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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인천강, 평등과 자유의 열쇠/달그르메 이야기

서(序), 달그르메 이야기

이야기의 고고리


서(序)는 싨 끝이니 고치의 끝을 얻으면 실을 다 빼 내나니라.

『능엄경언해』


천강유수(千江有水) 천강월(千江月)

즈믄 가람에 물 있으면, 즈믄 가람의 달.


이 이야기는 달그르메의 이야기이다. 달그르메에서 시작한 이야기라는 편이 좋겠다. 『월인천강지곡』, 세종의 노래이다. 월인(月印)이란 말은 월영(月影)에서 왔다. ‘닰그르메’라고 새긴다. 물에 비친 달의 영상(影像)이다. ‘월인천강’이란 말, 저 노래로부터 시작했다. 물이 있으면 달이 뜬다. 한가지라고 한다. 평등을 ‘한가지’라고 새긴다. 저 노래는 달의 평등, 물의 평등을 노래한다. 물에 뜬 닰그르메의 평등이다. 물에 어린 그르메는 눈에 어린 그르메를 비유한다. 중생, 사람을 비롯하여 눈을 가진 모든 생명의 눈이다. 물이 있다면, 눈이 있다면 언제나 한가지, 달이 뜬다.

15세기 언해불전의 말투를 따르자면, 그르메는 얼굴이란 말과 짝을 이룬다. 달의 얼굴과 달의 그르메가 짝이 된다. 얼굴과 그르메의 짝은 본질(本質)과 영상(影像)의 짝이다. 얼굴은 본질이고 그르메는 영상이다. 달의 얼굴과 달의 그르메, 평등의 얼굴과 평등의 그르메를 가리킨다. 중생, 모든 생명은 본래 평등하다. 이건 중생의 본질, 중생의 얼굴이다. 평등은 자유와 짝을 이룬다. 모든 삶은 본래 평등하고 본래 자유롭다. 자유롭기 때문에 평등하고, 평등하기 때문에 자유롭다. 평등과 자유는 본래 한몸이다. 그런데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세계, 평등하지도 않고 자유롭지도 않다. 왜 그럴까? 저 노래는 이걸 묻는다. 얼굴과 그르메는 이 물음으로 들어가는 열쇠이다. 얼굴과 그르메의 사이에서 차별이 나온다. 달의 얼굴과 달의 그르메, 닮았지만 같지 않다. 그 다름으로부터 불평등, 차별이 생겨난다. ‘월인천강’이란 말은 세계를 향해 던지는 물음이다. 그리고 그 물음에 맞서는 열쇠이다. 언해불전을 이끌어가는 열쇠말이다.

달그르메의 노래, 그렇다면 세종은 왜 제 노래에 월인천강이란 이름을 달았을까? 나의 이야기는 이 물음에 대한 이야기이다. 달그르메, 이 말은 그냥 한 마디 말이 아니다. 이 말에는 긴 이야기가 걸려 있다. 아주 오랜 세월, 아주 넓은 나라를 떠돌던 갖가지 노래들이 이 말을 싸고 돈다. 달그르메는 그런 노래, 그런 이야기들과 단단하게 이어져 있다. 달그르메란 말은 세계를 바라보는 하나의 눈이다. 차별은 다름이다. 차별된 세계, 바라보는 눈에도 다른 눈이 있다. 이 말에는 다른 눈도 담겼다. 다툼도 담겼다. 안타까움도 담겼지만, 희망, 구하고 바라는 마음도 담겼다.

세종이 달그르메란 말을 불렀다면, 바로 그 때, 이런 저런 차별의 이야기들, 이런 저런 눈, 이런 저런 다름과 다툼도 함께 부른 셈이 된다. 본래 평등하고 자유로운데 실제로는 그렇지 못한 세계, 세종은 달그르메란 말과 함께 그런 세계를 노래했다. 그리고 그런 세계로 돌어 갔다. 그런 세계에서 어린 백성과 함께 걷기로 했다. 달그르메란 말이 본래 그런 말이다. 언해불전에 이런 말, 이런 이야기들이 담겼다. 긴 이야기 한번에 다 하기 어렵다. 이 이야기는 ‘세종은 왜 불교책을 읽었을까’란 책에서 이어지는 이야기이다. 긴 이야기 언해불전에 대하여는 저 책을 보아 주기 바란다.

달그르메란 말은 언해불전의 노랫말이다. 한문을 우리말로 풀어 쓴 우리말투이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우리말투에 대한 이야기가 된다. 15세기의 우리말투, 반가울수도 있지만, 낯설 수도 있다. 말이 낯설면 헷갈린다. 헷갈리면 따분해진다. 낯선 글자, 낯선 낱말, 그래서 먼저 낱말 몇 개를 예로 들어 시작하기로 했다. 나는 15세기 언해불전의 말투를 ‘세종의 말투’라고 부른다. 다른 뜻은 없다. 세종이 아니었다면 만날 수 없었을 말투, 그저 고맙다는 뜻이다. 나는 언해불전의 우리 말투에서 세종의 눈을 읽는다. 그가 그의 세계를 바라보던 그의 눈이다. 세종의 말투, 이제는 낯설다. 따라 읽으려면 낯을 좀 가려야 한다.

월인천강, 달그르메의 이야기, 이 이야기는 무엇보다 평등과 자유의 이야기이다. 우리 모두가 함께 살아 가는 우리 세계의 평등과 자유이다. 우리는 이 세계에 들어 서로를 간섭하며 살아간다. 그 세계를 살아 가는 중생의 몸, 평등과 자유를 훔치고 앗아가는 도적들, 도적의 꾀에 홀려 브즐우즐 살아 가는 중생의 사롤 혬, 그런 이야기를 따라가 보기로 했다. 하지만 내가 하려는 이야기는 평등이나 자유가 아니다. 언해불전은 평등과 자유를 '한가지 제쥬변'이라고 새긴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평등과 자유, 한자말을 '한가지 제쥬변'이라고 새겨 읽던 사람들의 말투이다. 평등과 자유를 가리고 따지는 일, 그런 이야기를 풀어 내던 15세기의 우리 말투, 나의 이야기는 '말이 주인공'이다. 

달그르메는 이 이야기로 들어가는 관문이다. 열쇠말, 패스워드이다. 말에 대한 이야기, 그래서 옛말을 따로 모아 찾아보기를 만들어 두었다. 나는 이런 말들을 잡꽃이라고 부른다. 반짝반짝 빛나는 말의 꽃이다. 이런 말, 이런 꽃이 주인공이다. 이런 말이 모여 이야기가 된다. 말 이야기, 말투 이야기, 옛말보기로부터 읽기를 시작하면 좋겠다. 다들 이런 말 이런 꽃에 친해지면 좋겠다.

필연과 우연이란 말이 있다. 필연은 ‘반드시 그런’ 것이다. 우연은 ‘만나서 그런’ 것이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덩어리 먹거리를 먹어야 산다. 이건 반드시 그런 것이다. 밥을 먹을 수도 있지만, 빵을 먹을 수도 있다. 그때 그때 다르다. 이건 만나서 그런 것이고 마주쳐 그런 것이다. 언해불전의 말투가 이렇다. 이 이야기는 나의 이야기이다. 내가 만났던 말, 내가 마주쳤던 달그르메, 나의 우연에 대한 이야기이다. 나의 눈에 비친 달그르메이다. 나의 이야기를 구태여 꺼내는 까닭은 세종의 달그르메, 세종의 눈을 가리키고 싶기 때문이다. 나의 이야기는 그걸 가리키는 손가락이다. 손가락이 되고 싶었다. 이 이야기를 읽는 이들, 세종의 눈을 바라보면 좋겠다. 세종이 정말로 하고 싶었던 말, 사람마다 세종의 달그르메를 제 눈으로 본다면 정말 좋겠다.  

이야기의 고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