼니, 옷 한벌에서 멈추지 않는다. 두려움은 크고 부끄럼은 없다. 그래서 천 개의 입을 가져도 족한 줄 모른다. 모자라다 여긴다. 모자란 것이 도리어 슬프고 부끄럽다. 남의 몸을 쥐어짜고 남의 목숨을 헐어서 빼앗은 것, 쌓아 두고 물려 준다. 남의 자유, 남의 평등을 빼앗아 거짓 세계를 지어낸다. 이런 도적, 이런 세계가 가장 슬프다. 가장 서럽다.

구우러 횟도는 죽사릿 바랄에

(벗어)나고저 할진댄 모로매, 북두(北斗)를 좇아 남성(南星)을 바랄지어다.


'그울다', 또는 '구을다'는 '구르다'의 옛말이다. 불교에 윤회(輪廻)란 말이 있다. 윤(輪)은 바퀴이다. 바퀴는 구른다. 구르려면 돌아야 한다. 그래서 윤회를 '구우러 횟돌아'라고 새긴다. 생사(生死), 살고 죽는 일이다. 불교는 중생의 세계를 '생사의 바다'라고 부른다. 이 말은 '죽사리의 바랄'이라고 새긴다. '죽사리', 이런 번역도 기막히다. 생사의 순서를 바꾸었다. 이래야 우리 입에 착 붙는다. 죽사리의 바다, 굴러 횟도는 세계, 이 세계를 벗어나고 싶다면 북두를 좇아 남성을 보라고 한다. 이 말도 기막히다. 북두는 북쪽의 하늘을 지키는 별이다. 움직이지 않는다. 남성은 남쪽을 하늘을 지킨다. 움직이지 않는다. 언해불전은 북두를 열반에 비긴다. 남성은 죽사리의 바랄에 비긴다. 열반은 벗어나는 일이다. 낡은 옷을 벗고, 매인 것을 푼다. 그리고 떠나 간다. 굴러 횟도는 삶, 벗어나라고 한다. 말하자면 열반은 불교의 목표이다. 진리이다. 그런데, 열반으로 가고자 한다면 열반으로부터 죽사리의 바다를 바라 보라고 한다. '모로매'는 '모름지기'의 옛말이다. 북쪽의 별을 보고자 한다면, 북두로부터 몸을 돌려 남쪽 별을 보라고 한다.

'북두를 바라건덴, 돌아서 남성을 보라', 언해불전에는 이 말이 여러 차례 나온다. 이런 말을 무슨 역설(逆說)처럼 푸는 사람들도 있다. '사람이 곧 하늘이다'라는 말이 있다. '밥이 곧 하늘이다'라는 말도 있다. 이런 말은 역설이 아니다. 빈말이 아니다. 사람을 떠나, 사람의 살혬을 떠나 하늘은 없다. 생사의 바다를 떠나 열반도 없다. 생사의 바다가 있기 때문에 열반도, 열반의 가르침도 나왔다. 그래서 열반으로 가고 싶거든, 죽사리의 바다를 바라 보라고 한다. 죽사리의 바다 속으로 들어 가라고 한다. 죽사리 바다 속에서 죽사리의 매듭을 풀고 벗으라고 한다. 평등의 하늘과 차별의 세계, 이런 말이 가르침이라면, 차별의 세계를 평등의 세계로 고치고 바꾸는 일이어야 한다. 하늘이 정해준 남북은 없다. 제가 서있는 자리, 제가 바라보는 방향에서 남북이 갈린다. 어디를 바라보건, 어디를 향해 가건 제쥬변이다. 제 가림, 제 선택이다.

월인천강은 그냥 한마디 말이 아니다. 본래 평등한데 평등하지 않은 까닭, 본래 자유인데 자유롭지 못한 까닭, 그런 일을 가리킨다. 평등하지 않은 현실을 고치는 길, 자유롭지 못한 현실을 바꾸는 일, 이런 길을 가리킨다. 도적의 꾀를 가리키고 도적을 가리킨다. 내 안의 도적도 가리키고, 비비고 버므는 몸 밖의 도적도 가리킨다. 사람만 해도 수십억이 함께 살아가는 지구, 우리의 세계, 도적의 이야기 한번에 다 할 수는 없다. 월인천강은 그래서 열쇠이고 패스워드가 된다. 도적을 느꼈을 때, 도적의 꾀를 느꼈을 때, 도적의 슬픔과 서러움을 느꼈을 때, 월인천강을 떠올리면 된다. 월인천강은 세종을 가리키고 세종의 고침을 가리킨다. 그 고침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슬픔과 서러움, 고쳐야 한다. 고칠 수 있다. 월인천강은 세종의 열쇠말이다. 고침의 열쇠이다. 월인천강, 달그르메, 이 말을 떠올리면 이 말은 나의 서러움을 고치기 시작하는 매직 스펠이 된다. 나를 고치는, 나의 세계를 고치는 마법의 패스워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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