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장(藏)/뜻가장

이름 없는 글

「일승법계도(一乘法界圖)」는 시(詩)를 합하여 하나의 도장으로 만든 것이다.

『화엄경』과 『십지론(十地論)』에 의하여 원교(圓敎)의 종요(宗要)를 표한다.

    총장(總章) 원년(元年) 7월 15일 쓰다.


어떤 까닭에 편집한 사람의 이름이 없는가?

연생(緣生)의 법에는 주인이랄 게 없기 때문이다.


어떤 까닭에 연월의 기록은 있는가?

모든 법은 연생에 붙기 때문이다.


『법계도기총수록(法界圖記叢髓錄)』이란 책의 첫부분이다. 「일승법계도(一乘法界圖)」는 의상(義湘 625-702)이 지은 글이라고 한다. 이 글을 풀이한 책이다. 묻고 대답하는 투를 빌어, 지은이의 이름은 없고, 지은 날짜만 적혀 있는 까닭을 풀이한다. 까닭은 연생(緣生)이다. 언해불전은 '연(緣)하야 나다'라고 새긴다. 연기(緣起)가 '브터니닷'이라면, 연생(緣生)은 '브터나닷'이다. 브터나는 일에 주인은 없다. 주인이 없으니 이름도 없다. 그러나 브터나다, 붙어서 나는 일, 일도 있고 순간도 있다. 붙는 순간이고 나는 순간이다. 이름이야 속절없지만, 그 일의 순간은 번득하다. 그래서 그 날짜를 적어 증거한다. 의상이 지어낸 글, 의상은 그 때 어디에 붙었을까?

총장(總章) 원년(元年)이라면 668년, 당나라 고종 때의 일이고, 신라 문무왕 때의 일이다. 의상은 650년에 당나라로 가서 671년에 귀국했다고 한다. 중국 화엄종 지엄(智儼 602-668)에게서 배우고 돌아 와 해동화엄종을 세웠다고도 한다. 저 날짜에 그런 일들이 담겼다. 의상은 당나라에 붙고, 지엄에 붙고, 『화엄경』과 『십지론(十地論)』에 붙었다. 저 글은 그렇게 붙어 난 글이다. 이름 없는 글을 풀이하던 사람들, 그들도 없는 이름을 구태여 가리려 들지 않는다. 브터나는 일에 주인은 없다.

이 같음을 내 듣자오니,

한 끠에 부처 사위국 기수급고독원에 계셔,

큰 비구중 천이백오십인과 한데 계시더니,


주반(主伴)이 교참(交參)하야 설청(說聽)이 동회(同會)로다.

주(主)와 벗이 서로 섞어, 이르며 들을 이 한데 모이도다.


위의 구절은 『금강경언해』의 장면이다. 아래의 구절은 『금강경삼가해』, 함허의 풀이이다. 주반(主伴)을 ‘주(主)와 벗’이라고 새긴다. 주(主)란 글자, 님자라고도 새기고, 읏듬이라고도 새긴다.

스승과 제자가 모다 어울어사, 비로서 이르며 대답함이 이루어지니라.


함허는 주반(主伴)을 다시 스승과 제자라고 풀이한다. 설청(說聽), '이르다'와 '듣다'의 짝이다. 누구는 이르고 누구는 듣는다. 제자가 묻고, 스승이 답한다. 스승은 이르고 제자들은 듣는다. 『금강경언해』의 '내 듣자오니', 사람들은 흔히 아난을 떠올린다. 부처는 이르고, 아난은 듣고, '이르다'와 '듣다'의 짝에 강명(强名), 구태여 이름을 세운다.

옛 사람이 이르되,

하하하, 이게 뭔가?

남북동서에 오직 이 내로다.


비록 이르되 오직 이 내라하건만,

눈에 뵈는 일에 모로기 키 있으나,

안과 밖 중간에 얻어도 다 없도다.


아(我)란 글자 아래 함허가 달아 놓은 풀이이다. 함허는 옛 사람을 따라 그저 하하하 웃는다. 경(境)은 '눈에 뵈는 것'이라 풀이한다. 혼(渾)은 '모로기'라고 새긴다. 대유(大有)는 '키 있다'라고 새긴다. 눈으로 보는 일, 보면 그대로 분명히 척 있다는 말이다. 언해불전의 말투, '얻다'는 '찾다'이다. 척 보면 있는 것, 안으로 찾고 밖으로 찾아도 찾을 수 없다고 한다. 중간에서도 잡을 수 없다고 한다. 키 있으나 찾아도 없는 까닭, 찾아도 없는데 키 있는 까닭, 그래서 누구는 제 이름은 빼고 날짜만 적는다. 그걸 다시 풀이하는 사람, 연생(緣生)이라고 읽는다. 세월이 흘러, 누구는 글자를 만들고 누구는 '브터니닷', '브터나닷'이라고 새겨 적는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이 세상엔 이름 없는 일도 참 많다. 그러다 컴퓨터와 인터넷의 시대가 왔다. 이른바 전산화라는 일을 하면서 처음으로 내 이름을 걸고 글을 쓰고 책을 냈다. 나는 그 전에도 '왜 이름이 없는가?', 저 구절을 알고 있었다. 속절없는 이름, 그 뒤로도 숱한 글을 썼다. 그럴 때마다 저 물음이 어른거렸다. 인터넷, 나는 미디어가, 그릇이 깨지고 뒤집히는 시대라고 생각했다. 누가 이르고 누가 듣는가? 그런 일이 점점 흐려져 갔다. 그릇이 깨지고 뒤집히는 마당에 저자와 독자, 그런 이름도 깨지고 뒤집하는 것 아닐까? 컴퓨터와 인터넷에 걸린 글을 읽으면, 글과 말의 뿌리를 캐고 들 수 있다. 뿌리 없는 말은 없다. 내가 지어낸 말도 없다. 굴러 다니던 말, 내 몸을 흘러 지나갈 뿐이다. 내 몸이야 번득히 키 있다지만, 그 몸에 잠깐 머물다 가는 말, 내 입으로 나왔다고, 내 손으로 썼다고, 내 이름을 걸어도 되는 걸까?

브터니닷, 브터나닷, 나는 이런 말이 정말 아깝다. 그래서 글을 쓴다. 말에 붙는다. 딱 붙어서 뭐라도 할 참이다. 내가 붙는 일이지만, 늘 이름없는 글을 상상했다. 깨지는 그릇의 깨지는 말투, 말이야 쉽다. 이름을 뺀다고 이름없는 글이 되지는 않는다. 말투도 그릇이다. 그릇을 보면 모로기 키 있다. 그래도 그릇은 깨진다. 그릇이 깨지면 새 그릇을 마련해야 한다. 의상도 함허도 그런 걸 상상했을 것이다. 세종도 그런 걸 상상했을 것이다. 깨지는 그릇에 담는 글, 누가 이르고, 누가 들을까? 다시 누구를 브트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