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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과 함께 읽는/道를 證한 노래는

038_01 주어가 없네

증도가 현각의 노래

시혹 사람이 신(信)하지 아니할진댄, 뜻가장 물을지어다,


의구(意句)가 섞어 달려, 천만(千萬) 얼굴이로다,

위안 속의 꽃가지를, 짧으며 긺을 무던히 여길지니,

청제(靑帝)의 봄바람은, 도리어 한 양자이니라.


뜻가장, 난 이 말이 참 좋다. 우울할 때 중얼거리면 웃음이 난다. 내게도 나의 말투가 있다. 난 이런 말, 주문 또는 매직스펠이라고 부른다. 그냥 중얼거리면 그냥 기분이 좋아진다. 자동이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한번 좋으면 마냥 좋은 말도 있다. '곡도를 일으켜 듣글을 녹이는 기술'이랄까, 말을 일으켜 기분을 녹인다. 말에는 이런 쓰임도 있다. 걸어 두고, 알아 쓰면 약이 되기도 한다.

유인(有人)이 불긍(不肯)인댄, 임정징(任情徵)이어다.

시혹 사람이 신(信)하지 아니할진댄, 뜻가장 물을지어다.


유인(有人)이 불긍(不肯)인댄, 세상엔 사람도 많다. 긍(肯)이란 글자, 가(可)라는 뜻이다. 언해는 신(信)이라고 읽는다. 결정한 말, 때로 수긍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때로는 그러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언해불전의 말투에 따르면 '시혹'은 한자말 시혹(時或)에서 온 말이다. 언해불전에서는 한자 없이 우리말처럼 쓴다. 시혹(時或)이나 시유(時有), '때'가 문제다. 이럴 때도 있지만, 저럴 때도 있다. 이런 사람도 만나지만 저런 사람도 만난다. 때에 따라 달라진다. 시혹은 '때를 만나서 그런', 우연의 말투이다. 신(信)하지 않는 사람을 만날진댄, 시혹은 그래서 조건으로 새긴다. 그렇다면 뜻가장 물어라.

불긍(不肯)의 주어는 유인(有人)이다. 이건 쉽다. 어떤 사람은 믿지 않는다. 임정징(任情徵), 언해는 징(徵)을 '묻다'라고 새긴다. 그렇다면 '묻다'의 주어는 뭘까? 누가 묻는 걸까? 누구에게 묻는 걸까? 이 구절, 주어가 빠졌다. 우리말투도 그렇지만, 한자말투, 주어가 빠진 구절이 너무도 많다. 『증도가』는 아시아의 클래식, 명곡이다. 읽는 사람도 많지만, 새기는 사람도 많다. 주어 없는 구절, 사람들은 알아서 읽는다. 주어 없는 말, 알아서들 척척 쓰고 읽는다지만, 때로는 웃음거리가 되기도 한다. 때로는 다툼과 두려움을 불러 오기도 한다. 주어 없는 말, 나는 이런 말이 무섭다.

영가의 노래, 영가가 그대에게 건네는 노래이다. 영가가 그대에게 말을 건넨다. 영가와 그대 사이에 말이 있다. 말과 그대는 목적어라 부른다. 말은 직접목적어라 부르고, 그대는 간접목적어라 부른다. 주어와 목적어, 이런 말은 서구 문법에서 온 말, 서구어를 한자말로 새긴 번역어이다. 이 말투는 일본의 한자말투이다. 우리 사전은 이 일본투의 말을 '임자말'과 '부림말'의 짝으로 새기기도 한다. 새기는 말이 바뀐다지만, 이 말투는 서구의 말투이다. 중국이나 대만에서는 주어와 목적어의 짝을 주어(主語)와 빈어(賓語)의 짝으로 새긴다. 주(主)와 빈(賓)의 짝, 이걸 우리말로 새긴다면 임자와 손의 짝이다. 임자말과 손말의 짝이다. 똑 같은 서구의 말투라지만, 말이 바뀔 때, 이런 차이도 생긴다.

주반(主伴)이 교참(交參)하야 설청(說聽)이 동회(同會)로다.

주(主)와 벗이 서로 섞어, 이르며 들을 이 한데 모이도다.


15세기 언해불전의 말투, 임자와 손의 짝을 쓴다. 주빈(主賓)이란 짝도 쓰지만, 주객(主客)이나 주반(主伴)이란 짝을 쓰기도 한다. 임자와 손, 임자와 벗, 영가의 노래에 견주자면, 영가는 임자이다. 그대는 손이고 벗이다. 그 사이에 말이 있다. 영가는 말을 이르고, 그대는 말을 듣는다. 영가는 그대에게 제 노래를 부르라고 한다. 그대가 부르면 그대는 임자가 된다. 영가가 들으면 영가는 손이 되고 벗이 된다. 노래는 말로 부른다. 임자와 손 사이에 말이 있다. 말을 주고 받는다. 그래서 '서로 섞어'라고 한다. 임자와 벗이 서로 섞인다. 한데 모인다. 함께와 한데, 함께는 시간이고, 한데는 공간이다. 한가지 동(同), 여기서는 '한데'라 새긴다. 언해불전의 세계, 시간과 공간은 뗄 수 없다. 한데 모이면 함께 모인다.

임제(臨濟 -867)가 일렀다.

내 듣자니 너희들이 모두 나의 할(喝)을 배운다고 한다. 내 다시 묻는다.


동당에서 중이 하나 나선다. 서당에서도 중이 하나 나선다.

둘이 나란히 할(喝)을 한다.

누가 손인가? 누가 님자인가?


손과 님자를 나눌 수 없다면, 다시는 이 늙은 중을 배우지 마라.


할(喝)은 헥할시니, 배울 사람의 헤아림이 다 떨어지게 우리틸시라.


선사들의 말투, 말 대신 할을 주고 받는다. 할로 모이고, 할로 섞인다. 누가 임자이고 누가 손인가? 나눌 수 없다면 따라 하지 말라고 한다. 임정징(任情徵), 언해는 징(徵)이란 글자, '물음'이라고 풀이한다. 임자와 손 사이에 물음이 있다. 누가 묻는가? 누가 듣는가?

이걸 구태여 길게 따지는 까닭은 주어가 빠졌기 때문이다. 주어가 빠진 구절, 읽는 사람마다, 풀이하는 사람마다 임자와 손이 갈리기 때문이다. 말이건 할이건, 이게 참 부질없다. 누구에겐 웃음거리가 되겠지만, 누구에겐 공포, 저픔이 된다.

임정징(任情徵), 예를 들어 어떤 이는 유인(有人)을 주어로 읽는다. 어떤 이는 그대를 주어로 읽는다. 유인이 징(徵)할 수도 있고, 그대가 징(徵)할 수도 있다. 징(徵)이란 글자도 새기는 사람마다 조금씩 달라진다. 어쨌든 말이 됐든 할이 됐든, 물음이 됐든, 뭔가를 누구에게 던진다. 저 자신에게 던질 수도 있고, 영가에게 던질 수도 있고, 그대에게 던질 수도 있다. 그대가 던질 수도 있고, 저 자신이 던질 수도 있다. 손과 임자의 나뉨이 달라지면, 노래의 뜻도 아주 달라진다.

의구교치천만상(意句交馳千萬狀)이로다.

의구(意句)가 섞어 달려, 천만(千萬) 얼굴이로다,


주어가 없는 구절, 남명의 노래가 딱 어울린다. 천만상(千萬狀), 상(狀)이란 글자를 '얼굴'이라고 새긴다. 이 새김도 참 재미있다. 말이 섞어 달리면, 얼굴도 섞어 달린다. 천만의 얼굴, 누가 누구에게 뭘 던져 대는지, 누가 뭘 맞는지, 누구도 모른다. 난장판, 웃음도 일지만, 저픔도 인다.

첫 구(句)는 시혹 사인(邪人)이 결정(決定)한 말을 신(信)하지 아니커든,

뜻가장 힐란(詰亂)할시라.


의구(意句)는 힐란(詰亂)할 제의 가진 뜻과 묻는 언구(言句)이라.


삼사(三四) 구(句)는 꽃가지 비록 잛으며 긺이 있으나,

봄바람 화(和)한 기운은 본래(本來) 높낮이 없으니,


네 물음이 비록 만 가지나,

이 일에 낙처(落處)는 오직 이 한 묘(妙)이니라.


언해는 '네 물음'이라고 풀이한다. 이 구절의 목적어, 또는 빈어, 손이나 벗은 '너'이다. '그대'이다. 노래를 부르고 말을 던져도 듣지 않고 믿지 않으면, 여우도 되고 사마(邪魔)도 된다. 그렇다면 '한 묘(妙)'를 가진 주어는 또 누구일까? 영가의 노래, 물론 영가가 주인이다. 영가가 던지고 그대가 맞는다. 어쨌든 언해의 풀이는 번득하다. 임자와 손을 딱부러지게 나누고 가른다.

'한 묘(妙)'는 결정한 말로 나토는 진승이다. 영가는 그걸 나톤다. 이젠 그대 차례이다. 불러 봐라. 던져 봐라. 천만의 물음, 천만의 얼굴, 뜻가장 던져 봐라. '의심 말지어다', 남명은 토를 달지만, 언해의 풀이는 '뜻가장 의심하라'이다. 창과 방패, 모순이 맞선다지만, 영가는 하나의 창으로 그대를 찌른다. 천만의 그대들, 천만의 창으로, 천만의 의심으로 뜻가장 찔러 봐라. 나는 하나의 방패로 무던히 막으려니. 영가가 그대에게 건네는 노래, 언해의 풀이는 이렇다. 영가의 결정한 말, 의심해야 노래가 나온다. 뜻가장 불러야 맛이 난다. 덤벼라 덤벼! 뜻가장 덤벼라! 언해가 이 노래를 읽는 언해의 솜씨이고 말씨이다.

증도가, 그대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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