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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과 함께 읽는/道를 證한 노래는

040_01 차별과 평등의 사이

증도가 현각의 노래

잎 따며 가지 찾음을, 내 능(能)히 못하노니,


헤아려 가며 도로 옴에, 무엇을 득(得)하리오,

어여쁘다 노니는 아들이, 옷곳함을 좇아,

홍진(紅塵)이 안색(顔色)을, 좀 먹는 줄 아지 못하놋다.


둘째 구(句)는 줄을 찾으며 묵(墨)을 헤아려,

남의 재보(財寶) 헤아리고, 저는 한 것도 없을시라.


지엽(枝葉)과 방비(芳菲)는 차별(差別)이니,

본(本)을 버리고 끝을 좇으면,

본래면목(本來面目)을 모를새,


안색(顔色)을 좀 먹는 줄 아지 못하다 하시니라.


'잎 따며, 가지 찾음', 이건 영가의 노래이다. '헤아려 가며, 도로 옴', 이건 남명의 노래이다. '줄을 찾으며, 먹을 헤아려', 이건 언해의 노래이다. 평창(評唱), 선사들이 남의 노래를 따라 부르는 투이다. 영가의 노래에 제 노래로 마주하는 방식이다. 따라는 한다지만, 그대로 따라 하진 않는다. 노래로 묻고 노래로 답한다. 천만의 얼굴이 섞인다지만, 천만의 물음이 천만의 노래로 섞인다. 천만의 노래, 언해는 '차별'이란 말을 쓴다. 부르는 사람마다 노래의 맛이 달라진다. 차별의 노래, 차별의 맛, 이게 별미라면 별미이다. 긴 노래를 따라 부르다 보면 이런 맛도 난다.

예를 들어 언해의 '줄을 찾으며 묵(墨)을 헤아려', 이 말은 심항수묵(尋行數墨)을 새긴 말이다. 항(行)은 책의 줄, 글줄이다. 묵(墨)은 먹으로 쓴 글자이다. 수(數), 글자를 센다. 『금강경삼가해』에서는 '줄을 좇아 먹을 혜다'라고 새긴다. 글줄깨나 쓰는 이들, 줄을 가리고 글자를 헤아린다.

'잎 따며, 가지 찾음', '나는 못한다'고 한다. 그래서 뭘 어쩌라고? 혀를 건다던 영가, 이런 말투도 흥미롭다. 언해의 풀이는 훨씬 친절하다. 심항수묵(尋行數墨), 이 말은 양(梁)나라 보지(寶誌 418-515) 화상의 구절, 오래된 구절이다. 고려의 『선문염송』도 따라 부른다. 보조지눌도 이끌어 쓴다. 그만큼 익숙한 구절이다.

여인수타보(如人數他寶), 자무반전푼(自無半錢分),

남의 재보(財寶) 헤아리고, 저는 한 것도 없을시라.


친절한 언해, 위의 구절은 『화엄경』의 구절이다. '반푼도 없다'를 '한 것도 없을시라'로 바꿔 부른다. 영가의 지엽(枝葉)에 남명의 방비(芳菲), 언해는 '옷곳함'이라 새긴다. 향긋한 꽃내음이다. 언해는 다시 이를 '차별'이라고 풀이한다. '늙은 할매의 마음'이랄까, 친절이 지나치다. 이런 친절함은 어디에도 없다. 여느 선사들의 말투가 아니다. 고려 사람의 친절함이고, 조선 사람의 친절함이다.

언해의 풀이는 다시 '밑과 끝'의 짝으로 돌아간다. 잎과 가지, 나무의 끝, 영가는 못한다고 한다. 짝의 말투, 뿌리 없는 잎이 없듯, 잎이 없는 뿌리도 없다. 그런데도 영가는 못한다고 한다. 못하긴 뭘 못해, 주절주절 긴 노래나 부르면서! 말하자면 영가는 장사꾼이다. 제 혀를 걸고 뿌리를 판다. 장사꾼의 말투, 모순의 말투이다. 영가는 밑을 사뭇 가리킨다. 끝을 바라보는 이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좀 먹는 줄도 모르고 끝을 좇는 이들, 남명은 '가련하다'고 한다. 언해는 '어엿브다'고 새긴다. 결정한 말, 의심많은 여우를 바라보는 영가의 노파심을 담았다.

언해불전의 말투, 차별의 짝은 평등이다. 차별이 끝이라면, 평등은 밑이다. 언해의 본래면목, 낯과 눈의 평등이다. 눈썹의 평등이고, 몸의 평등이다. '본래 한가지로 뒷논 것', 언해는 영가의 밑과 끝을, 평등과 차별의 짝으로 읽는다. 줄과 먹, 읽지도 찾지도 말라는 게 아니다. 줄과 먹의 사이에서 뜻가장 물으라고 한다. 밑을 보라고 한다. 짝의 말투를 모르면, 영가의 결정한 노래도 밑도 끝도 없는 노래가 된다. 밑없는 끝이 없고, 끝없는 밑이 없다. 친절이 지나치다. 그래서 고맙다.

증도가, 그대의 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