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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인천강, 평등과 자유의 열쇠/평등

2.6 그르메 놀이


또 여덟 개의 거울을 허공에 엎어 달아,

단(壇) 가운데 놓은 거울과 방면을 서로 대하게 하여

‘얼굴의 그르메’로 겹겹이 서로 들게 하고


잠깐 눈을 감고 상상을 해 보자. 너른 마당이다. 가운데 높직이 단을 쌓았다. 동서남북 네 쪽, 그리고 그 사이의 네 쪽, 여덟 개의 커다란 거울로 팔방에 벽을 세웠다. 거울 앞에는 아름다운 조각과 온갖 꽃으로 치장을 했다. 거울 벽 위로는 다시 여덟 개의 거울로 천정을 메웠다. 위 아래 거울이 서로를 비춘다. 한 가운데 내가 서 있다.

언해불전에는 이런 상상도 있다. 말하자면 놀이동산, 거울의 방이다. 솔직히 여기저기 거울방에 들어가 봤지만, 이보다 실감나는 상상은 없었다. ‘얼굴의 그르메’라고 한다. 그르메가 ‘겹겹이 서로 들어 간다’고도 한다. 거울놀이랄까, 그르메 놀이랄까? 왜 이런 놀이, 이런 상상을 하지?

농영수지불이관(弄影須知不易觀)호리라

그르메 놀이린 수이 보디 몯함을 모로매 아로리라


그르메를 놀리는 이는 쉬 보지 못한다는 사실을 모름지기 알아야 한다.


농영(弄影), 그르메를 놀린다. 그르메를 가지고 논다. 빛과 그림자, 종이를 오려 빛 아래 놀리는 놀이도 농영이다. 저 거울놀이도 농영이다. 그르메를 놀린다. 요즘의 영화나 TV도 농영이다. 컴퓨터와 스마트폰에도 스크린이 있다. 스크린 위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이 다 농영이다. 농영은 연영(緣影)을 가잘빈다. 뿌리가 드틀에 버므는 일이다. 우리의 눈도 스크린이다. 눈에 어린 그르메, 그르메를 가지고 논다. 드틀의 그르메이다. 눈 뿐만이 아니다. 우리의 근(根)이 다 스크린이다. 빛의 그르메, 소리의 그르메, 혀에 어린 맛의 그르메, 살에 어린 느낌의 그르메…… 우리는 그런 그르메를 놀린다. 하염없이 그르메를 가지고 논다. 우리의 삶이 온통 그르메 놀이이다. 그르메 놀이는 우리 모두의 실존이다.

거울놀이나 그르메놀이, 이런 건 말하자면 시청각교육이다. 눈과 귀, 근(根)이라고 부른다. 뿌리이다. 뿌리에 그르메가 어린다. 뿌리가 스크린이다. 뿌리에 어린 그르메, 그르메를 놀리는 짓, 그걸 잘 보라는 뜻이다. ‘그르메 놀이린 쉬 보지 못한다. 거츨고 덜렁댄다. 구태여 붙들고 늘어진다. 그러는 사이, 그르메 놀이를 마음으로 삼는다. 마음이라고 구태여 이름을 세운다. 마음이 법이 되고 이름이 된다. 그러면 마음에도 얼굴이 생긴다. 얼굴을 가진 마음은 다시 뿌리가 된다. 마음이 스크린이 된다. 안의 드틀을 가지고 꿈 같고 곡도 같은 그르메를 놀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