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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과 함께 읽는/道를 證한 노래는

045_01 그릇-구슬-구멍-열린 봄

증도가 현각의 노래

한 낱 두려운 빛이, 색(色)이로되 색(色) 아니니,


나율(那律)의 능(能)히 봄으로도, 쉬 보지 못하리로다.

정(正)한 체(體)는 예부터 옴에, 뉘 시러 보뇨?

하늘과 땅에 바람이 높으니, 눈과 서리 서늘하도다.

여섯 가지 신(神)한 용(用)이, 공(空)하되 공하지 아니하니,

한 낱 두려운 빛이, 색(色)이로되 색(色) 아니니,


여래장의 몸통, 마니구슬이 한 날개이고, 위의 두 구절은 다른 날개이다. 나는 몸과 봄의 날개라고 부른다. 봄의 씀을 노래한다. 공불공(空不空), 색불색(色不色), 공하되 공하지 아니하며, 색이로되 색 아니니, 『반야심경』의 말투가 떠오른다.

여덟 돌아감을 붙어, 미묘하게 맑은 견정(見精)을 가려 일러 여래장(如來藏)을 나토고


네가 나를 보는 견정(見精)의 밝은 근원이, 이 봄이 비록 미묘하게 맑은 마음이 아니나, 둘째 달 같아 닰그르메가 아니다.


진실의 달로 미묘하게 맑은 마음을 가잘비고, 둘째 달로 견정의 밝은 근원을 가잘비고, 닰그르메로 드틀에 버므는 분별을 가잘비셨다.

『능엄경언해』의 구절이다. 진실의 달과 달의 그르메, 다시 세종의 월인천강이 떠오른다. 언해불전에서 달과 달그르메는 여래장(如來藏)을 나토는 가잘빔이다. 나는 언해불전을 읽으며 '월인천강'이란 열쇠말을 다시 보게 되었다. 이 말은 말 그대로 언해불전을 읽는, 또는 여는 열쇠이다. 『능엄경언해』, 『법화경언해』, 『금강경언해』, 『금강경삼가해』, 『원각경언해』, 고작 다섯 가지라는 이들도 있다. 특정 종교의 경전이라고 깔보는 이들도 있다. 어쨌든 하나 하나가 대작이다. 양도 양이지만, 독특한 편집, 우리말 번역과 풀이의 솜씨가 놀랍다. 나는 이 모두가 월인천강이란 열쇠말의 자각(字脚), '글자의 다리'라고 읽는다. 언해불전은 그릇에 담긴 구슬, 구슬에 뚫린 구멍, 그리고 구멍의 씀에 대한 이야기를 거듭한다. 중생이 '본래 제 뒷논', 평등하고 자유로운 까닭을 논증하는 수단이다.

아주 오래 전부터 '우리말로 하는 철학', 이런 말을 들었다. 말은 좋다. 하지만 허전했다. 속절없고, 부질없단 느낌이 컸다. 한자말, 일본말, 영어, 독일어, 불어...... 우리말이라는 건 또 뭘까? 헷갈림도 길었다. 그런데 언해불전에 답이 있었다. 언해불전의 아주 길고 자세한 논증들, 까다로운 한자말, 추상어들을 우리말로 새긴다. 이게 참 훤하다. 번득하다. 보배 그릇에 담긴 보배 구슬들이랄까, 이 그릇, 이 구슬 만으로도 생각할 수 있고, 사랑할 수 있다. 한가지 제쥬변, 나의 평등과 자유를 논증할 수 있다. 15세기의 그릇, 세종의 구슬, 어쩌다 잊혀진걸까?

눈으로 달을 본다. 눈과 달이 마주 선다. 한 끝에 달이 있다. 다른 한 끝에 눈이 있다. 저 끝에 진실의 달이 있다. 이 끝에는 견정(見精), 섞임이 없는 고른 봄이 있다. 그 사이에서 비비고 버믄다. 눈을 비비면 둘째 달이 뜬다. 둘째 달은 비비고 버믈어 지어낸 달이다. 속절없다. 진실하지 않다. 그래서 영가는 '공하되 공하지 아니하며, 색이로되 색이 아니니'라고 노래한다. '사뭇 공'과 '사뭇 색', 짝의 말투이다. 짝의 말투는 끝을 향하지 않는다. 짝의 가운데를 향한다. 비비고 버므는 씀을 향한다. 그릇이 있고, 구슬이 있다. 구멍이 있다. 그리고 그 사이에 봄이 있다. 이런 말은 다 비유이다. 가잘빔이다. 여래장의 말투는 씀의 말투이다. 씀의 가잘빔이다. 구멍으로 열린 눈의 씀, 봄의 씀이다. 얽기도 하지만, 벗어나기도 한다. 미묘하게 맑은 마음, 견정의 밝은 근원, 이런 말도 끝의 일, 사뭇의 말투이다. 중간의 몸통, 밑을 향한다.

나율(那律)은 백반왕(白飯王)의 아들이니,

처음 출가(出家)하샤 잠 잘 자시거늘,

여래(如來)가 꾸짖으시니,


울고 이레를 자지 아니하시니,

천안정(天眼定)을 얻어 시방(十方)을 보되,

손바닥의 과자(果子)보듯 하시더라.


이삼(二三) 구(句)는 나율(那律) 따름 아니라,

불안(佛眼)도 엿볼 분(分)이 없을시라.


넷째 구(句)는 서늘하고 싁싁하여 조그만 덥듯 함도 없을시라.

나율(那律)의 이야기도 『능엄경』의 이야기이다. 졸음을 즐기다 부처로부터 '짐승의 무리'라는 꾸지람을 들었단다. 부끄러운 마음에 이레를 자지 않았더니, 두 눈을 잃었단다. '손바닥의 과자', 『능엄경언해』에서는 '손바닥의 과실'이라고 한다. 과실과 과자는 같은 말이었다. 말도 뜻도 씀도 다 옮아 흐른다.

'뉘 시러 보뇨?', 얻을 득(得)을 '시러'라고 새긴다. 남명도 거듭 '봄'을 묻는다. '봄'을 노래한다. 구슬의 구멍, 열린 씀을 가리킨다. 거듭되는 눈과 달의 짝, 본래 뒷논 것, 이걸 떠올릴 때마다 늘 미안했다. 눈을 잃은 사람은 어쩌지? 눈을 잃으면 봄도 잃고, 봄을 잃으면 '본래 뒷논 것'도 잃는 것 아닌가? 혹 눈을 잃은 이들이 그렇게 그르 알면 어쩌지?

나율은 두 눈을 잃었다. 『능엄경언해』에는 '귀 없되 들으며, 코 아닌 것으로 향을 맡으며, 다른 혀로 맛을 알며, 몸 없되 느끼며,' 이런 이들의 이야기도 이어진다. '잠깐 나토나 하마 바람의 얼굴'이란 말도 나온다. 하물며 의근(意根)을 멸해도 다 안다고도 한다. 두 눈을 잃어도, 본래 제 뒷논 나의 자유와 평등의 뿌리는 잃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언해는 나율의 이야기를 제법 길게 새긴다. 나율의 이야기, 조금이라도 위안이 된다. 비비고 버므는 둘째 달의 일, 스쳐가는 바람의 얼굴, 부처의 눈으로도 엿볼 분(分)이 없단다.

증도가, 그대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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