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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과 함께 읽는/道를 證한 노래는

046_01 그대의 손바닥

증도가 현각의 노래

오안(五眼)이 좋으면,

오력(五力)을 득(得)하야사,


오직 증(證)한 이사 알지라, 헤아림이 어려우니,


거울 속에 얼굴 봄이, 봄이 어렵지 아니하니,

물 가운데 달 잡음이어니, 어찌 잡아 득(得)하리오.


오안(五眼)과 오력(五力), 다섯 눈과 다섯 힘, 사람들은 대개 이런 말에서 막힌다. 오안(五眼)이 뭐지? 오력(五力)은 또 뭐지? 어떤 이들은 이런 말에 딱 붙는다. 하지만 영가의 노래는 짧다. '법수에 있느니라', 언해의 말투는 차갑다. 법수를 찾아 본다고 풀리지도 않는다. 그래서 다른 법수, 또 다른 풀이를 찾아 다니기도 한다. 이런 게 말에 붙는 일이다. 이게 은근 재미도 있다. 심심풀이에 세월도 잘 간다. 그러다 보면 영가도 잊고 노래도 잃는다. 영가는 누구고, 그대는 또 누구람, 아예 잊고 돌아서기도 한다.

갓난아기, 모든 게 낯설다. 엄마의 품에서 엄마라는 말을 배운다. 숱한 아기, 숱한 그대들, 법수를 뒤지며 말을 배우지는 않는다. '좋다'는 '깨끗하다' 이다. 눈이 깨끗하면 힘이 난다. 나는 밥을 먹으면 눈이 좋아진다. 눈이 좋으면 힘이 난다. 긴 노래, 긴 논증, 언제나 눈으로 돌아간다. 근(根)으로 돌아간다. 눈이 밑이다. 눈이나 봄, 법수가 없더라도 헷갈릴 게 없다. 어진이의 풀이를 기다리지 않아도 누구나 훤히 안다. 내 몸으로, 나의 말로, 나의 노래를 나톤다. 언해의 우리말투가 가진 힘이다.

오안(五眼)과 오력(五力)은,

여러 경론을 살펴 보니, 오직 정명경에서 나왔다. 그래서 그 글에 따라 풀이한다.


오안은 천안(天眼), 육안(肉眼), 법안(法眼), 혜안(慧眼), 불안(佛眼)이다.

오안을 갖추어 여래가 된다.


곧 오력이 앞에 나타나니,

신력(信力), 진력(進力), 염력(念力), 정력(定力), 혜력(慧力)이다.


『증도가사실』의 풀이는 이런 식이다. 여느 주석서들, 대개 이런 식이다. 친절하다. 어떤 이는 놀랍도록 친절하다. 그대를 위하여 하염없이 말을 가르고, 그 뜻을 헤아려 준다. 천안은 또 뭐고, 불안은 또 뭘까? 신력은 또 뭐고 혜력은 또 뭘까? 낯선 말로 낯선 말을 풀이한다. 끝도 없이 이어지는 낯선 말, 말을 가르며 세월을 보내는 이들도 참 많다. 그렇게 천년도 흐르고, 이천년도 흐른다. 천년의 낯선 말, 부처도 모른다. AI도 모른다.

오안(五眼)이 좋으면


다름이 도리어 한가지니

만별(萬別)과 천차(千差) 마침내 비도다

진겁(塵劫)엣 다함없는 일을

암마(菴摩)가 손바닥 가운데 있음을 봄 같음을 뉘 알리오

오안(五眼)은 법수(法數)에 있느니라.


암마(菴摩)는 과실(果實)이니,

예서 이르기는 가림이 어려울시니,

복숭아 같되 복숭아 아니며, 오얏 같되 오얏이 아닌 것이라.


다름이 도로 한가지라 함은,

부처의 눈이 즈믄 해 같으샤,

다름을 비추시되 체(體) 도리어 한가지라.


둘째 구(句)는 말갓말갓이 보아 한 것도 없을시라.

'법수에 있느니라', 언해는 또 차갑게 넘어간다. 알아서 해, 노래로 다시 돌아간다. 눈이 좋으면 힘이 난다. 눈으로 돌아가고 봄으로 돌아간다. 아롬과 마촘으로 돌아간다. 언해의 말씨, 또는 솜씨가 이렇다.

'헤아림이 어려우니', 측(測)이란 글자는 '헤아리다'라고 새긴다. 물의 깊이를 재는 일이다. 혜다, 또는 세다, 얕고 깊고, 적고 많고, 헤아려 안다. 알기 위해 헤아린다. 헤아림은 알기 위해 쓰는 수(手), 손의 하나이다. 헤아리기 어렵단다. 영가의 증(證)과 지(知), 마촘과 아롬, 눈에 달렸다. 도(道)를 증(證)한 노래, 헤아리기 어렵단다. 노래를 부르는 말투가 다르고 솜씨가 다르다.

거울 속에 얼굴 봄이, 봄이 어렵지 아니하니,

물 가운데 달 잡음이어니, 어찌 잡아 득(得)하리오.


'거울 속에 얼굴 봄', 뭐가 어렵겠나? 이 얼굴은 그대의 낯이 아니다. 형(形)이란 글자를 '얼굴'이라 새긴다. 하기야 그대의 낯도 형(形)이고 얼굴이다. 말투가 좀 다르다. 그런데 '물 가운데 달 잡음', 이건 틀렸다. 어린 납이나 어린이나 짓는 바보 짓이다. 그럴까? 뻔한 일에 왜 자꾸 틀릴까? 그래서 영가는 긴 노래를 부른다. 그래서 영가는 그대에게 묻는다. 멀쩡한 그대의 눈, 왜 그러는데?

암마(菴摩)가 손바닥 가운데 있음을 봄 같음


이건 남명의 솜씨이다. 손바닥 가운데 놓인 암마, 그 암마를 바라 본다. 남명도 눈과 봄으로 돌아간다. 눈 먼 나율(那律)의 천안에 가잘빈다. 손바닥의 과자, 손바닥 가운데의 과실, 남명은 구태여 암마라고 부른다. 복숭아 같고 오얏 같은 암마, 본 적도 없는 서역의 과실, 헷갈리겠지. 그러니 바보 짓도 하는 거겠지. 눈이 흐리면 바보 짓이 나온다. 찬 밥이라도 챙겨 먹어야겠지. 이건 나의 솜씨, 나의 수단이다. 손바닥 가운데의 일, 멋 부릴 것 없다.

나율의 손바닥, 그대의 손바닥, 손바닥은 그릇이다. 과일을 담고 암마도 담는다. 손바닥 가운데 맛난 과일, 이건 그릇 안에 담긴 구슬을 가잘빈다. 여래장 속의 여의주, 남명은 '봄'이란 말로 돌아 간다. 손바닥 가운데 맛난 과일, 봄이 뭐가 어려운가? 나율의 손바닥, 그대의 손바닥, 나율의 천안, 그대의 천안, 배가 고프다면 입에 넣으면 그만이다. 그게 전부다. '말갓말갓이 보아 한 것도 없을시라', 언해의 말투가 새삼 차갑다. 여래장, 여의주, 손바닥과 암마, 천안과 불안, 신력과 진력, 뻔한 말들, 멋부릴 것 없다.

증도가, 그대의 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