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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과 함께 읽는/道를 證한 노래는

043_01 내 몸이 곧 여래장

증도가 현각의 노래

여래장(如來藏) 속에서 친(親)히 얻을지니


여래장(如來藏)을, 알고자 하는가?

신 술 찬 차, 세 다섯 잔으로

긴 가람에 바람 빠르거늘, 물결 꽃이 하도다


마니주, 또는 여의주, 영가는 알지만 사람은 알지 못한다고 한다. 여래장 속에서 친히 얻을지니, 문득 아는 영가는 모르는 그대에게 말을 건넨다. 친히 얻을지니, 다른 누구의 일이 아니다. 사람마다, 그대마다 친히 얻으라고 한다. 안팤의 허물도 없고, 굵고 가는 허물도 없는 구슬이다. 여래장 속에서 얻으란다.

여래장(如來藏)을, 알고자 하는가?


얻고 싶어? 알고 싶어? 남명은 다시 고쳐 묻는다. 구슬을 얻으려면 여래장을 알아야 하는데? 아, 그래! 그렇겠네. 그런데, 산주냉차(酸酒冷茶), 산주는 쉰 술이다. 냉차는 식은 차이다. 이건 또 뭐지? 나는 이런 말투, '놀고 있네'라고 부른다. 수수께기 놀이일까? '노릇의 말씀' , 이런 것도 언해의 말투이다. 『법화경언해』는 이런 노릇을 '똥'이라고 부른다. '똥을 사랑하여'라고도 한다. '똥을 덜라'고도 한다. 그래도 남명은 놀고 싶다. 여래장이란 말을 두고, 여래장 놀이로 함께 놀자고 한다. 나는 더 이상 놀고 싶지 않다. 이런 놀이에 한번 말려 들면 똥에 묻힌다. 여래장 놀이, 헤묵은 놀이다.

여래장(如來藏)이

얽힌 데 있으며, 얽힌 데 남이 다름이 있으나,

다 이 구슬이 있어 본디 더하며 덞이 없으니라.


삼사(三四) 구(句)는 천경산(千頃山)에서 눈에 보는 일이니,

고기 잡는 사람이 물의 신령제(神靈祭) 하는 때이니,

이 물의 신령제(神靈祭)하는

고기 잡는 사람이 곧 이 여래장(如來藏)이라 할시라.


'신 술에 찬 차, 세 다섯 잔으로', 이런 말도 선사의 말투이다. 귀신에게 제사 지내는 장면을 그린다. 번거로운 제사, 정성스레 차린 술과 차, 쉬기 마련이고 식기 마련이다. 죽은 사람, 죽은 몸, 석잔도 올리고 다섯 잔도 올린다. 신 술에 찬 차, 귀신은 좋아 할까? 이런 모습, 선사들은 '제사 놀이'라 부르기도 한다. 그리고 다시 수쇄(愁殺)라고 읽기도 한다. 쇄(殺)는 과장법이다. 시름에 겨워 죽을 지경이다. 제사 상을 차리고 시름을 논다. 요즘 말로 치자면 죽음과 시름의 시뮬레이션이다.

천경산은 남명이 살던 곳이다. 산 아래에 큰 물이 있다. 고기 잡는 사람들이 벌이는 물의 신령제, 고기를 잡으려면 신령을 모셔야 한다. 천경산에서 눈에 보는 일, 남명이 내려다 보는 모습이다. 언해의 풀이는 흥미롭다. 언해의 풀이는 사실이라기 보다는 상상에 가깝다. 여래장(如來藏)을, 알고자 하는가? 남명의 눈을 빌어 물음에 답한다. 신령에게 술과 차를 올리는 고기 잡는 사람, '사람이 곧 여래장'이란다. 남명의 노래를 풀이한다지만, 언해의 대답은 훤하다. 시원하다. 언해의 풀이는 알 듯 말 듯 한 수수께끼 놀이가 아니다.

범어(梵語) 마니는 여기 말로는 여의보(如意寶)라 한다.

속성이 가볍고 부드러우며, 법다히 깨끗하여 갖가지 공덕을 가졌으니,

오직 이 한 보배로 불성(佛性)을 가잘빌만 하다.


사람마다 모두 이 보배를 가졌으나, 받아 쓰지 못하는 까닭은 뭘까?

무명의 때에 덮여, 제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이 아지 못하니'라고 했다.


'여래장 속에서 친히 얻을지니'라 한 것은,

이 마니보가 세간의 소유가 아니라서,

여래의 비밀장(秘密藏) 속에서,

친히 이 보배를 얻어야 하기 때문이다.


여래장이라 하는 말에는,

재전여래장(在纏如來藏)이 있고,

출전여래장(出纏如來藏)이 있다.


중생이 항상 삼독과 오음의 번뇌로 덮여,

비록 보장(寶藏)을 가졌으나 받아 쓰지 못하니,

재전여래장이라 부른다.


하다가 모든 부처가 세가지 덕이 정(精)히 밝아,

맑고 두렷하여, 법계(法界)의 갖가지 공덕을 꾸려 들인다면,

출전여래장이라 부른다.


장(藏)은 미뤄 두거니와, 이 구슬은 무엇이길래 보지 못하는가?


여래장은 골 아픈 말이다. 예를 들어 '여래장사상'이란 말도 있다. 무거운 열쇠말이다. 동서양의 학술이나 종교가 섞이는 과정에서 새로 생긴 말이다. '여래장사상은 불교가 아니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인도의 불교가 중국의 사상과 섞이면서 생겨난 사상이라고도 한다. 이런 이들은 여래장을 신성이나 이성 따위의 말로 읽고 새긴다. 유무(有無)의 짝으로 가르자면, 이들은 여래장을 '사뭇 덛덛한 유(有)', 변하지 않는 진리라고 읽는다. 그래서 변하지 않는 것을 사뭇 부정하는 부처의 가르침과 다르다고 한다. 나는 그런 소리들도 다 '노릇의 말씀'으로 여긴다. 아무튼 골 아픈 말, 위의 구절은 『증도가사실』의 구절이다. 재전여래장(在纏如來藏)과 출전여래장(出纏如來藏), 말만 들어도 어지럽다. 이런 글을 줄줄 읽으려면 몇날 몇달은커녕, 적어도 몇년은 골머리를 썩여야 한다. 적어도 나 같은 바보에겐 그랬다. 문제는 그런 말, 알아 봐야 부질없다는 것이다.

여래장(如來藏)이

얽힌 데 있으며, 얽힌 데 남이 다름이 있으나,

다 이 구슬이 있어 본디 더하며 덞이 없으니라.


언해의 편집자들, 그들도 『증도가사실』을 읽었다. 그들은 '얽을 전(纏)', 그냥 '얽다'로 읽고 만다. 괴뢰처럼 곡도처럼 줄로 끈으로 얽메어 있다. 언해는 골 아픈 말, 그냥 '얽거나 말거나'로 읽고 만다. 그 '다름', 구태여 가리거나 따지려 들지도 않는다. '얽거나 말거나', '사람이 곧 여래장'이라고 하고 만다. 골머리 썩일 일이 아니다. 언해의 말투, 『증도가사실』을 읽고 따르지만, 친히 읽고 친히 얻는다. 얽거나 말거나, 멋도 없고 맛도 없지만, 그대로 훤하다.

장(藏)은 그릇이다. 그릇 안에 구슬이 담겼다. 여래가 가진 그릇, 여래의 그릇이라 부른다. 여래의 그릇 안에 마니 구슬이 담겼다. 그대에게도 그릇이 있다. 부처의 그릇은 부처의 그릇이고, 그대의 그릇은 그대의 그릇이다. 그대의 그릇 안에도 구슬이 담겼다. 그런데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한다. 영가가 그대에게 건네는 노래이다. 그대의 그릇이 여래의 그릇이다. 그릇도 같고 구슬도 같단다. 영가의 긴 노래, 오롯이 그걸 노래한다.

그릇이나 구슬, 『증도가사실』은 불성(佛性)을 비유한 말이라고 한다. 한자말의 불성, 이 말도 헷갈린다. 하지만 언해의 말투, 눈이 있으면 볼 수 있다. 골이 있으면 알 수 있다. '봄'도 '아롬'도 내 몸이 하는 일이다. 나의 갖나맟이 하는 일이다. 몸이 있으면 볼 수도 있고, 알 수도 있다. 언해는 불성이란 말을 이렇게 읽는다. 그대는 물론 내게도 몸이 있다. 그릇이 있고, 구슬이 있다. 뜻이야 어떻건, 말은 뻔하다. 나는 '몸의 평등'이라 부른다. 나와 그대는 물론 개돼지도 몸이 있다. 개돼지도 보고 안다. 너무나 뻔한 일, 종교니 사상이니, 유(有)니 무(無)니 붙을 자리도 없다. '얽거나 말거나', 뭐 대단한 사상 따위가 아니다.

있는 데도 왜 보지 못할까? 있는 데도 왜 알지 못할까? 부처는 '기이하며 기이할셔!'라고 했다. 그래서 털고 나섰다. 함허는 '밑 없는 배를 타고, 구멍없는 저를 분다'고 했다. 언해불전은 다만 이 일에 붙는다. 불교의 시작과 끝이 이 일 밖엔 없다. 영가도 다만 이걸 노래한다. 보고 또 보라고 한다.


중이 남전에게 물었다.


'마니주는 사람이 아지 못하나니, 여래장 속에서 친히 얻을지니'라 했는데,

어떤 것이 장(藏)입니까?


스님이 이르길,


이 늙은 스승이 너와 더불어 오고 가는 게 장이다.


중이 다시 묻기를,

어떤 것이 구슬입니까? 라 하니,


스님이 사조야! (이름을) 불렀다.

중이 대답하니,

스님이, '가거라, 너는 내 말을 알지 못한다.'라 했다.


저 중이 모른다고 이르지 마라.

설사 모른다 해도, 나는 또 네가 얻어 잡지 못한 줄 아니라.


선사들의 말투, 『증도가사실』이 인용하는 이야기이다. 그릇과 구슬이 더불어 오고 간다. 수수께끼 같은 선사들의 말투도 알고 보면 뻔하다. 그릇과 구슬도 평상의 일이고, 평상의 말이다. 더불어 오고 가는 그릇과 그릇, 구슬과 구슬, 속절없이 멋 부리면 함께 망한다.

증도가, 그대의 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