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월인천강, 평등과 자유의 열쇠/말의 얼굴

1.1 계몽 또는 무명(無明)


계몽(啓蒙) [명사]

지식수준이 낮거나 인습에 젖은 사람을 가르쳐서 깨우침


어릴 적, ‘계몽주간’이란 말이 흔했다. 열 계(啓)에 어두울 몽(蒙), 글자만 보자면 ‘어둠을 열다’는 뜻이다. 좋은 말이다. 그런데 이 말을 들으면 ‘무지몽매’라는 말도 떠오른다. ‘아는 것이 없고 사리에 어두움’이란다. ‘낫놓고 기역자도 모른다’, 이런 말도 있다. 누군가 누군가를 가르치고 깨우친다. 온 나라 백성들이 계몽을 받아야 하던 때도 있었다. 계몽주간, 이런 말을 지어내는 사람은 누굴까? 늘 궁금했다.

계몽이란 말은 오래된 말이다. 예를 들어 교과서에 『역학계몽』이란 책 이름이 있었다. 『동몽선습』이란 책도 있었다. 어린 아이들, 뭘 모르는 사람들은 언제나 있었다. 그러니 가르치고 깨우치는 사람들도 언제나 있었다. 누군가를 위해 애쓰는 사람들, 고마운 이들이다. ‘계몽주의’란 말도 있다. 이 말은 서양에서 온 말이다. 인라이튼먼트(Enlightenment), 18세기 서양의 말을 한자로 번역한 말이다. 그리고 그 뜻을 나름 우리말로 풀이한 것이다. 빛의 시대, 글자 그대로 ‘빛을 비추어 어둠을 열다’는 뜻이다. 자연의 빛으로 어둠을 밝힌다. 자연의 빛은 이성의 빛이다. 사람들이 본래부터 품고 있는 빛이다. 빛을 비추면 환해진다. 환해지면 누구나 안다.

불교의 불(佛)이란 글자는 인도말이다. 붓다(Buddha)를 한자로 바꾸어 적었다. 보통 각자(覺者)라고 새긴다. 깨달을 각(覺), 깨달은 자라고 부른다. ‘깨침’이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다.

깨닫다 [동사]

사물의 본질이나 이치 따위를 생각하거나 궁리하여 알게 되다.


‘깨닫다’는 말, 사전의 풀이를 따르자면, 생각하거나 궁리하거나, 뭔가를 해서 뭔가를 ‘알게 되다’는 말이다. ‘뭔가를 하다’는 원인이나 방법, 또는 과정이다. ‘뭔가를 알게 되다’는 그 결과이다. 생각을 해서 알 수도 있고, 궁리를 해서 알 수도 있다. 알기 위해서는 뭔가를 해야 한다.

이 부텻 일후므로 들여 깨닫게 호리이다


국어사전은 이 말의 어원을 『석보상절』에서 찾는다. 그런데 『석보상절』, 각오(覺悟)라는 한자말을 ‘다’라고 새겼다. 여기서 각(覺)은 ‘(잠에서) 깨다’는 뜻이다. 오(悟)는 ‘알다’는 뜻이다. 각오는 ‘잠에서 깨어 안다’는 말이다. 잠에서 깨는 일과 아는 일은 아주 다른 일이다. 서양 사람들은 붓다의 각(覺), 깨달음을 인라이튼먼트(Enlightenment)라고 새긴다. 어웨이크닝(Awakening)에 비기기도 한다. 이건 ‘잠에서 깸’이다. 동양과 서양이 멀다지만, 생각도 말도 돌고 돈다. 다 사람 사는 세상이다. 사람의 일이 닮았기 때문이다.

무명은 아는 성품이 본래 밝거늘, 망념(妄念)이 문득 일어 밝은 것을 어둡게 할새, 이름이 무명이라.


불교에서는 무명(無明)이란 말을 쓴다. ‘밝음이 없다’, 어둡다는 말이다. 사람들은 이 말을 명사처럼 쓴다. 중국말, 한자말의 말투가 이렇다. 깨닫다는 말은 캄캄한 자리에 빛을 비추는 일이다. 빛을 비추거나 잠을 깨는 일은 둘 다 비유이다. 이 비유가 ‘알다’라는 말에 붙어 있다. 캄캄하면 볼 수 없다. 볼 수 없으니 알 수도 없다. 빛을 비추면 환해진다. 환하면 볼 수 있다. 보면 안다. 환해지면 그냥 보고 그냥 안다. 그 이상 아무 것도 할 필요가 없다. 캄캄하다면 빛을 비추면 된다. 잠도 마찬가지다. 잠을 깨면 그냥 보고 그냥 안다. 빛을 비추면 환해지듯, 잠을 깨면 환해진다. 계몽이나 무명, 빛의 비유나 잠의 비유는 똑 같은 전제를 바탕으로 한다. 그냥 보고, 그냥 안다. 누구나 알 수 있는 능력을 본래부터 가지고 있다는 전제이다. 알 수 있는데도 알지 못하는 까닭은 캄캄하기 때문이고 잠을 자기 때문이다.

그 쉬움을 이른다면, 눈을 뜨면 곧 보고, 귀 기울이면 곧 들으며, 입을 열면 모두가 이르고, 발을 들면 거름마다 밟으리. 평지에서 하늘에 오름은 진실로 쉽지 않으나, 옷 입어 잠에서 깸이야 어찌 어려우리오.


보며 보라, 어려우며 쉬움은 곧 이 한 사람에 달린 일이라.


‘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이 있다. 이런 일이 평지에서 하늘에 오르는 일이다. 이런 일은 ‘진실로 쉽지 않다. 하지만 ‘잠에서 깸’은 이런 일이 아니다. 사람은 물론 개돼지도 매일 같이 하는 일이다. 누구나 잠을 자고, 누구나 잠을 깬다. 누구나 만날 하는 일, 어려울 리가 없다.

어린 사람이 잠이 무거워 제 듣지 못할지언정

치인(癡人)을 ‘어린 사람’이라고 새겼다. 나도 어려서부터 잠이 무거웠다. 학교갈 시간, 비몽사몽을 헤매면서도 잠을 깨고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잠이 무거운 아이, 아침마다 온 집안이 시끄럽다. 잠이 무거운 어린이를 깨우는 일, 때로는 아주 어려울 수 있다.

우바리가 반되 빛으로, 죄를 더 매되


우바리는 석가모니의 제자이다. 요즘이야 스위치만 누르면 그냥 환해진다. 물론 그렇지 못한 곳도 많다지만, 어쨌든 좋은 세상이다. 도시의 삶은 외려 지나치게 밝다. '반되'는 '반디'의 옛말이란다. '반되 빛'. 형광(螢光)이다. 요즘의 형광등(螢光燈)도 반되의 빛이다. 반되 한마리의 빛, 형광등에 비할 바가 아니다. ‘형설(螢雪)의 공’이란 말도 있다. 아주 작은 빛이다. 작다고는 해도 빛은 빛이다. 깊은 산속이라면 반디 한 마리의 빛에 눈이 부실 수도 있다. 반디 몇 마리를 모아 책을 읽을 수도 있고, 바늘 귀를 끼울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빛에 기대어 살다 보면 눈도 침침해지고, 바늘로 손가락을 찌를 수도 있다. 반되 빛은 소승불교를 가리킨다. 빛이 너무 작아서 죄를 풀기는커녕, 도리어 더 맨다고 했다. 그래도 사람들은 반되 빛의 스승만을 바라본다. 그러나 어두워서 맸던 죄, 빛으로 풀어야 한다. 빛이 모자라다면 계몽은커녕, 함께 망하는 수도 있다. 우바리의 작은 빛을 탓하는 말이다. 작은 빛으로 계몽하려 드는 잘못을 탓한다. 죄를 푸는 길이 틀렸다. 죄를 탓할 게 아니라, 먼저 빛을 탓하라고 한다.

빛을 비추는 이, 잠을 깨우는 이, 누군가 나를 위해 애를 쓴다면, 그거야 미안하고 고맙다. 그렇다 해도 잠에서 깨는 거야 제 자신이다. 가르치고 깨우친다지만, 그래서 아는 게 아니다. 아는 것도 제 자신이다. 제가 가진 제 능력이다. 서양의 빛도 동양의 잠도 비유이다. 계몽도 무명도 각오(覺悟)도 비유이다. 이 비유에는 똑 같은 전제가 있다. 첫째, 누가 빛을 비추건, 누가 잠을 깨우건, 아는 것은 제 자신이다. 둘째, 빛이 비치면 누구나 그냥 안다. 잠을 깨면 누구나 그냥 안다. 알기 위해 달리 뭘 할 필요가 없다. 이런 일에 차이도 차별도 없다. 셋째, 어둠이나 잠은 개인의 조건이 아니다. 우리 모두가 함께 겪는 우리 모두의 조건이다. 반되의 빛으로 모두를 비추고 깨울 수 없다.

형광(螢光), 반되의 빛과 형광등의 빛, 빛의 크기가 다르다. 빛의 조건이 다르다. 요즘 불교책을 보면 ‘깨달음’이나 ‘깨침’이란 말이 정말 자주 나온다. 깨달음이란 말은 너무 무겁다. 이런 말이 나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뭔가 신격의 신비함을 느낀다. 그건 아니더라도 엄격한 수행을 연상한다. 내가 갈 수 없는 자리, 내가 할 수 없는 일, 점점 낯설고 멀어진다. 내가 알 수 없고, 내가 할 수 없다면 남에게 기댈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런 말, 이런 일도 반되의 빛이 된다. 이런 걸 소승이라고 부른다. 대승은 빛을 키우라고 한다. 빛을 키울수록 더 환해진다. 더 환해지면 더 많이 보고 더 많이 안다. 계몽도 무명도 빛의 조건이다. 빛을 키워야 한다. 더 환하게 밝혀야 한다. 그러기만 하면 누구나 다 안다. 그러면 죄를 맺을 일도 줄어든다. 풀 일도 줄어든다.

이 이야기는 언해불전의 우리말투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 말투는 요즘의 말투와는 다르다. 그래서 낯설다. 언해불전의 우리말투는 한문의 말투를 우리말로 번역한 말투이다. 한문말투와 우리말투가 나란히 적혀 있다. 그래서 한문말투와 우리말투를 쉽게 견줄 수 있다. 요즘의 말투는 도리어 한문말투에 가깝다. 요즘의 말투와 견주어 보아도 언해불전의 우리말투는 가볍다. 가벼워서 도리어 낯설다. ‘깨달음’이란 말은 아예 쓰지도 않는다. 한 두차례 나오긴 해도 그저 잠을 깬다는 뜻일 뿐이다. 그 대신에 그냥 ‘아롬’이란 말을 쓴다. 배고프면 먹고 졸리면 자고, 자연스럽다고 한다. 자는 일이 자연스럽듯, 깨는 일도 자연스럽다. 자연스럽고 쉬운 일 ‘보고 또 보라’고 거듭 권한다. 거듭 권하는 까닭은 지레 겁을 먹는 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무지몽매한 자들, 겁을 주는 이들도 있다. 계몽하는 자, 계몽 당하는 자 사이에 금을 긋기도 한다. 계몽하는 자는 계몽하는 일에 익숙해진다. 계몽당하는 자는 당하는 일에 익숙해진다. 익숙해지면 고치기 어렵다. 이런 것들이 다 무명이고 어둠이라고 한다. 가르침과 깨우침이 오히려 어둠과 잠을 무겁게 만든다고도 한다.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세계, 부처는 '말이 읏듬'이라고 한다. 말은 빛의 조건이다. 말이 무거우면 깨우기는커녕 잠도 무겁게 한다.