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세종과 함께 읽는/道를 證한 노래는

044_01 내 몸의 구멍

증도가 현각의 노래

여섯 가지 신(神)한 용(用)이, 공(空)하되 공(空)하지 아니하니


성(聖)에 있거나 범(凡)에 있음에, 다른 얼굴 없으니라

불이문(不二門)이 열어, 마음으로 가락오락하거니

무슨 구태여 유마힐(維摩詰)께, 다시 묻자오리오


여섯 가지는 구슬이 여섯 구멍이 있나니, 육근(六根)을 가잘비니라.


둘째 구(句)는 성범(聖凡)에 본래(本來) 더하며 덞 없을시라.


불이문(不二門)은 범(凡)과 성(聖)이 둘 아닌 문(門)이니,

문수(文殊)가 유마힐(維摩詰)께 묻자오시되,

'어늬 불이법문(不二法門)이잇고?' 유마(維摩)가 묵연(默然)하신대,


문수(文殊)ㅣ 찬(讚)하여 이르시되,

'말씀과 문자(文字) 없음에 이르름이,

이 보살(菩薩)의 불이법문(不二法門)이로소이다.' 하시니라.


여섯 가지 신(神)한 용(用), 언해의 말투, '신(神)한'은 '신기한'의 뜻이다. 아, 신기해라, 그냥 일상의 말투이다. 헷갈릴 것 없다. 신기한 씀, 또는 쓰임, 여섯 가지란다. 언해는 구슬에 뚫린 구멍이라고 풀이한다. 안이비설신의 육근(六根)을 가잘비는 말이라고도 한다. 이 것도 『증도가사실』의 풀이이다. 언해는 때로 『증도가사실』을 따른다. 더할 때도 있고, 덜 때도 있다.

나는 이 구절을 '여래장의 날개'라 부른다. '여래장 속에서 친히 얻을지니', 이 구절이 이 날개의 몸통이다. 언해는 '사람이 곧 여래장'이라고 한다. 사람이 곧 그릇이란 말이다. 그렇다면 사람은 또 뭘까? 남명은 갓나맟을 놓아 버리고 자세히 보라고 한다. 갓나맟 속에 구슬이 들었다는 뜻이겠다. 남명의 말투는 헷갈린다. 이런 자리에서 심신(心身), 몸과 마음의 짝이 끼어 든다. 어떤 이들은 갓나맟에 담긴 깨끗한 구슬을 깨끗한 마음이라고 읽기도 한다. 몸을 버려야 변하지 않는 청정한 마음을 볼 수 있다고도 한다. 여기서 헷갈리면 헤어날 길이 없다.

영가는 다만 '씀'이라고 노래한다. 언해는 '구멍의 씀'이라고 새긴다. 구슬의 구멍은 몸의 구멍이다. 거침없이 툭툭 던지는 언해의 말투, 이래서 훤하다. 구멍의 씀, 또는 쓰임, 그게 전부이다. 뚫린 구멍, 빛도 드나들고, 소리도 드나든다. 그래서 문이라고 부른다. 그런 것이 문이나 구멍의 씀이다. '성범(聖凡)의 짝', 얽으면 범(凡)이라 부른다. 얽음에서 벗어나면 성(聖)이라 부른다. 모두가 구멍의 씀이다. 드나듦의 씀이다. 성도 범도 구멍의 씀에 달렸다. 구멍에서 얽은 것, 구멍에서 벗어난다. 말하자면 구멍의 불이법문이다. 유마의 묵연(默然)도 『증도가사실』에서 꺼낸 이야기이다. 언해는 다만 '말씀과 문자'를 들어 주고 만다. 말씀도 문자도 구멍으로 드나든다. 구멍의 쓰임이다. 땅에서 넘어지면 땅을 딛고 일어난다. 구멍으로 얽은 것 구멍으로 풀어낸다. 구멍을 떠나면, 구멍의 씀을 떠나면, 몸도 마음도 부질없다. 몸의 그릇, 그릇에 담긴 구슬, 구슬에 뚫린 구멍, 구멍의 드나듦, 이런 게 언해가 읽는 여래장의 몸통이다.

남명은 이질(異質)이 없다고 한다. 언해는 '다른 얼굴이 없다'고 새긴다. 질(質)이란 글자, 몸이 있고 살이 있다. 언해는 '읏듬'이라고도 새긴다. 성인의 얼굴, 범인의 얼굴, 영가의 읏듬, 그대의 읏듬, 다를 게 하나 없다. 얼굴의 평등, 읏듬의 평듬, 구멍을 가졌다. 구멍으로 드나든다.

어떤 것이 장(藏)입니까?


스님이 이르길,


이 늙은 스승이 너와 더불어 오고 가는 게 장이다.


중이 다시 묻기를,

어떤 것이 구슬입니까? 라 하니,


스님이 사조야! (이름을) 불렀다.

중이 대답하니,

스님이, '가거라, 너는 내 말을 알지 못한다.'라 했다.


그릇은 무엇이고, 구슬은 무엇일까? 스승에게도 구멍이 있다. 사조에게도 구멍이 있다. 구멍의 평등이다. 구멍으로 더불어 오고 간다. 구멍으로 보고, 구멍으로 안다. 잘 보고, 잘 살피라고 한다. 헷갈리는 선사들의 말투도 알고 보면 별 거 없다. 그릇과 구슬도 다만 이름일 따름이다.

증도가, 그대의 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