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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인천강, 평등과 자유의 열쇠/말의 얼굴

1.10 어진 개돼지, 어린 똥막대기

똥막대기


민중은 개돼지로 취급하면 된다.


구의역에서 컵라면도 못 먹고 죽은 아이, 그게 어떻게 내 자식 일처럼 생각되나? 그렇게 말하는 건 위선이다.

나는 신분제를 공고화시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차피 다 평등할 수는 없기 때문에, 현실을 인정해야 한다.

이건 교육부의 고위 공무원이 했다는 말씀이다. 신문에 난 기사, 이 말을 듣자마자 세종이 떠올랐다. 하필 또 개돼지람…… 마침 나는 언해불전에 담긴 노래에 빠져 있었다. 거기에도 개돼지 노래가 있었다. 세종이 두 아들과 함께 읽었다는 노래였다. 두 아들과 함께 토론하여 손수 “국어로 번역하여 정했다”고 했다.

도랑먹은 가히와 흙 묻은 돝은, 도리어 다 알거늘

삼세(三世) 여래(如來)는 곧, 알지 못하시니


저 공무원이 이야기하는 신분제, 그게 뭘까? 세종은 조선의 임금이었다. 한 아들은 세자였고, 다른 아들은 대군이었다. 이런 게 신분제였나? 저들이 저 노래를 번역했다는 때는 15세기 중반, 저 공무원은 21세기, 이제 15세기로 돌아가야 하나? 세월은 잘도 간다. 개돼지 타령도 하염없다. 왜 그럴까? 그 동안에 우리는 도대체 뭘 하고 살았나?

귀(龜)는 점을 쳐 길흉을 이는 것이오, 감(鑑)은 이드며 골업는 이를 가리는 것이다. 성현이 이른 말을 귀감(龜鑑)이라 한다.


도랑이는 옴 벌레란다. 옴 벌레가 살을 먹어 들면 살이 문드러진다. 땀구멍이 부족한 돼지는 진흙에 뒹굴러 더위를 식힌다. 개돼지도 그냥 개돼지가 아니다. 고름과 진흙으로 떡이 된 개돼지, 노래 아래에는 '사오나운 양자’라는 설명이 달려 있다. 사오납다, 뭔가 모자라다. 모자라서 더럽고, 어리석고, 낮고, 그런 게 다 '사오나운 양자'이다. 그런 모습, 요즘에 '꼴사납다'고 한다. 언해불전엔 '골업다'고 한다. ‘읻다’와 ‘골업다’의 대구, 연추(姸醜)의 대구를 이렇게 새긴다. 고운 모습, 미운 모습의 대구이다. 거울은 이든 모습과 골업는 모습을 가려준다. 더럽고 골없어 기분을 잡칠 수도 있다. 가엾고 슬퍼질 수도 있다.

사오납고 골없는 개돼지, 그런데 문득 ‘삼세의 여래’를 마주 세운다. 삼세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 세가지 시간이다. 여래는 부처님이다. 언해불전은 불교책이다. 불교라는 종교, 부처님이라면 교주이고 신격이다. 가장 골없는 개돼지에 가장 이든 부처를 마주 세웠다. 가장 이든이와 가장 골없는 이, 가장 어진이와 가장 어린이, 대구라지만 극단의 대구이다. 상상은 자유라지만 이런 상상은 참 괜찮다. 더럽고 모라자다 해도 마음 상할 일도 없다. 기분을 잡치지도 않는다. 가엾고 슬프지도 않다.

제자가 스승에게 물었다. 어떤 게 부처요?

스승이 답했다. 마른 똥 막대기.


박물관에 가면 목이 삐죽하니 긴 그릇을 볼 수 있다. ‘정병’이라고 부른다. 날렵한 모습에 무늬도 생생하다. 정병과 똥 막대기, 바늘과 실이랄까, 다 뒷간에서 쓰던 물건이다. 뒷간에서 큰일을 보고 뒷물을 한다. 정병에는 깨끗한 물이 담겼다. 삐죽한 목으로 물을 살살 따른다. 매끈한 막대기로 공들여 닦는다. 인도의 풍습이 불교와 함께 전래한 것이란다. 요즘에야 비데가 있다지만, 깔끔하기도 하거니와 몸에도 좋다. 똥 막대기, 일을 보고 나면 닦아 말린다. 박물관의 정병이 날렵하듯, 똥 막대기도 말려 두면 매끈하다. 내 몸을 닦는 물건, 스스로 간수하는 물건, 더러울 것도 없다. 적어도 하루에 한번은 꼭 써야 하는 물건이다. 있어야 할 때에, 있어야 할 자리에 언제나 있는 물건, 똥막대기도 그렇다.

세상은 뫼 높아, 나와 남을 다투나니

마음 자리 알지 못해, 이와 같으니


경쟁이란 말, 그냥 '다투다'라고 새긴다. 어진 똥막대기와 어린 개돼지, 그냥 마주 세우는 게 아니다. 누가 남고, 누가 모자라? 우열을 다툰다. 다툼을 부추긴다. 맞서고 다퉈라. 이게 개돼지 노래의 뜻이다. 뫼 높은 세상, 다투는 일이 흔한 만큼, 부추기는 일도 흔하다. 똥막대기와 개돼지라지만, 다툼을 부추긴들 별 날 것도 없다. 부처라는 말, 불교의 불(佛)이라는 글자, 언해불전에서는 ‘알다’ 또는 ‘아롬’이라고 새긴다. 부처는 ‘아는 이’이다. 부처는 안다. 이에 비해 개돼지, 개돼지는 모른다. 아는 이들과 모르는 이들이 맞선다. 어린이와 어진이의 다툼이다. 그런데 이런 다툼, 너무 뻔하다. 어린이와 어진이, 말 안에 이미 승패가 담겼다. 모자란 이가 넉넉한 이를 이길 리 없다. 그렇다면 뭐하러 다투나, 뭘 부추기나?

삼세의 여래는 유(有)를 알지 못하여

안절부절 노심초사, 집안의 더러움을 드러내는 데,

이노(狸奴)와 백고(白牯)는 도리어 유를 알아

절룩절룩 허겁지겁 능히 자기를 지키네


그래서 그럴까, 개돼지 노래 아래에, 노래 하나가 더 달렸다. 여래는 알지 못한다. 그렇지, 이래야 부추김이지. 하여간 이 노래는 개돼지 노래보다 훨씬 더 오래됐다. 이노는 고양이다. 백고는 흰 소이다. 어쨌거나 골없는 짐승이다. 흔히 보는 가축이다. 온갖 짐승의 무리가 부처 무리에 맞선다.

어차피 다 평등할 수는 없기 때문에, 현실을 인정해야 한다.


21세기의 공무원은 평등을 말한다. 어진이와 어린이의 평등이다. 그런데 평등할 수 없다고 역설(力說)한다. 힘주어 주장한다. 할 수 없기 때문에 인정해야 한다. 신분제라는 말도 서슴없이 내 뱉는다. 어진이와 어린이, 법으로, 제도로 굳혀야 한다. 그의 개돼지, 그의 어린이는 골없고 사오납다. 그래서 마음이 상한다. 기분이 잡친다. 그는 넉넉하겠지? 어진이이겠지? 그래서 저런 소리를 내는 거겠지?

부처가 모른다는 유(有), 이게 바로 저 공무원이 말하는 현실이다. 부처는 현실을 모른다. 그래서 평등 같은 소리나 하고 다닌다. 그래 봐야 드러나는 건 더러운 집안의 꼬라지뿐이다. 그래 봐야 더러운 집안, 평등하지 않다. 제 집안도 평등하지 못하면서, 뭘 알기나 하는 거야? 부처도 물론 현실에서 시작했다. 다만 더러운 현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부처가 안절부절 노심초사하는 까닭은 현실을 거스르기 때문이다. 이건 부처의 다툼이다. 개돼지는 더러운 현실에 묻혀 산다. 평등하지 않은 집안, 누구보다, 부처보다 훨씬 더 잘 안다. 그래서 절룩거리고 허둥대더라도 제 몸 하나는 제가 지킨다. 이건 개돼지의 다툼이다.

현실도 모르는 부처, 뒷물에도 쓸데 없는 똥막대기, 이건 잠깐 묻어 두자. 21세기의 공무원, 이런 어진이들도 널렸다. 기분 잡치는 막말도 흔하고 어질다. 개돼지들, 어린이들, 저 노래는 돌아서라고 한다. 맞서라고 한다. 그리고 물어 보라고 한다. 어진이들, 늬들이 현실을 알아? 평등을 알아? 도대체 아는 게 뭔데? 어진 건 뭐고, 넉넉한 건 또 뭔데?

21세기 우리가 사는 세계의 더러움, '쫄지마!'란 말이 유행하기도 했다. 이 노래가 딱 그렇다. 이런 게 언해불전의 노래이다. 어린이를 위해 글자를 만들고 노래를 번역했던 세종의 다툼이다. 세종의 부추김이다. 개돼지들도 알 것은 안다. 절룩절룩, 허겁지겁하면서도 제 몸은 지킨다. 쫄지마라, 개돼지. 뒤집고 거스르고 맞선다면 더 이상 사오납지 않다. 그래서 세종의 노래는 산뜻하다. 평등하지 않지만, 평등할 수 없는 게 아니다. 돌아서 맞서면 어진이도 어린이도 평등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