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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과 함께 읽는/세종에게

우연일까, 필연일까?


불상유통(不相流通)

서르 사맛디 아니할새


신제이십팔자(新制二十八字)

새로 스믈여듧자를 맹가노니


저 사진을 뉴스에서 처음 보았을 때, 기분이 참 묘했다. 파랗게 쓴 'ㅁ', 빨갛게 쓴 'ㄱ'. 김정숙 여사의 아이디어였다고 한다. 북녘에서 온 위원장을 만나면 이 뜻을 꼭 전해달라고 부탁했다고도 한다. 우연과 필연이란 말이 떠올랐다.

언해불전의 말투를 따르면 필연(必然)은 '반다기 그런'이다. '반다기'는 '반드시'의 옛말이다. 이에 비해 우연(偶然)은 '만나서 그런'이다. 우(偶)를 '만나다'라고 새긴다. 배가 고프면 밥을 먹어야 한다. 이런 일은 '반다기 그런'이다. 먹지 못하면 죽는다. 밥을 먹을 수도 있고, 냉면을 먹을 수도 있다. 이런 일은 '만나서 그런'이다. 사람이 하는 일, '만남'이 꼭 끼어 든다. 시시때때, 만나는 상황은 달라진다. 냉면을 먹어야지, 아무리 굳세게 마음을 먹었다 하더라도, 만나 봐야 한다. 당해 봐야 한다. 평양냉면, 줄을 서 기다리다가 짜장면을 먹었다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짜장면을 먹는다고 죽지 않는다. 세상이 뒤집히지도 않는다. '만나서 그런'일이 다 그렇다.


이 사진은 이제 과거, '지나간 뉘'의 일이 되었다. 만남도 이뤄졌다. 하고 싶었던 일, 하고 싶었던 말, 이미 했고, 이미 지나갔다. 이 일이 '반다기 그래야 할' 일처럼 느껴진다. 우연이 아니라 필연처럼 느껴진다.

훈민정음의 이 구절에서, ‘사맛디’는 유통(流通)을 새긴 말이다. 언해불전에서는 활짝 열려 훤히 통하는 문, 드나드는 일을 묘사하는 말이기도 하다. 세종실록에는 이른바 언문을 두고 세종이 정창손, 최만리 등과 나누었던 토론의 기록이 남아 있다. 세종은 지식과 실천, 소통의 근거를 ‘쉬운 말, 쉬운 글’에서 찾는다. 글이 쉬워지면 유통도 그만큼 쉬워지고 늘어난다. 이에 대해 정창손은 알고 실천하는 일은 말이나 글이 아니라, ‘사람의 자질’에 달려 있다고 한다. 타고난 자질은 사람마다 다르다. 자질이 부족한 어린 백성은 어쩔 도리가 없다는 것이다. 쉬운 말과 타고난 자질, 이 두 가지는 타협할 수 없는 모순일까? 고집불통의 신하들, 세종은 ‘쓸모없는 속된 선비’라고 거칠게 비판한다. 이런 차이, 이런 분노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


어려서 백성일까, 백성이라 어린 걸까? 이런 차이는 600년이 지난 오늘도 유효하다. 어리석어서 가난한 것일까, 가난해서 어리석은 것일까? 아무튼 세종은 쉬운 글자, 쉬운 길을 해답으로 내놓았다. 어린 백성도 함께 들고 날 수 있는 소통의 문을 열고자 했다. 하지만 당대의 선비들은 세종의 의지, 세종의 길을 철저하게 묵살했다. 그냥 반대나 고집이 아니었다. 그러는 사이 언해불전이 만들어졌다.


개 돼지도 아는 일, 언해불전은 전체가 이 일에 대한 일이다. 때로는 다라니의 문이라고도 부르고, 때로는 불성이나 여래장이라고 표현한다. 선사들은 때로 '한 것'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일물(一物)을 이렇게 새겼다. 표현은 달라도 결론은 하나다. 너도 알 수 있고 누구나 알 수 있다. 언해불전은 그 근거를 하나하나 논증하고 방법을 설명한다. 언해불전은 신비한 종교의 신비한 비급이 아니다. 찬찬히 읽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논리적인 글이다. 문은 언제나 열려 있다. 열린 문에 차별이란 없다.


이건 내가 언해불전을 읽는 까닭이다. 이건 나의 우연이다. 나는 언해불전을 만났다.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만났다. 말도 만나고 사람도 만났다. 만나다 보면 만남에 붙어 이런 저런 일도 생긴다. 지나고 나면 필연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필연이면 좋겠다는 바램도 갖는다. 

서르 사맛디 아니할새


이것은 세종의 만남이었다. 이게 원인이었다. 그런데 그 자리에 파란 'ㅁ'이 있었다. 문재인 대통령의 자리라고 했다. 남과 북, 또는 북과 남, 유통이 끊어졌다. '서르 사맛디 아니할새', 이게 원인이고 이게 시작이었다.

새로 스믈여듧자를 맹가노니


이것도 세종의 만남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결과였다. 유통(流通)을 위하여 신제(新制), 글자를 '새로 만들었다'. 이게 훈민정음의 원인이고 결과이다. 세종의 선택이었고, 세종의 실천이었다. 그런데 이 자리에는 빨간 'ㄱ'이 있었다. 김정은 위원장의 자리라고 했다. 대통령이 원인이 되고, 위원장이 결과가 되라는 뜻일까? 그는, 또는 그들은 뭘 새로 만들어야 하는 걸까?

'사맛디 아니할새'와 '새로 맹가노니'의 사이, 저 두사람의 사이에는 아직도 많은 일이 남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세종은 유통을 위하여 글자를 새로 만들었다. 글자는 유통으로 가는 길이었다. 저 두 사람은 남과 북을 대표하여 '평화와 번영, 통일'이라는 선언문에 서명했다. 유통으로 가는 길이다. 세종은 글자를 만들었다. 길을 잡았다. 하지만 글자를 만들었다고 담박에 유통이 이뤄지지는 않는다. 그 때의 어린 백성은 아직도 어리다. 길을 잡았다고 다 온 것은 아니다. 길을 잡았다면 손잡고 함께 가야 한다. 반대하는 신하들, 임금과 신하 사이조차 통할 수 없었다. 

그래도 저 그림, 세종의 말씀 앞에서 '유통과 신제'를 나누는 두 사람, 이게 정말 필연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誠)이란 글자가 있다. 언해불전은 '진실로'라고 새긴다. 때로는 '옳다'라고 새기기도 한다. 세종 앞에서 선 두사람, 그들의 말과 짓에서 성(誠)을 느꼈다. 저 장면이 나오기까지 여럿이 애를 썼겠다. 시간이 흘러, 이 모든 일이 '지나간 뉘'가 되었을 때, 더 많은 사람들이 필연이었다고 느끼면 좋겠다.

세종이 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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