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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인천강, 평등과 자유의 열쇠/말의 얼굴

1.3 빈대가리 쪼지 마라

얼마 전 공각기동대라는 영화가 나왔다. 일본 원작의 만화지만 난 이 만화를 정말 좋아한다. 으레 보아야지 기다렸는데, 평판이 영 시원치 않았다. 화이트와싱(whitewashing)이란 말이 많았다. 주요 배역을 잘 생긴 백인 배우로 도배를 했다는 말이다. 심한 욕도 있었다. 도날드 트럼프도 지겨운데 이런 영화에 화이트와싱, 이것도 정말 고약하다. 원작이 서구나 백인이 아닌, 아시아의 상상을 바탕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저 영화의 제목, 공각(空殼)이 바로 빈대가리이다. 영어 제목은 ‘ghost in the shell’이다. 얼굴대가리의 대구로 따지자면 셸은 대가리고 고스트는 얼굴이다. 그런데 고스트는 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다. 언해불전의 말투를 따르자면 ‘대가리 속의 귓것’이다. 말장난 같지만 얼굴이 없는 게, 귓것의 얼굴이다. 고스트라는 번역은 빈대가리란 말을 영어 투로 조금 비튼 것이다. 그런데 이 말, 공각 또는 빈대가리란 말은 아주 오래됐다.

임금이 한 밤중에 꿈을 꾸었다. 머리를 산발한 사람이 문간에서 몰래 기웃거리다가 임금을 보고는 입을 열었다.


저는 근처 깊은 못에 살고 있습니다. 강의 신이 나를 불러 황하의 신을 찾아 뵈라고 했습니다. 황하의 신을 찾아 가다가 뜻 밖에 이 나라의 강변에서 여차라는 어부에게 잡히고 말았습니다.


잠에서 깬 임금이 여차라는 어부를 찾아 오라고 했다. 여차가 잡은 것은 등짝이 다섯 자가 넘는 하얀 거북이었다. 모두가 ‘신령한 거북’이라고 했다. 기를까 잡아 먹을까, 임금은 한참을 고민했다. 그러다 신하의 조언을 듣고는 거북을 죽이도록 했다. ‘신령한 거북’은 죽임을 당했고 빈대가리만을 남겼다.


말에는 사연이 있다. 신령한 거북이 남긴 빈대가리, 여기에도 사연이 있다. 거북이의 빈대가리에 작은 구멍을 뚫고 불에 달군 송곳을 꽂아 넣는다. 등짝이 타면서 툭툭 터지는 소리를 낸다. 이 소리를 듣고 점을 친다. 이런 게 거북이 점이다. 신령한 거북이에 신령한 점, 일흔 두 차례 구멍을 뚫고 점을 쳤다고 한다. 과연 모두 정확하게 맞았다.

이 말을 듣고 공자가 이르기를

임금의 꿈에 나타났다니 과연 참으로 신령하구나. 그런데 어부의 그물을 피하지는 못했다니 신령함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일흔 두 차례나 길흉을 맞추었다니 그 앎이 대단하구나. 그런데 제 배를 갈라 창자를 도려내는 아픔을 면하지는 못했다니, 그 앎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이천삼백 년 전에 살았다는 장자(莊子)의 책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장자의 책에 장자의 이야기, 공자가 논평을 한다. 이야기도 재미있지만 편집의 형식도 흥미롭다. 이런 것도 얼굴과 대가리이다. 이야기의 얼굴과 이야기의 대가리.

신령한 거북인들 무슨 조짐 있으리

빈대가리 속절없이 쪼지 말지니……


이건 구백 년 전 스님의 노래이다. 이른바 동아시아의 세 가르침, 도교와 유교, 거기에 불교의 거물이 다시 한 다리를 걸쳤다. 빈대가리를 노래한다.

공각기동대의 빈대가리는 이런 말이다. 공자는 두 가지를 가리킨다. 하얀 거북이의 ‘신령함’과 ‘앎’이다. 영(靈)이라는 글자, 뭔가 희한하기는 한데, 그 내막, 그 얼굴을 짐작조차 할 수 없다는 뜻이다. 까닭을 모르기 때문에 그냥 신령하다고 한다. 앎이라고 한 것은 거북이가 자기를 잡은 어부의 이름도 알았고, 저 나라의 임금도 알았고, 꿈 속에 나타나 제 목숨을 구해달라고 부탁할 줄도 알았기 때문이다. 신령하고 잘 알고, 그런 힘으로 길흉을 알아 맞출 수도 있었다.

장자는 거북이가 남긴 대가리를 빈대가리라 부른다. 대가리 속에서 창자를 들어 냈기 때문이다. 속이 비었다. 말하자면 거북이의 살과 내장이 거북이의 얼굴이다. 그런데 공자는 거북이의 얼굴을 ‘신령함과 앎’으로 요약한다. 그리고는 ‘어디 있니?’라고 묻는다. 죽어서 빈대가리 안에 창자도 없지만, 살아서 빈대가리 안에 신령함도 앎도 없다. 장자가 공자의 입을 비는 까닭은 바로 이 이야기를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멀쩡한 거북이를 잡아 창자를 들어냈다. 애꿎은 대가리에 구멍을 뚫고 불로 지진다. 신령한 거북이의 신령한 앎에 기대어 길흉을 미리 알아 보자는 것이다. 점쟁이도 신령함과 앎이 거북이의 얼굴이라고 한다. 그러나 거북이에게 그런 얼굴은 없다. 얼굴이 없으니 빈대가리이다. 허망하고 허탈하다.

저 스님은 한 술 더 뜬다. 거북이는커녕 사람을 바로 꾸짖는다. 거북이 대가리는 제쳐 두고, 네 대가리 안에는 도대체 뭐가 들었니? 네 대가리도 빈대가리 아닐까? 빈대가리 쪼아 봐야 뭐가 나올까? 이천 년 전이라지만 저 임금이나 점쟁이가 거북이의 신령함과 앎을 정말 믿었을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거북이 점을 치는 일은 아주 교묘하고 복잡한 일이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저런 점을 치던 사람들, 저 때는 지식인이었다. 이른바 엘리트였다. 본래 텅 빈 대가리, 신령한 조짐 같은 건 애초부터 없었다. 그들도 벌써 다 알고 있었다. 그냥 기술이고 시늉이고, 보람일 뿐이었다.

빈대가리 쪼지 마라


빈말에 빈짓, 속절없다. 장자도 공자도 스님도 한 입으로 경고한다. 알맹이도 없는 땅콩, 아무리 으깨봐야 손가락만 아프다. 남는 건 속임수에 허탈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