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세종과 함께 읽는/道를 證한 노래는

004_02 새로 인 사람

증도가 현각의 노래

영가: 그대는 아니 보는가

남명: 이 어떤 낯인고


언해: 이 어떤 낯인고’라 함은, 묻는 것의 면목(面目)이라,

사(師)가 모든 사람에게 가르쳐 물어 이르시기를,

‘보는가, 못보는가, 이 어떤 면목(面目)인고?’ 라 하시니


세 개의 노래, 영가의 노래와 남명의 노래, 그리고 세종의 노래, 언해의 노래가 이렇게 이어진다. 영가의 물음에 답한다. '그대의 낯', '그대의 낯과 눈', '그대는 아니 보난다?' 이제는 '그대'가 봐야 할 때이다. 제 낯을 보건, 제 눈을 보건, 뭔가를 보고, 뭔가를 나토아야 할 차례이다. 저 세 노래, 요즘 말로 치자면 그대를 위한 노래방이다. '한 마디 일러라.' 세종도 그대에게 마이크를 건넨다. 야, 이게 웬 떡? 머뭇거리다간 머쓱해진다.

이 새로 인 사람이라,

이 본래(本來)의 사람이 아니다.


영가과 남명의 노래는 한문으로 쓰인 원문이 있다. 하지만 세종의 노래, 언해의 노래에는 원문이 없다. 그냥 우리말로 부른다. '본래(本來)의 사람', 그 이전부터 한자말로 쓰던 말이다. 이런 말이 섞이긴 해도 이게 15세기 언해불전의 우리말투이다. '본래의 사람'과 '새로 인 사람'을 마주 세운다. 이런 노래, 이런 말투, 새롭다. 말도 새롭고 뜻도 새롭다. 무엇보다 언해의 해석, 여늬 주석서와는 아주 다르다. 제 노래, 제 목소리로 한껏 불러댄다. 당나라와 송나라의 노래와도 맛이 다르다. 세종의 노래이고, 조선의 노래이다.

조부(祖父)로 동가(同家)한 시차인(是此人)이니라.

한아비와 아비와로, 집이 한가지인 이 사람이니라.


한아비는 큰 아비이다. 할아비의 옛말이다. 세종의 노래는 한아비와 아비의 노래이다. 우리와 집이 한가지인 사람들의 노래이다. 우리 집안의 일이 담았고, 우리 집안의 눈을 담았다. 집안의 맛이다. 우리 집안의 맛이 당나라의 맛과 송나라의 맛과 함께 나란히 실렸다. 이 것도 참 신기하다. 한아비들의 다른 맛이 자랑스럽다.

전(筌)을 잊다 함은 고기 잡고 그릇을 잊을시니,

오늘날의 아롬이 오히려 그릇일새, 아론 마음도 또 잊음을 가잘비시니라.


내 몸에 본래 뒷논 것을 아니, 각별히 새로 일운 기특(奇特)이 없을새,

'예로부터 눈썹 털이 눈가에 있다'고 하셨다.

하마 기특이 없으면 아침 오며 나죄 감에, 배 고프거든 밥먹고 잇브거든 잘 따름이니라


'새로 인', '새로 일운', 비슷한 말이 거듭된다. 이런 우리말, 요즘엔 도리어 낯설다. 그래서 거꾸로 한자말을 찾는다. 나도 그랬다. 구태여 따지자면 '신성(新成)'이다. '새로 이룬', 또는 '새로 만든'이다. 언해불전은 '본래 뒷논 것'과 '새로 이룬 것'을 마주 세운다. 이 말은 이 노래의 열쇠말이다. 본래부터 있던 것, 기특할 게 없다고 한다. 새로울 게 없다고 한다. '눈썹 털이 눈가에 있다', 이런 게 뭐가 기특할까? 뭐가 새로울까? '새로 인', 또는 '새로 이룬', 나는 이런 말을 우리말로 나토는게 도리어 기특하고 새롭다. 이젠 없어진 말투, 그래서 놀랍고 아깝다.

예로부터 눈썹 털이, 눈가에 있다.


세종의 노래, 언해의 노래, 이걸 따라 부르다 보면 이런 말투가 금새 입에 붙는다. 까다로운 한자말과는 질이 다르다. 입에 붙는 우리말투, 말도 재미있고, 뜻도 번득해진다. 이 긴 노래, 내가 이 짓을 하는 까닭도 그 맛에 있다. 이런 말투가 잊혀진 게 신기하다. 이런 말을 고르고 차리던 세종의 생고생, 미안하기 때문이다. 하여간 이런 노래, 처음엔 낯설다. 헷갈린다. 하지만 몇 구절만 따라 읽으면 말이야 정말 쉽다. 그 다음에 그대의 노래를 부르고 나토는 거야 그대의 깜냥이겠다.

제 눈으로는 제 낯을 볼 수 없다. 세상의 모든 사람, 모든 중생이 내 낯을 본다. 나는 내 눈으로 내 낯을 볼 수 없는 단 하나의 사람이다. 제 눈으로 제 낯을 보려면, 거울이란 그릇을 써야 한다. 듣글 또는 드틀은 티끌의 옛말이다. 듣글이 거울의 허물에 쌓이고 엉기면 때가 된다. 거울에 때가 쌓이면 흐려진다. 거울에 비친 제 낯과 제 눈도 따라서 흐려지고 이지러 진다. 거울에 비친 낯과, 본래의 제 낯, 듣글이 덕지덕지 쌓인 거울, 그 거울에 비친 제 낯, 이것도 '새로 이룬' 낯이다. 본래의 면목이 아니다. 거울과 빛과 그르메의 가잘빔, 그걸 헐어 버리고, 그치라고 한다. 거울의 때야 닦을 수도 있다. 열심히 닦으면 얼마간 맑아질 수도 있다. 본래의 사람, 본래의 낯과 눈을 보지 못하는 까닭이 있다. 있어도 보려고 하지 않는 까닭도 있다. 본래의 낯과 눈을 잊어 버리고, '새로 인' 사람을 찾아 헤매는 까닭도 있다. '허공의 빛그르메', 언해불전은 '노릇'이란 말도 쓴다. 빛과 그르메의 노릇에 놀아나는 까닭도 있다.

증도가, 그대의 노래

'세종과 함께 읽는 > 道를 證한 노래는' 카테고리의 다른 글

008_본래의 근원  (0) 2018.06.01
007_법신을 알면  (0) 2018.06.01
006_곡도같이 된 빈 몸  (0) 2018.05.27
005_밝음없는 실한 성이  (0) 2018.05.25
004_01 망상이 뭐길래  (0) 2018.05.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