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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과 함께 읽는/道를 證한 노래는

041_02 거울과 구슬, 때와 허물

증도가 현각의 노래

마니주(摩尼珠)는


본래(本來) 하뢰(瑕纇)없어, 정(精)과 추(麁)가 그츠니라,

달 밝고 바람 맑은, 익은 해 밤에,

한 돛으로 동정호(洞庭湖)를, 날아 지나라,

동정호(洞庭湖)는 물의 이름이라.


하(瑕)는 밖의 허물이오, 뇌(纇)는 안의 허물이니,

정추(精麁)도 또 안팎의 허물이라.


이 심주(心珠)가 본래(本來) 굵으며 가는 두 혹(惑)이 없을새,

정추(精麁)가 긋다 이르시니라.


삼사(三四) 구(句)는,

맑아 요요(寥寥)하며 하야, 반닥반닥하야 좋은 뜻이니,

구슬 얻은 곳을 이르시니라.


하(瑕)는 구슬 옥(玉)에 속하고, 뇌(纇)는 실 사(糸)에 속한다. 하(瑕)는 구슬의 허물이고,뇌(纇)는 실이나 천의 허물이다. 마니주의 하뢰(瑕纇), 남명은 추(麁)와 정(精)으로 노래한다. 언해는 구슬 겉의 허물과 구슬 속의 허물로 읽는다. 그리고 다시 가는 허물과 굵은 허물이라 새긴다. 굵은 허물, 때로는 '멀텁다'라고 새기기도 한다.

영가의 마니주, 남명은 대뜸 허물을 떠올린다. 마니주에는 허물이 없다. 굻은 허물도 없지만, 가는 허물도 없다. 남명의 허물, 언해는 혹(惑)이란 글자로 읽는다. 겉의 혹도 있고, 속의 혹도 있다. 굵은 혹도 있고, 가는 혹도 있다. 영가의 마니주, 언해는 '심주(心珠)', '마음의 구슬'이라고 풀이한다. 마음의 구슬에는 허물이 없다고 한다. 언해는 다시 허물을 혹(惑)이란 글자를 들어 풀이한다. 밖의 허물과 안의 허물, 굵은 허물과 가는 허물, 두가지 허물을 두가지 혹(惑)으로 풀이한다. 이런 풀이도 산뜻하다.

시혹 사람이 신(信)하지 아니할진댄, 뜻가장 물을지어다,

의구(意句)가 섞어 달려, 천만(千萬) 얼굴이로다,


헷갈리다

정신이 혼란스럽게 되다.

여러 가지가 뒤섞여 갈피를 잡지 못하다.


혹(惑)이란 글자, 쉬운 글자이다. 언해불전도 구태여 새기려 들지 않는다. 그런데 나는 이런 글자가 헷갈린다. 언해는 이 글자를 미혹(迷惑), 또는 의혹(疑惑)으로 읽는다. 몰라서 혹하고, 의심하여 혹한다. 나는 그냥 '헷갈리다'로 읽는다. 몰라서 헷갈리고, 의심하여 헷갈린다. 앞에서 영가는 결정설(決定說), 결정한 말을 노래했다. 미혹이나 의혹, 결정이란 말의 짝이다. 헷갈리면 갈피를 잡지 못한다. 갈피는 '갎', 겹이란 뜻의 옛말에서 나왔다. 반닥반닥한 구슬에 겹겹의 빛, 겹겹의 색상이 어린다. 천만의 빛깔이 천만의 얼굴로 섞어 어린다. 헷갈린다. 갈피를 잡지 못한다. 결정할 수 없다. 혹(惑)이란 글자, 그런 말이다. 그래서 헷갈리면 뜻가장 물으라고 한다.

가잘비건댄,


청정한 마니보주가 오색에 비취어,

방(方)을 좇아 각각 나토거든,

한 어린이는 마니에 실로 오색이 있다고 봄 같으니라.


『원각경언해』의 구절이다. 가잘비건댄, 마니주는 비유하는 말이다. 그래서 언해는 마니 구슬을 마음 구슬이라 부른다. 제우치자(諸愚痴者)를 '한 어린이'라고 새긴다. '하다'는 '많다'이다. '어린이'는 모르고 헷갈리는 이들이다. 모르고 헷갈리는 이들이 참으로 많다. 마니주는 맑고 깨끗하다. 허물도 없고 빛깔도 없다. 남명은 '요요(寥寥)하다'고 한다. 텅 비었다는 말이다. 『원각경언해』는 '맑고 좋아 허물이 그쳐 색상이 없다'고 풀이한다. 색상 없는 구슬이 색상 가진 물건에 마주한다.

『원각경언해』는 대(對)라는 글자를 쓴다. 맑게 텅 빈 구슬에 빛깔을 가진 물건이 마주한다. 맑고 깨끗하기 때문에 빛깔을 대하면, 마주한 빛깔을 그대로 나톤다. 파란 빛을 만나면 파란 빛을 띤다. 오색을 만나면 오색을 띤다. 체성(體性), 그 구슬의 몸이 지닌 구슬의 속성이다. 맑고 깨끗하여 색상이 없는 게 마니주의 속성이다. 빛깔은 밖에서 온다. 방향에 따라 빛깔을 나토는 구슬, 어린이는 구슬의 빛깔이라고 본다. 갖가지 빛깔의 구슬에 홀린다. 갖가지 빛깔에 붙는다. 버믈고 비빈다. 헷갈린다. 겹으로 쌓이는 의심, 결정하지 못한다. 말하자면 마니주의 비유는 영가의 밑이다.

남명은 '본래(本來) 허물없어'라고 노래한다. 본래(本來)는 '밑으로부터'이다. 밑에는 허물이 없다. 모롬과 의심의 헷갈림이다. 밑에는 없다던 허물, 그렇다면 허물은 어디서 생겼나? 어떻게 생겼나? 마니주란 한마디, 언해는 이런 물음으로 이끌어간다. 언해의 풀이, 말씨는 매끄럽다. 뜻가장 물어라, 허물의 밑과 끝을 묻도록 도와준다. 겹겹의 헷갈림, 갈피를 잡으면 결정할 수 있다.

요 사이에 듣글 묻은, 거울을 닦지 아니하니


마음의 때 연(緣)이 되어, 점점(漸漸) 어두워 검도다

신고(神膏)를 찍어내어, 한 당(堂)이 서늘하니

영(靈)한 광명(光明)이 밖에 가, 득(得)하지 않은 줄 처음 신(信)호라


밖으로부터 찔러 오는 드틀, 빛의 드틀이라면 먼저 눈의 망막을 건드린다. 밖의 허물은 안근(眼根)의 허물이다. 안근의 감각은 안식(眼識)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이런 감각의 재료들은 의근과 의식의 재료가 된다. 언해는 이런 재료를 '안의 드틀'이라고 부른다. 말하자면 이런 게 안의 허물이다. 드틀 또는 듣글과 거울, 영가는 '듣글 묻은 거울'로 노래하기도 한다. 듣글이 쌓이면 때가 된다. 때가 끼면 허물이 된다. 밖에도 때가 끼고, 안에도 때가 쌓인다. 밖의 허물이 되고 안의 허물이 된다. 점점 어두워 검어진다. 밖으로 헷갈리고, 안으로 헷갈린다. 결정할 수 없다.

가잘비건댄,

거울 닦음에 때 다하면, 밝음이 현(現)하듯 하니라.

비록 거울 닦다 이르시나,

곧 이 듣글 닦음이오,


가잘비건댄,

청정한 마니보주가 오색에 비취어,


구슬과 거울의 두 일이,

가잘빔이 같지 아니함을 붙으실새,


『원각경언해』의 말이다. 거울을 가잘비고 구슬을 가잘빈다. 두 가잘빔, 영가도 거울을 가잘비고 구슬을 가잘빈다. 때가 낀 거울이야, 닦아야 환해진다. 그런데 영가는 듣글 묻은 거울도, 닦지 않는단다. 일이 다르니 가잘빔도 다르단다. 닦으란 말일까? 닦지 말란 말일까? 일도 헷갈리고 가잘빔도 헷갈린다. 예를 들어 함허는 감공형평(鑑空衡平), '거울이 비며, 저울이 평(平)하여'라고 노래한다. 거울과 저울, 비추고 단다. 진실을 훤히 비추려면 맑게 비워야 한다. 정의를 달아 견주려면 좌우를 평평히 맞춰야 한다. 거울을 비우는 일, 때도 닦아야 하지만, 비추고 싶은 게 제 낯이라면, 거울 앞에 잘 들이대야 한다. 거울의 때와 구슬의 허물, 영가는 한 겹 밑으로 들어간다.

거울의 성(性)의 본래 밝음이,

밖으로부터 얻은게 아니라,

듣글이 덮으면 숨고, 닦으면 나타나니,

숨으며 나톰이 비록 다르나, 밝은 성(性)은 다르지 않으니,


거울에 듣글이 쌓이면 때가 된다. 거울을 닦는다지만, 닦아 내는 건 거울에 쌓인 듣글, 거울에 엉긴 때이다. 거울도 구슬도 비유이다. 물건을 비추자고 만든 거울, 본래의 속성이 맑고 밝다. 전설의 마니 구슬, 안팎에 허물이 없다. 본래의 속성이 맑고 밝다. 영가의 노래와 『원각경언해』의 말씀, 때로는 때나 허물을 가리킨다. 때로는 텅빈 거울이나 구슬의 성(性)을 가리킨다. 헷갈림의 사이, 밑을 가리킨다. 밑 없는 끝이 없고, 끝 없는 밑이 없다. 노래도 말씀도 밑과 끝의 사이에 있다.

증도가, 그대의 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