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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과 함께 읽는/道를 證한 노래는

036_03 밤에 다닐 사람

증도가 현각의 노래

결정(決定)한 말을,


의심(疑心) 말지어다,

바로 알아도, 벌써 더디니라,

향엄(香嚴)은 그 날에, 무슨 일을 이루뇨,

대를 치고 속절없이 상상기(上上機)라 이르도다.


영가의 결정한 말, 남명은 의심 말라고 한다. 결정한 말이라니, 의심할 거 없겠지. 도인들의 노래라니, 믿을 만도 하겠지. 그런데 남명은 슬쩍 말문을 돌린다. '바로 알아도, 벌써 더디니라.' 의심많은 여우한테 할 소리는 아닌 것 같은데...... 따지고 보면 선사들의 흔한 말투겠다. 골라! 골라! 남대문 시장에 가면 그런 장사꾼들이 있었다. 나는 선사들의 말투를 들으면 남대문 시장의 장사꾼이 떠오른다. 양말 한 짝이라도 팔고 싶다면, 눈길을 끌어야 한다. 설레발이라도 쳐야 한다. 영가가 말하는 모순의 말투도 장사꾼의 말투이다. 창도 팔고, 방패도 판다. 그대를 향해 부르는 노래, 저 늙은이들, 노래는 왜 부를까? 긴 설레발, 뭘 팔자는 걸까?

향엄(香嚴, 799-898)은 당나라의 선승이다. 당일사(當日事), '그 날의 일', 선사들의 말투이다. 선사라면 누구나 아는 유명한 이야기, 남명의 말문이 이 일에 걸렸다. 언해의 풀이는 다시 한번 말문을 돌린다. 선사들의 말놀이랄까, 말을 쓰는 솜씨가 흥미롭다.

바로 알아도 벌써 더디다 함은,

예 이르되, 자다가 일찍 일어나라 이르지 마라,

또 밤에 다닐 사람도 있느니라 하니,


본분(本分)으로 가져서 이르건댄,

오늘날 알다 함이, 벌써 더디다는 뜻이라.


결정한 말을, 남명은 향엄, 그 날의 일을 들이댄다. 하지만 언해는 짐짓 딴 소리를 낸다. 졸린 눈을 비비며 새벽 길을 나서 본 사람이라면 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새벽길을 가는지. '예 이르되', 이건 당나라 조주종심(趙州從諗, 778-897)의 말이다. 꼭두 새벽에 일터로 가는 이들, 나서 보지 않으면 알 수도 없다. 그런 이들은 당나라에도 있었고, 조선에도 있었다. 새벽 길을 나서 본 이들은 안다. 벌써 더디고, 벌써 늦었다. 그래서 하는 소리이다. 언해는 '카냥하다'는 말을 쓴다. 겉으로든 속으로든 뿌듯해하지 말라는 말이다. 누군가 벌써 길을 나섰어, 바로 알았다고 아는 척 할 거도 없다는 말이다. 의심 말지어다, 벌써 더디고 벌써 늦었어. 남명도 뭔가를 팔려고 든다.

너는 깃거도 나는 깃디 아니하며,

그대는 슬퍼도 나는 슬프지 아니하노라.


너와 나와, 그대와 나라 함은,

본분(本分)의 사람이 이 시절(時節)의 사람을 향하여 이르니,


네 능히 주항(住降)하면, 마음에 기꺼워 뮈움을 내고,

능히 주항(住降)하지 못하면, 마음에 슬프며 시름을 내어니와,


내 이 세계는 본래 제 맑고 평(平)하여,

다스리며 어지러움이 다 없거니,

무엇을 슬프며, 무엇을 깃거하리오.


언해는 본분(本分)이란 말을 꺼내 든다. 언해가 즐겨 쓰는 말이다. 본분(本分)과 금시(今時), 함허는 '본분의 사람'과 '이 시절의 사람', 짝으로 읽는다. 사뭇 짝의 말투, 약을 팔아도 짝의 말투로 판다. 언해의 말씨, 말의 솜씨, 언해는 여기서도 솜씨를 부린다. 언해만의 솜씨이다. 이젠 잊혀진 솜씨이다.

편안히 주(住)하며, 마음을 항(降)함이라.


주항(住降)은 『금강경』의 말투이다. 편안히 머물고, 마음을 항복시키고. 그러면 희동(喜動), '기꺼워 뮈움'을 낸다. 그러지 못하면 비우(悲憂), '슬프며 시름'을 낸다. '이 시절의 사람'이 하는 일이다. '본분의 사람', 그에게는 이란(理亂), 다스리며 어지러움도 없다. 슬프고 기꺼움도 없다. 함허는 본래(本來)라는 말을 쓴다. 이 또한 언해가 즐겨 쓰는 말이다. 본연(本然)이란 말, '본래 그런'이라고 새긴다. 본분의 사람은 본래 그런 사람이다. 이 시절의 사람, 본연의 짝은 우연이다. '만나 그런'이라고 새긴다. 시절은 옮아 흐른다. 옮아 흐르는 시절을 만나, 시절에 붙는다. 시절에 붙어 주항하기도 하고, 주항 못하기도 한다. 본분의 사람이 시절의 사람에게 말을 건넨다. 본분의 사람은 덛덛함의 사람이다. 옮아 흐름과 덛덛함, 짝의 말투, 언해는 사뭇 짝으로 풀어 간다.

영가의 결정한 말, 남명의 '벌써 더디다', 언해는 '본분으로 가져 이르건댄'이라고 풀이한다. 본분의 사람이 이 시절의 사람에게 건네는 노래이다. 밤에 다니는 이들, 깃금이 일까? 슬픔이 일까? 본분과 이 시절, 낮에 다닐 수도 있고, 밤에 다닐 수도 있다. 짝의 말투, 이 시절에 붙으려면 본분을 바라 보아야 한다. 한가지로 제쥬변한 본래의 면목이다.

향엄화상(香嚴和尙)이 대 칠 소리에 도를 아시고,

게(偈)를 지어 이르시되,


곳곳에 자취 없고,

성색(聲色) 밖의 위의(威儀)로다,


제방(諸方)의 도 안 사람이,

다 상상기(上上機)라 이르리라,


향엄의 당일사(當日事), '그 날의 일', 향엄이 디새 조각을 던져 대나무를 치는 일이다. 그리고 그 소리를 듣는 순간에 '바로 안' 일이다. '그 날의 일'도 시절의 일이다. 남명은 '벌써 더디다'고 한다. 『증도가사실』은 다만 향엄의 게송을 들어주고 만다. 하지만 언해는 풀이의 순서를 바꾼다. 새벽길 나서 봐야 벌써 늦었어. 그리고는 '본분(本分)으로 가져서 이르건댄,'이란 구절을 덧붙인다. 영가의 노래, 남명의 노래를 이 구절에 붙어 들으라는 풀이이다. 이런 솜씨는 언해의 솜씨이다. 어디서 빌꾸어 온 말씨가 아니다. 제방(諸方)은 '여기저기', 여러 곳을 가리킨다. 선사들의 말투, 여러 곳의 선원, 또는 여러 선원에서 참선하는 이들을 가리킨다. 그래서 안 사람들, 향엄은 상상기(上上機)라 노래한다. 남명은 '속절없다'고 한다.

상상기(上上機), 언해는 기(機)를 '근기(根機)'라고 풀이한다. 근(根)은 몸의 뿌리이다. 기(機)는 '튕김'이다. 향엄이 던진 디새 조각은 대나무를 때린다. 그 소리가 다시 향엄의 귀, 이근(耳根)을 찌른다. 때리고 찌르고, 바로 그 때 아롬이 튕긴다. 그날의 일이고 그 시절의 사람이다. 향엄은 그걸 상상(上上)이라고 이르겠단다. 위에 다시 위, 하염없이 위를 향하고 위를 바라본다. 벌써 늦었어, 그래서 하는 소리이다. 언해는 '밤에 다니는 사람'을 가리킨다. 본분의 소리를 들으라 한다. 위만 바라본다면 속절없다.

밤길을 가는 이들, '6411번 첫 차'가 떠오른다. 고 노회찬 의원은 당대표 수락 연설에서 만원버스 이야기를 꺼냈다. 그 이도 그 버스를 타기 위해 밤길을 나섰을 것이다. 벌써 더딘 밤길, 차에 가득한 이들을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이가 만난 일, 그는 '투명인간들'이라고 했다. 개돼지라고 부르는 이들도 있다. 밤길을 가는 이들은 언제나 있었다. 조주는 그 때를 만나, 그들을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향엄은 속절없이 '위'만을 바라본다. 위로 더 위로, 제방을 바라 보고, 부처와 조사, 먼저 안 이들을 바라 본다. 그런데, 벌써 늦었어, 언해는 본분의 소리를 들으라고 한다. 부처는 '기이할셔'라고 했다. 언해는 이 말에서부터 시작한다. 본래 뒷논 것, 본래 한가지 제쥬변, 본래 평등이고 본래 자유이다. 그 것이 밤길 나서는 이들의 본래면목이다. 언해는 이 말에 딱 붙는다. 이 말에 붙어 영가의 노래를 새기고 풀이한다. 위를 보고자 한다면 죽살이를 돌아 보라고 한다. 결정한 말, 의심하지 말라고 한다. 고달픈 죽살이, 이런 소리도 속절없는 억지일까? 그래도 본래면목, 뫼는 뫼요, 물은 물이라, 그대를 향한 노래는 이어진다.

증도가, 그대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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